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6화 (416/510)

00416 대륙을 조정하는 자  =========================================================================

*  *  *

“이야아, 두 분께서 참으로 잘해주셨습니다. 저도 감탄했습니다.”

내가 수정구를 향해서 말했다. 나는 엎드려 누워서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 …….

수정구에서 비추는 인물은 롱그위 성녀. 성녀님을 알현하기에는 내 자세가 적이 불경스러웠으나, 공식적인 접견이 아니었을뿐더러 나 말고 상대쪽도 포즈가 똑같았다. 성녀도 엎드려서 등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어라. 왠지 얼굴이 안 좋군요. 경사스럽게도 브르타뉴의 영토가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조금 더 기뻐하셔도 괜찮을 텐데요.”

─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요!

롱그위 성녀가 갑자기 소리를 꽥 질렀다. 성량이 어찌나 높은지 그만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나저나 나 때문에 죽을 뻔하다니?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롱그위 성녀가 발정난 원숭이처럼 날뛰었다.

─ 그 표정!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그 표정이 열받아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성녀의 명성은 다시 한번 치솟았고, 인민이 제 발로 영토를 갖다 바쳤습니다. 브르타뉴군은 피에몬테 지방에 무혈입성. 어딜 봐도 좋은 일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소인은 감사를 받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 제가 편형을 받았다구요! 얼마나 아팠는지 아세요!?

아아. 그 얘기였는가.

내가 드디어 감이 왔다는 표정을 짓자, 롱그위 성녀가 더욱 기세등등해져서 따져왔다.

─ 저는 채찍을 맞는 동안 아예 혼절해버렸어요!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 같은 아녀자한테 편형을 맞으라고……믿을 수 없어요!

시끄럽다. 고작 스무 대 갖고 뭘 칭얼거리는가.

나는 무려 일흔 대나 맞아본 적도 있었다. 채찍질 몇 대 맞아서 영토를 늘렸으니 오히려 대단한 이득이었다. 어차피 포션을 왕창 써서 등에 흉터도 안 남았겠지.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아니냐.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예에, 예에. 고결하시고 신성불가침하신 올빼미 성녀님의 피부를 상하게 해서 무척 송구스럽게 되었습니다. 저 단탈리안, 마음속 깊이 유감을 표명합니다.”

─ 당신, 언젠가 반드시 죽여버리겠어요!

“와아. 그거 참 무섭군요. 제가 어디 성녀님 때문에 밤에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겠습니까.”

─ 이이이익!

요즘 들어서 나를 죽이겠다는 양반이 부쩍 늘었군. 죄다 여자밖에 없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하긴 나도 웬만하면 미녀의 손에 죽고 싶지, 꾀죄죄한 남정네한테 살해당하긴 싫었다. 예쁜 여자에게 죽으면 왠지 그것만으로도 천국에 갈 확률이 두 배는 높아진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농담은 여기까지였다. 내가 어조를 바꾸었다.

“슬슬 남부 귀족들도 기세가 꺾일 때가 되었습니다. 프랑크 남부는 내전에 휩쓸리지 않았지요. 덕분에 시민들이 풍요롭습니다만, 그 반동으로 전쟁에는 면역이 없습니다. 이른바 일장일단이라는 물건이군요.”

─ ……실성하지 않는 이상 우리 브르타뉴군에 맞서지 않는다. 그런 뜻인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선가 용병을 대규모로 고용해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시기가 너무 늦어버렸다. 용병이 모집되는 동안 브르타뉴군이 신나게 영지를 약탈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약해빠진 민병으로 천하의 브르타뉴군을 요격하기란 불가능했다. 남부 귀족들은 단단히 외통수에 몰렸다.

“남부 귀족들은 십중팔구 프랑크의 신생 정부에 백기를 들 겁니다. 독립권을 포기하고 프랑크에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전쟁이 끝나니까요.”

조약에 의거해서 브르타뉴는 프랑크를 침범할 수 없었다. 남부 귀족들이 다시금 프랑크에 종속되면 그 순간부터 브르타뉴군은 철수해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남부 귀족들은 프랑크의 중앙에 빚을 지게 됩니다. 이게 중요하지요. 끄응.”

내가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데이지가 마사지를 멈추고 옆으로 물러섰다. 내가 오른손을 내밀자, 데이지는 말없이 담뱃대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음. 마사지를 받고 난 다음에 빨아재끼는 이 한 모금이 참을 수 없이 맛있다는 말이지.

─ 아.

“알겠습니까? 역할이 바뀌는 것입니다. 만약 남부 귀족들이 처음부터 중앙에 고개를 숙였다면, 빚을 지게 되는 쪽은 도리어 베르시 백작입니다. 충분히 독립을 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협조해준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사정이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 ……그, 저기.

“베르시 법무상의 권위는 더욱 높아지겠지요. 대귀족들의 힘이 약해지고, 중앙관료들에게 명망이 모여듭니다. 프랑크는 꽤나 괜찮은 나라가 될 겁니다.”

─ 자, 잠시만요. 궁중백.

수정구에서 비춘 롱그위 성녀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발갛게 물들었다. 시선을 애써 돌리면서 흠칫흠칫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 옷 좀 입으세요. 외간 여자한테 남사스럽게 그게 무슨 꼴인가요.

나는 마사지를 받는 도중이었으므로 당연히 상의와 하의를 입지 않았다. 헐렁한 천조각을 수건처럼 허리에 둘렀을 뿐이다. 아무래도 곱게 자라난 성녀께서는 남자의 맨살을 보는 것이 퍽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아?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썩을 대로 썩은 사람끼리 뭘 부끄러워 하십니까.”

─ 당신은 썩었을지 몰라도 저는 썩지 않았거든요.

롱그위 성녀가 내 눈길을 피했다. 목소리에도 평소보다 날카로움이 부족했다. 나는 그 반응에서 본능적으로 어떤 진실을 잡아챘다. 마치 번개가 스치듯이 뇌리가 번쩍거렸다. 내가 입을 벌렸다.

“설마…….”

나의 목소리에서 불길함을 느꼈을까. 롱그위 성녀가 머뭇거렸다.

─ 뭐, 뭔가요.

“설마, 성녀님. 그 나이가 되도록 처녀입니까.”

─ 지금 여자한테 뭘 물어보는 거예요!?

롱그위 성녀가 또 다시 소리를 꽥 질렀다. 틀림없었다. 초점이 흔들리는 눈동자, 창피함에 달아오른 뺨, 차마 치욕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까지, 모든 정황적 증거가 롱그위 성녀의 처녀성을 맹렬하게 증명했다.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수가. 정말 삼십 살이 될 때까지 남자 한 명 못 사귀어봤습니까? 진짜요? 인격에 심각한 결함이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미모를 가졌으면서 대체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군요…….”

─ 설령, 만에 하나, 제가 평생 처녀를 지켰다고 해도 그게 제 인격을 손상시키지는 않아요!

롱그위 성녀가 암사자처럼 포효했다.

─ 당신처럼 제멋대로 하반신을 놀려대는 불한당은 모르겠지만, 본래 순결을 지키는 것은 훌륭한 덕목이에요! 당신보다 제가 저열한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지 마세요! 당신이야말로 불결하니까!

“불쌍하게도……그런 시대착오적인 편견에 사로잡혀서 여태까지, 자그마치 삼십 년 동안 삶의 행복을 모르고 살았다는 말입니까……이제 늙는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나날을 허무하게 날려버리고…….”

─ 그러니까 그렇게 안쓰럽다는 눈길로 바라보지 말라고요! 아테나이시여! 도대체 제가 왜 당신처럼 쓰레기 같은 남자한테 그 따위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건가요!?

아니, 미안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동정하고 있었다. 이거 순 천연기념물이 아니고 뭔가. 생각해보니 내가 처녀를 만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데이지도 처녀이긴 했지만 아직 열다섯 살밖에 안 됐으니 성녀와는 비교가 불가했다.

나는 왠지 미안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성녀님이 그리 생각한다면야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모로 불편한 주제를 건드려서 죄송합니다…….”

─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이 사과하니까 꼭 제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잖아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니, 제가 사과한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제가 배려심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군요. 처녀라니……세상에 그런 단어가 아직까지도 현존하는지 미처 까먹고 살았습니다.”

─ 정말로 죽여버리겠어!

롱그위 성녀가 울부짖었다. 나에게는 몹시 처량하고 슬픈 곡소리로 들리기만 했다.

이후, 나는 앙리에타 여왕과 이번 반란에 대해서 상의하며 넌지시 “성녀님한테 실한 남자 좀 소개시켜주십쇼” 하고 청탁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떨떠름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과인이 수십 번은 만남을 주선했어. 하지만 전부 퇴짜를 놓지 뭔가.

“세상에. 얼마나 눈이 높길래 그런 답니까?”

─ 본인이 열두살 때부터 주장하기로는 백마 탄 왕자님 아니면 꽁냥거릴 의향이 없다더군. 순수하고 착한데다 오직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왕자님이어야 한다던가.

“…….”

─ …….

“피에몬테 지방은 프랑크 중앙정부에 삼분지일을 넘겨주는 것으로 처리하지요. 아마 베르시 법무상이 직접 그쪽으로 협의하러 갈 테니,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 그래. 과인도 동의하겠어.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이상 논의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다만 우리 두 사람의 눈동자에서 동정심이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이때부터 롱그위 성녀가 쓸데없이 화를 부려와도 무척이나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주어게 되었다. 노처녀 히스테리는 불치병이니 너그러워질 수밖에.

*  *  *

1513년 1월 하순, 남부 대귀족들은 프랑크의 중앙 정부에 고개를 숙였다.

대귀족들은 베르시 법무상이 약조한 대로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으나, 그들이 원래 만끽하고자 했던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중앙 정부의 허가 없이는 군사를 동원하지 못했고, 타국과 외교적인 협약을 맺지 못했다.

이것과 동시에 브르타뉴군이 철수했다. 어디까지나 '프랑크와 브르타뉴는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라는 르 아브르 조약을 준수한 것이었다.

더불어, 브르타뉴에 항복한 피에몬테 지방의 일부가 프랑크 중앙정부에 양도되었다. 기껏 반란을 성공시킨 사르데냐인들이 반발했지만, 여기서는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이 한몫 거들었다. 프랑크에 한 발자국 양보해준 대가로 아무런 유보 없이 피에몬테 출신의 노예들을 전부 해방시켜주었다.

이로써 반란에 참여한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

사르데냐인은 자기네가 고분고분한 백성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브르타뉴는 거진 공짜나 다름없이 상당량의 영토를 얻었다.

베르시 법무상은 가만히 앉아서 남부 대귀족들을 휘어잡았다.

유일하게 대귀족들이 피해를 옴팡 뒤집어썼지만, 본디 세상이란 소수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법이었다.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아주었으면 한다. 그러게 애당초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이 잘못이었다.

이번 반란을 계기로 프랑크는 공식적으로 '프랑크 섭정제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황가의 권력을 인도받아서 섭정이 황제를 대신하여 국가행정을 통솔했는데, 이 섭정은 프랑크의 모든 도시의회 및 모든 영주귀족이 한 표씩 투표를 행사하여 선출하였다. 요컨대 도시민의 참여가 보장된 귀족공화정이었다.

공작, 백작, 남작, 계급을 가리지 않고 한 표씩. 영주귀족들은 평등을 약속받았다. 비록 일반 민중이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도시의회는 투표에 참여하게 되었다. 반쪽짜리에 불과했지만 공화정은 공화정이었다.

섭정은 종신직. 섭정이 죽었을 경우에만 새로운 섭정을 뽑았다. 베르시 법무상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프랑크를 통치하겠지.

“…….”

나는 오랜만에 합스부르크 황궁에 들렸다.

황궁의 심처에는 파이몬이 안치되어 있었다. 투명한 수정으로 만들어진 관 속에서 파이몬은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마법적인 처리가 가미되어 시체가 썩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한 나절을 보내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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