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5화 (415/510)
  • 00415 대륙을 조정하는 자  =========================================================================

    대귀족들이 조심스럽게 여왕한테 다가갔다.

    “전하. 옥체에 편형을 내리실 필요까지야 어디 있겠습니까.”

    “손수 일벌백계를 보여주시려는 의기에, 소인들, 감탄했습니다. 하오나 이미 육신을 여신께 바친 성녀입니다. 편형을 내렸다가 혹여 신들의 마음이 편치 않을까 걱정되옵니다.”

    “…….”

    대귀족들에게 싸늘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미 여왕과 장군들, 병사들이 자신들만의 삼각지대를 완벽하게 형성했다. 대귀족들은 한낱 부외자에 불과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단호하게 도리질을 쳤다.

    “왕의 재판은 지엄하며 번복을 용납하지 않는다.”

    “저, 전하. 여기서는 저희의 얼굴을 봐서라도 부디.”

    “판결을 집행하겠다! 채찍을 대령하라!”

    앙리에타 여왕이 벌떡 일어나서 성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 광경이 구경할 만했다. 여왕이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연대장, 기병대장, 기사단장, 궁중마법사장, 온갖 고위간부가 달려들어서 여왕의 발을 붙잡았다. 이들이 하나같이 곡소리를 냈다.

    마침내 앙리에타 여왕이 성녀에게 당도했다.

    “자클린 롱그위, 상의를 벗어라! 설마 이제 와서 용서를 빌지는 않을 터!”

    “……예, 저의 여왕이시여.”

    성녀가 새하얀 상의를 벗어서 여왕에게 등을 내보였다. 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살결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시종에게 채찍을 건네받아 치켜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이들이 제지한 보람도 없이, 채찍은 가혹하게 성녀의 등에 내리쳤다. 롱그위 성녀가 기우뚱했다. 자칫 땅바닥에 몸이 처박힐 뻔했다. 그러나 성녀는 철의 의지로 고통을 견뎌내고 신음조차 뱉지 않았다.

    ‘여, 연기 따위가 아니다! 저건 진짜야!’

    ‘성녀에게 채찍질을 가하다니 브르타뉴의 암캐가 드디어 실성했는가!’

    대귀족들이 경악했다.

    그들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 일부는, 설마 전하께서 성녀님을 진짜 심하게 때리려구, 하고 어딘지 모르게 낙천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채찍 소리가 장내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자 병사들은 기겁했다.

    “한 대!”

    여왕이 가차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미처 사람들이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두 번째 채찍질이 성녀의 등을 파고들며 기다란 핏자국을 사선으로 남겼다. 성녀는 한층 더 땅을 향해서 몸이 기울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 채찍질.

    “아아아악!”

    여태까지 신음을 꾹 참아낸 성녀도 이번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대기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장군들과 병사들이 모두 엎드려서, 성녀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그녀에게 동조하여 크게 울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기어코 채찍질을 스무 대 채웠다.

    “…….”

    성녀가 땅에 쓰러져 있었다. 열 대가 넘어진 시점에서 성녀는 이미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서 힘없이 널브러졌다. 그저 채찍이 내리치면 몸을 들썩거리며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성녀의 등가죽은 검붉은 색과 보라색으로 변색하여 끔찍하게 너덜너덜해졌다.

    “자클린 롱그위 부사령관을 침실로 옮겨서 치료하라.”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그녀도 얼굴이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다음은 과인 차례이다.”

    여왕이 편형을 받을 때는 아까 전보다 더욱 큰 곡소리가 터져나왔다. 연대장에서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브르타뉴의 군인은 출신과 계급을 불문하고 울어재꼈다. 그들에게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는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여신이나 다름없었다.

    “흐읍……!”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 편형 스무 대를 감당했다. 앙리에타는 놀랍게도 채찍을 맞는 내내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정좌를 한 자세 그대로 채찍질을 고스란히 견뎠다. 본신의 실력이 검주(劍主)에 버금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왕이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다음은……제장들 차례다.”

    열댓 명에 이르는 장수들이 눈물을 흩뿌리며 상의를 벗었다. 편형에 대한 공포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다. 존경하는 여왕 전하께서 참담한 일을 겪게 되신 것 자체에 슬픔을 느낀 것이었다.

    앙리에타는 열한 명에 이르는 장수들에게 일일이 채찍을 때렸다. 장수들 전원이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처벌을 인내했다. 그들의 결심은 단단했다. 여왕 전하께서 자그마치 스무 대를 비명 없이 버티셨다. 반면에 우리는 겨우 다섯 대. 고작 다섯 대였다. 감히 어떻게 신음이라도 흘리겠는가…….

    아니, 실제로 채찍은 아프지도 않았다. 여왕이 휘두르는 채찍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했다. 방금 전에 생으로 편형을 당한 사람이 어찌 힘차게 팔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에타 여왕은 “한 대……두 대……” 하고 형벌을 집행했다.

    아프지 않았다. 그 사실이 장수들에게는 더더욱 고통스러웠다.

    여왕은 부하들을 처벌한 다음에 자신을 처벌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을 두 번째 차례에 놓았다. 어째서인가.

    장수들은 여왕의 의중을 잘 알았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편형을 스무 대 맞고 나서는 제아무리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일지라도 진이 빠져버리기 마련. 그 상태에서는 형벌을 집행해본들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사실상 고통을 받는 것은 여왕과 성녀뿐……장수들은 단지 형식적으로만 처벌을 받았다. 여왕은 의도적으로 오늘 재판에서 장수들을 배제시켰다. 죄가 없는 장수들에게 채찍질을 가할 수는 없다면서.

    “전하……흐윽, 전하…….”

    시간이 지날수록 채찍을 휘어잡은 앙리에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장수들은 등줄기에 내리치는 채찍의 강도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생생하게 깨달았다. 장수들이 흘리는 눈물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많아졌다.

    결국 앙리에타는 마지막 연대장을 처벌하고서 픽 쓰러졌다. 혼절한 것이었다.

    여왕은 들것에 실려서 막사로 옮겨졌다. 시종들 중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브르타뉴군 전체가 초상집이 되어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설 법정 한쪽 구석에는 이번 재판의 또 다른 주인공들, 즉 사르데냐 반란군 이백여 명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를 위해서 처벌을 받은 성녀에게, 또 그런 성녀를 감싸느라 스스로 옥체를 돌보지 않은 여왕에게 감사함과 송구스러움, 죄책감이 뒤섞인 감정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니 실로 모든 인간이 격정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프랑크의 남부 대귀족들을 제외하고.

    “…….”

    병사들이 한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대귀족들을 노려보았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만 있다면 벌써 대귀족들을 싸그리 참살하고도 남을 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이미 브르타뉴군에게 대귀족들은 감히 ‘세상에서 제일 마음씨 고우신 성녀님과 여왕 전하를 넝마짝으로 만들어버린,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자식들’로 인식되었다.

    “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소이다.”

    “어서 이곳을 피합시다.”

    대귀족들은 도망치듯이 자신들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병사들의 싸늘한 눈초리가 끝까지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재판 사건의 소식은 단숨에 사르데냐인의 반란 지역으로 퍼졌다.

    하늘 아래 제일 고귀한 인간이라는 성녀가 이백 명의 미천한 평민, 그것도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당장 사형당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포로들을 위해서 희생했다. 이 이야기는 사르데냐인은 물론이고 프랑크인에게도 큰 감명을 안겨주었다.

    반면에 남부의 대귀족 여덟 명은 평판이 최악으로 떨어졌다.

    첫 번째, 대귀족들은 비겁한 방식으로 지난 국화전쟁에서 이득을 취하였다. 거의 끝나버린 전쟁의 막판에 발끝만 살짝 담근 주제에 영토까지 취했다. 기사도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어려운 작태였다.

    두 번째, 대귀족들은 조국 프랑크를 등지고 자치 및 독립을 선포했다. 그 때문에 대귀족들의 영지가 고향인 노예들이 풀려나지 못했다. 도저히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충실한 모습이라 보기 힘들었다.

    세 번째, 고작 포로 이백 명을 돌려받겠다며 일국의 여왕과 성녀가 편형을 짊어지도록 방관했다. 포로들에 대한 관용도, 자기보다 직분이 높은 인물들에 대한 존중도 없었다. 귀족이기 이전에 인간적으로 미숙한 모습이었다.

    전쟁에서 법도를 무시한 비겁함.

    조국에 대한 충성과 전통을 저버린 이기적임.

    무엇보다도 재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비인간성.

    세 가지의 이유로 인하여 프랑크 남부 대귀족들은 완전하게 인망을 잃어버렸다. 사르데냐인들은 더더욱 가열차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제껏 신중하게 태세를 살펴보던 상류층과 귀족들마저 반기를 들었다.

    대귀족들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퍼부었다. 대귀족들은 비록 염치가 없었지만 브르타뉴군에 반란군을 토벌할 것을 주문했다. 반란군은 무기와 물자가 현저하게 떨어졌으므로 과연 정면대결에서 브르타뉴군을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황당한 사태가 발생했다.

    반란군이 속속들이 브르타뉴군에 투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롱그위 성녀가 백마를 몰고 전장에 나오기라도 하면 반란군이 즉각 태세를 돌변하여 흰색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사르데냐의 민중은 '악랄한 프랑크의 독재자들'에게 창칼을 향할지라도 '상냥하시고 고귀하신 성녀님'에겐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물론 이러한 항복에는 계산적인 타협이 숨어 있었다. 사르데냐 본국에서 반란군을 지원해줄 희망이 전무한 이상, 반란군은 새로운 후원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브르타뉴군은 이에 적합했다.

    일단 브르타뉴는 본국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곳 피에몬테 지방을 직접 통치할 여력이 안 되었다. 상당히 높은 자치권이 보장될 확률이 높았다. 더욱이 브르타뉴는 군사강국. 주변국의 압박에서 안전했다…….

    감정적인 호감과 계산적인 판단, 양쪽 기준에서 브르타뉴 왕국은 합격이었다.

    한 번 파도가 밀어닥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반란군은 급속하게 브르타뉴에 항복했다. 심지어 반란군이 자체적으로 탈환한 도시와 마을이 제 발로 달려가서 투항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이, 이럴 수는 없소! 브르타뉴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용병으로 온 것! 고용인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창을 거꾸로 잡다니, 세상에 이런 법도가 어디 있소!”

    대귀족들이 분개해서 여왕에게 항의했다.

    앙리에타 여왕은 항의 서신을 받아들고 간단하게 한 줄만 적어서 답장했다.

    “천명이 브르타뉴로 하여금 피에몬테를 돌보라 하는데 어찌 거부하겠소?”

    그제야 대귀족들은 자신들이 용병이 아니라 한 마리의 늑대를 불러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앙리에타 여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피에몬테 지방을 홀라당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대귀족들은 화급하게 프랑크 본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자신들만으로 브르타뉴를 상대하는 것은 너무도 무모했다. 하지만 대귀족들이 받아든 답서에는 앙리에타 여왕의 편지보다 훨씬 더 짧은 두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불가(不可).”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데 동참하지 않은 대귀족들에게 원군을 내어줄 정도로 베르시 백작은 우둔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시 백작은 그거 잘 됐다면서 모처럼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피에몬테 반란을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점입가경이라고 했던가. 브르타뉴군은 피에몬테 지방을 손에 넣자마자 기세를 몰아서 프랑크 본국에 침입해 들어갔다. 대귀족들의 본래 영지까지 위험해진 것이었다.

    “르 아브르 조약의 위반입니다!”

    대귀족들이 사신을 보내서 격렬하게 반항했다.

    꼭두각시 전쟁에서 브르타뉴는 프랑크에 패배함으로써 '브르타뉴 왕국과 프랑크 제국은 향후 14년 동안 서로의 국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라고 약조했다. 여왕이 자신들의 영지를 침탈한 것은 명백히 국제조약을 어긴 것이라며 사신이 성토했다.

    하지만.

    “그대들은 더 이상 프랑크 제국에 복속하지 않고 있다. 허니 조약문을 위반할 것도 없지 않은가?”

    “무슨……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과인이 이미 프랑크에 의견을 물어보았네. 이것이 조약을 위반한 행위인지 아닌지 미리 양해를 구했지.”

    툭, 하고 앙리에타 여왕이 사신에게 두루마리를 던졌다.

    사신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곳에는 여덟 대귀족의 영지는 전적으로 자치권이 보장된 독립국이며 프랑크는 이에 일절 간섭하지 않겠노라고, 법무상 베르시 백작의 의견이 적혀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방긋 웃었다.

    “보아하니 그대들의 영주는 과인에게 항복하든지 프랑크에 다시 칭신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모양이로군. 참. 과인에게 항복하면 내 잘 대해주겠어. 이래 봬도 우리는 한때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묶인 사이 아닌가?”

    사신은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립니다. 브르타뉴가 이번 반란에서 새로이 얻게 된 영토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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