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4화 (414/510)
  • 00414 대륙을 조정하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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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에 대한 작업은 단탈리안의 계획대로 무탈하게 흘러갔다.

    브르타뉴의 군대는 기껏 의뢰를 받은 주제에 설렁설렁 반란을 진압했고, 덕택에 프랑크의 남부 대귀족들은 스트레스만 왕창 쌓였다. 무엇보다도 대귀족들은 사방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다.

    ─ 명색이 프랑크인이면서 반란을 무마하는 데 구적(仇敵) 브르타뉴의 손을 빌리는가!

    ─ 이제 와서 프랑크의 품을 떠나 자치와 독립을 얻으려 하다니 괘씸하다.

    ─ 억울하게 노예가 되어버린 신민을 해방시킬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 일부 귀족들이 사사로운 욕심을 내세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저버렸다.

    이것이 평범한 프랑크 사람들의 비판. 즉, 대다수의 프랑크 귀족과 민중이 가진 의견이었다.

    그러나 남부 대귀족들은 꿋꿋하게 버텼다. 대귀족들에게는 자신이 있었겠지. 프랑크의 남부 지방은 내전으로 피폐해지지도 않았고, 국화전쟁에서 새로운 영토까지 얻었다. 요컨대 ‘약한 놈들이 백날 떠들어본들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겠다’라는 입장이었다.

    그때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게릴라전을 펼치던 사르데냐인 반란군 이백여 명이 브르타뉴군에 항복했다. 정확히 왜 항복했는지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 역시 사전에 미리 기획된 것으로, 이백 명의 반군을 이끄는 자는 단탈리안의 해방동맹에 소속된 일원이었다.

    이렇게 포로로 잡힌 사르데냐인은 공식적으로 대귀족들의 신민이었다. 당연하지만 브르타뉴군에게는 포로를 대귀족들에게 인도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사르데냐인 포로를 한 명도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롱그위 성녀가 나섰다.

    주홍빛의 곱슬머리가 아름다운 여자, 이제 소녀티를 완전히 벗어재껴서 원숙한 여인이 된 자클린 롱그위, 현재 대륙에서 가장 명망이 높고 가장 많은 칭송을 받는 성녀는, 갑작스럽게도 포로의 인도를 거부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왜 포로를 건네주지 않겠다는 거요?”

    “그대들은 너무나 야만스럽게 민초를 다룹니다. 저번에 인도한 포로들을 모조리 교수형에 처해버리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의 폭거는, 아테나 여신님을 대신하여 제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대귀족들 입장에서는 황당무계했다.

    “반란을 다스림에 있어 다소 과격한 처벌은 도리어 권장받아야 마땅하오. 성녀께서는 지금 자비심에 눈이 멀어 대사를 그르치고 있소.”

    반란을 일으킨 민초는 신민이 아니었다. 탄압하고 소거해야 할 전염병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롱그위 성녀는 막무가내로 나왔다.

    “애당초 그대들은 정당한 통치자가 아니라 외국에서 끼어든 압제자에 불과합니다. 사르데의 민중이 여러분께 반기를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뭐, 무슨 소리를……!”

    “천녀는 한낱 개인에 불과하므로 여왕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을 번복할 수는 없습니다.”

    롱그위 성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와드릴지라도 무구한 생명이 사라지는 것만큼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브르타뉴군은 브르타뉴의 법도를 따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용병비를 들여서 고용한 브르타뉴군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열불이 터졌거늘, 롱그위 성녀의 발언은 불에 기름을 퍼붓는 격이었다. 롱그위 성녀가 진압을 사사건건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반란 자체가 초전에 종결되었을 터다.

    요컨대 롱그위 성녀는 쓸데없이 바른 말만 나불거리는 방해꾼이었다. 이만큼 얄미운 사람도 없으리라.

    대귀족들이 즉각 롱그위 성녀의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며 이성적인 숙고가 현저하게 부족한 반항’에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 도대체 브르타뉴는 용병을 끌고 온 것인가, 아니면 자선가를 끌고 온 것인가.

    ─ 우리가 지불한 사례금을 즉각 반환하고 철군하든지, 무분별하게 국가대사에 끼어든 성녀한테 마땅한 처벌을 내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양측은 단숨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롱그위 성녀의 명성은 가볍게 다룰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브르타뉴의 상징과 같았다. 그러나 앙리에타 여왕은 놀랍게도 성녀가 아니라 대귀족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인간성에 국경은 없다. 어느 한 사람이 누군가의 인간성을 소유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인간성 이외에도 제2의 인간성, 즉 사회성을 각자의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동의 아래 체결한다.”

    앙리에타 여왕이 임시로 마련된 법정에서 말했다. 롱그위 성녀는 공손하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이었으므로 땅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 사회적인 인간성에 있어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가 성립한다. 피에몬테 지방의 사르데냐인은, 의문의 여지없이, 마살리아 공작을 비롯하여 여덟 대귀족에게 그 사회적 인격성이 종속되어 있다.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비록 영원불멸하진 않을지언정 존중받아 마땅한 계약을 준수하지 않았음이라. 이에 실형을 선고한다.”

    실형을 선고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놀랐다.

    이번 반란에서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가 격렬하게 맞부닥치고 있다고는 하나, 두 사람은 약간의 마찰 때문에 손상될 정도로 우정이 얕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과로 끝나겠지, 하고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헌데 실형이라니.

    “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경우 감형해줄 수 있노라.”

    앙리에타 여왕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사람들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공갈이었다. 실형을 내리겠다는 선고로 대귀족들의 체면을 살려주고, 동시에 사과를 유도함으로써 실질적인 처벌도 피해간다. 능숙한 재판이었다.

    그러나 성녀는 꼿꼿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천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예상과 어긋난 발언에 모두가 술렁거렸다.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가 서로를 빤히 노려보았다.

    “끝내 과오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피에몬테의 사르네냐인은 결코 자발적으로 여덟 대귀족을 통치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프랑크는, 아니 일찍이 프랑크에 적을 두고 있던 대귀족들은, 강압적인 수단으로 이 지방을 점령했습니다.”

    그러자 재판을 참관하고 있던 대귀족들이 일어서서 삿대질을 했다.

    “우리의 통치권은 피렌체 조약에 근거해서 인정되었다!”

    “열국이 모인 가운데 성사된 권리를 어디서 감히 무시하는가!”

    분위기가 점점 과격해졌다. 형식상 간단하게 사과만 받고 물러나려던 대귀족들도 마음이 바뀌었다. 그들은 큰 목소리로 롱그위 성녀에게 처벌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앙리에타 여왕이 괴로운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정말로 사과를 할 마음이 없는가.”

    “제 결심은 굳건합니다.”

    성녀는 어디까지나 뻔뻔하게 나왔다.

    “도리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저들입니다. 부당하게 사르데냐인을 탄압했음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늘 아래를 활보하고 다니니, 여신들께서 저주할 것입니다.”

    “저, 저런 망측한 일을 보았나!”

    대귀족들은 시끄럽게 고함을 토해냈다.

    이 와중에 여왕은 삼십 분에 걸쳐서 몇 번이나 사과를 종용했다. 그러나 성녀는 타협의 여지를 일절 내비치지 않았다. 결국 앙리에타 여왕은 재판이 시작할 때와 사뭇 달라진 목소리로, 그러니까 한없이 음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판결을 내린다.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계속해서 군무에 임하도록.”

    “여왕 전하!”

    대귀족들이 얼굴을 붉혔다.

    자클린 롱그위는 브르타뉴군에서 부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전권을 휘둘렀으므로 허수아비 부사령관에 불과했으나, 어찌되었든 부사령관은 부사령관이었다. 그런 직책에 계속 남겨두겠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처벌도 가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대귀족들이 격앙하여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앙리에타 여왕이 말했다.

    “그러나 처벌이 없을 수는 없다. 자클린 롱그위 성녀, 그대는 무단으로 이백여 명의 포로를 취했다. 이백 명에서 열 명씩 한 대로 계산하여, 그대에게 스무 대의 편형(鞭刑)을 선고한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성녀는 반쯤 신성불가침했다. 그런 성녀에게 채찍질을 가하다니 전례에 없었다. 대귀족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먼저 브르타뉴군의 장수들이 선수를 쳤다.

    장군들이 일제히 롱그위 성녀 앞으로 달려나가서 땅바닥에 넙죽 이마를 댔다.

    “전하! 성녀는 그간 아국에 공헌한 바가 무수히 많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편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앙리에타 여왕은 명백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쓰디쓴 독주를 들이킨 사람처럼 이빨을 꾹 물었다.

    “부사령관직에서 파면시켜도 모자랄 판국에 편형으로 그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관대한 처벌이다. 제장은 행여라도 불만을 품지 마라.”

    “전하! 성녀는 꼭두각시 전쟁에서 전하를 대신하여 파리시오룸에 남았습니다!”

    “여기 숨 쉬고 있는 모두가 성녀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전하께서 지엄하게 법도를 집행하는 것은 옳사옵니다만, 소장들이 어찌 이와 같은 사태를 외면하겠나이까!”

    “시끄럽다!”

    재판이 이상해졌다.

    틀림없이 재판은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가 대립하는 형태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어느새 앙리에타 여왕이 '괴롭지만 법도를 위해서 희생하는 역할'처럼 비추고 있었다. 대귀족들은 졸지에 방관자가 되어버려 멍하게 재판을 지켜보았다…….

    “항의를 제기하는 장수들에게도 모조리 편형 다섯 대를 선고한다!”

    “전하!”

    “그리고!”

    앙리에타 여왕이 이빨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부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과인에게 책임이 있는 바. 과인에게도 자클린 롱그위 성녀와 동일하게 편형 스무 대를 선고한다!”

    “전하아아!”

    어라.

    대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게 무엇인가. 왜 갑자기 장수들이 나서서 롱그위 성녀를 일제히 두둔하는가. 왜 장수들까지 편형 다섯 대를 선고받는가. 아니, 여기까지는 여차저차 말이 된다고 해도――어째서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여왕까지 편형을 스무 대씩이나 받겠다고 나서는 것인가?

    이래서야.

    “고금에 옥체를 스스로 상하게 하는 판결은 없었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에이잇! 시끄럽노라, 머저리들아! 신하의 잘못은 곧 군주의 잘못이다!”

    이래서야 마치.

    “네놈들은 과인이 자신의 잘못을 신하들에게 떠넘기는 우군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냐! 이제부터 판결에 왈가불가 토를 다는 녀석이 한 사람 생길 때마다 과인의 처벌에 편형을 다섯 대씩 추가하겠다!”

    마치, 이쪽 대귀족들이 철두철미하게 악인이 되어버린 것 같지 않은가.

    “전하……흐윽, 전하…….”

    “소신들이 불민하여 이런 망측함을…….”

    30대는 물론이고 40대, 50대도 종종 섞인 장군들이 눈물을 흘렸다. 롱그위 성녀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앙리에타 여왕도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브르타뉴의 장교들과 병사들도 땅바닥에 무릎을 꿇어 ‘전하!’를 연호했다.

    대귀족들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당최 연유를 몰랐다.

    다만 여기서 여왕에게 편형이 이루어지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지금껏 귀족으로서 살아온 깜냥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만 보면 대귀족들이 형벌을 요구하는 바람에 일국의 여왕까지 편형을 받아버리는 꼴이 되지 않는가!

    대귀족들이 마음속으로 일제히 절규했다.

    ‘이, 이건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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