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3화 (413/510)
  • 00413 대륙을 조정하는 자  =========================================================================

    *  *  *

    “평화란 참으로 좋군.”

    엘리자베트는 요 근래 더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 평화란 물건이 하루에 17시간 가량의 업무시간, 4시간 가량의 수면시간을 강요하므로 평범한 인간에게는 결코 평화스럽지 않고 오히려 극악무도하게 느껴지겠지만, 엘리자베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렇습니까요.”

    근무차 통령실에 들린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통령의 책상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저걸 보고 평화를 운운하다니, 확실히 통령은 변태였다.

    “아아. 단탈리안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엘리자베트가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꼭 중년 아저씨가 온천에 들어가서 표정이 헤벌레 풀어지는 것 같은걸, 하고 쿠르츠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단탈리안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예? 잘못 들었습니다?”

    “생각해봐라, 슐라이어마허. 대륙에서 나쁜 일이란 나쁜 일은 죄다 단탈리안이 만들어낸다. 그건 달리 말해서, 단탈리안만 조심하면 대륙은 평안하고 무탈하다는 뜻 아닌가.”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발상에 스스로 감탄했는지 우쭐거렸다.

    “대륙 어디에 반란이 일어났다. 그럼 단탈리안을 살펴봐라. 대륙 어디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것도 단탈리안을 살펴봐라. 세상만사가 실로 간단해지나니. 단탈리안인가, 단탈리안이 아닌가, 모든 문제가 그리 집약되는 것이다.”

    “하아, 예에…….”

    “인생이란 하나의 창문으로 내다보면 실제보다 훨씬 근사해지는 법. 단탈리안이야말로 본인의 창문일지도 모른다.”

    이거 맛이 갔군.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마음속 깊이 통령을 동정했다. 그러니까 일 좀 줄이고 휴식을 취하라고 수백수천 번이나 권고했거늘, 자기에게는 일하는 게 쉬는 거라면서 살인적인 업무량을 짊어지더니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본인은 지금 삶에 무척 관대하다. 아무리 단탈리안이라고 해도 아나톨리아 제국을 하루아침에 거꾸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무사태평한 것이지. 후후. 본인이 선취점을 따낸 것이야.”

    쿠르츠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제2차 국화전쟁의 끄트머리에서 통령은 종전기념 무도회에 참석했다. 통령은 놀랍게도 단탈리안 궁중백과 춤을 추었다. 그날부터 엘리자베트 통령은 ‘제법 춤을 잘 추더군’이라든지, ‘후후’라든지, 틈만 나면 단탈리안 얘기를 꺼내면서 키득거렸다.

    “단탈리안도 그걸 알았겠지. 하지만 낭만성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본인과 함께 무언가를 꾸민다는, 그 매력적인 낭만에 스스로 허리를 굽혀주었어.”

    “그렇습니까―?”

    “즉, 이건 달리 말해 단탈리안이 본인에게 상당히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맛이 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뇌수가 쉬어버렸다.

    어째서일까. 쿠르츠는 심각하게 자문했다. 지금은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 뇌수가 썩어버리기에는 적당한 계절이 아니었음에도, 엘리자베트 통령은 실시간으로 썩어가고 있었다……무엇이 문제일까. 역시 과로인가…….

    “단탈리안이 본인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를 상대해줄 수 있는 사람이 대륙에서 본인이 유일무이하기 때문이지.”

    쿠르츠가 썩은 동태눈깔이 되어서 통령을 쳐다보았다.

    “그냥 차라리 궁중백과 결혼해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하아?”

    엘리자베트 통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멍청한 인간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본인이 왜 단탈리안과 결혼하는가? 뇌수가 쉬어버렸는가, 슐라이어마허. 여름도 아니고 겨울인데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군.”

    “……아니. 허구한 날 궁중백 타령을 해대니 소인이 그러는 것 아닙니까요. 어차피 한쪽은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수장이겠다, 다른 한쪽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세이겠다, 이참에 다시 하나의 합스부르크로 합쳐버리면 되겠군요.”

    엘리자베트 통령이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아국은 공화제를 표방하고 있다. 저쪽에서 왕정제를 포기하면 모를까, 애시당초 제국과 공화국은 너무나 다르다.”

    “루돌프에게는 후사가 없습니다. 루돌프가 죽으면 공화제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따뜻한 눈길로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를 쳐다보았는데 마치 미워할 수 없는 낙제생을 바라보는 선생과 같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세는 인간이 아니라 마왕들이다. 그런데도 제국이 대륙의 국제외교에서 인정받는 까닭은, 최소한 외견상이라도 인간인 황제에게 마왕들이 복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아.”

    “단탈리안이 괜히 제국의 대장군으로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임명했는 줄 아는가? 파르네세 공작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황제와 대장군, 제국의 얼굴을 모두 인간으로 내세운 것이야.”

    그러므로 제국이 왕정제를 버리고 공화제를 택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불가능하다.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단언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단탈리안은 공화제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지난 번에 공화주의 대표회의를 무산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얼마 전에는 마왕 파이몬이 숙청되지 않았더냐?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그만한 사건에 단탈리안이 관여하지 않았을 리 없다.”

    “과연. 단탈리안이 행여라도 공화제를 주장할 일은 없습니까…….”

    엘리자베트가 턱을 끄덕거렸다.

    “단탈리안은 단지 공화주의가 선동에 유용하기에 써먹을 따름이다.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어. 단탈리안에게 이념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겠지.”

    글쎄, 하고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이쪽에서 공화제를 포기하면 이야기가 성립할지도 모른다만.”

    “예?”

    “우리 공화국이 제국에 항복하는 대신, 본인이 단탈리안과 더불어서 공동황제에 즉위한다. 그런 가능성은 있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눈이 둥그레져서 통령을 바라보았다. 통령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해나갔다.

    “다만 섣불리 항복해서야 국민들이 납득해주지 않겠지.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제국이 아국에 비해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질 것. 전면전이 벌어지면 우리한테 도저히 승산이 없음이 명백할 것. 그렇다면 본인이 '선처'를 부탁하며 항복할 수 있게 된다.”

    “하아…….”

    “물론 한여름밤의 꿈과 같은 얘기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멋쩍었는지, 엘리자베트가 씨익 웃었다.

    “우선 단탈리안이 제아무리 제국의 실세라 해도 황위까지 넘볼 권리는 없다. 실력이 아니라 권리의 문제다. 또한 공화제에 관심이 없는 인물한테 아국을 갖다바칠 만큼, 본인은 이기적이지 않다…….”

    다만, 만약 일이 그렇게 풀리면 확실히 인명피해만큼은 적어진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마왕과 인간이 결합하는 것이다. 종족 간의 화해라는 명분이 생긴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합작이라는 형태까지 취할 수 있다. 입헌군주제가 적당하겠지. 의회의 수장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에게 맡긴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공왕(公王)이었다. 실력도 증명되었다. 의회를 대표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인재가 없었다. 가장 큰 장점은 단탈리안의 심복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로써 입헌군주제가 성립할지라도 단탈리안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게 가능했다.

    얼추 그림이 맞았다.

    “……뭐, 역시 불가능하겠다마는.”

    마왕 바르바토스가 그런 구상을 납득할 리 없었다. 마왕 파이몬이 숙청된 것을 보아하니 단탈리안은 확실하게 바르바토스의 편에 기울었다. 바르바토스는 마왕에 의한 정복을 바라고 있었다. 입헌군주제 따위 사도(邪道)였다.

    “결국 망상에 불과하다. 슐라이어마허.”

    엘리자베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쿠르츠를 쏘아보았다.

    “괜히 본인의 시간을 빼앗을 여유가 있다면 본인을 도와서 서류를 처리하게나.”

    “소, 소인은 사르데냐의 프랑크 점령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뿐입니다!”

    “이미 알고 있다. 멍청한 프랑크 귀족들이 브르타뉴에 원군을 요청했다지. 어차피 대귀족들이 권위를 잃고 베르시 법무상에 의한 통치로 종결될 것이다. 공화제에 가까운 나라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 우리로서 나쁠 일이 없다.”

    자아, 하고 엘리자베트가 일어나서 손수 서류뭉치를 쿠르츠에게 건네주었다. 어림잡아도 삼백 장이 넘었다. 쿠르츠가 울상을 지었다.

    “각하. 제가 서류에 쥐약이라는 걸 아시면서도…….”

    “자네가 게으름을 피우면 백 명의 인민이 불행해진다. 자네가 도망치면 천 명의 인민이 고달파진다. 민중을 책임지는 지도자에게 나태 따위는 허락되지 않아.”

    결국 그날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장난삼아 결혼 얘기를 꺼낸 대가로 온종일 통령에게 붙잡혔다.

    ――이 시점에서, 프랑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가 단탈리안이 계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당사자들 이외에 아무도 없게 되었다.

    *  *  *

    세상은 한꺼번에 바뀌지 않는다.

    혁명이라느니 변혁이라느니, 겉으로는 갑작스럽게 폭발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아득하게 긴 시간 동안 변화할 준비를 해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지금 억지로, 의도적으로, 단시간에 끝마치고자 했다.

    시간은 단축하는 데 필요한 것은 언제나 피다. 피가 많이 흐를수록 그만큼 역사는 가속된다.

    ─ 당신이 지시한 대로 따라주었어요. 반란은 점점 커지고 있구요.

    수정구에서 투영된 롱그위 성녀가 말했다.

    프랑크 남부의 대귀족들은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나는 그들을 직접 도와주는 대신 브르타뉴군에 연결을 시켜주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대귀족들은 브르타뉴에 막대한 용병비를 치르면서 원군을 끌어다 썼다.

    하지만 이때 내가 꼼수를 사용했다.

    ‘대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사르데냐인의 반란을 진압하되,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말 것.’

    이런 식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은 적극적으로 반란을 뭉개트리려고 날뛰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롱그위 성녀는, 타국의 백성을 함부로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사사건건 여왕을 타박했다.

    결과적으로 브르타뉴군은 앙리에타 여왕과 롱그위 성녀, 두 사람의 의견충돌 때문에 거동이 어려워졌다.

    반란이란 본디 초전에 박살을 내지 않고 내버려두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마련이었다. 브르타뉴군이 기껏 진출했으면서 진압에 밍기적거리자, 사르데냐인은 이때가 외국인의 통치에 맞서 봉기할 때라면서 우후죽순처럼 일어섰다.

    ─ 하지만, 궁중백. 이렇게 해서 우리가 얻을 이익이 무엇이죠?

    “사르데냐인의 민심을 당신에게 모으는 것입니다. 롱그위 성녀. 당신은 저번에도 제노바의 시민들을 구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지역의 백성까지 구하게 된 셈입니다.”

    내가 말했다.

    “저를 믿으십시오. 사르데냐인들은 반란을 성공하고 나서 당신에게 자발적으로 영토를 갖다바칠 것입니다. 전부 브르타뉴를 위해서입니다, 롱그위 성녀.”

    ─ 그러니까, 저는 우리의 이익이 무엇이냐고 물었어요. 제가 얻을 이익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궁중백이 무슨 이익을 얻을지 전혀 감이 안 오네요. 당신은 이익도 없는 일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프랑크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저에게는 이득입니다.”

    성녀의 지적이 옳았다. 나는 이득이 없는 일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프랑크 제국와 브르타뉴 왕국, 거기에 사르데냐 왕국까지, 세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정리해버릴 속셈이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줄 의리는 없겠지. 브르타뉴는 조금 더 배가 불러질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과식을 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테지만, 그건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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