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2화 (412/510)

00412 대륙을 조정하는 자  =========================================================================

1513년의 새해가 밝았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어느덧 8년째가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의외로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워낙에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일까…….

“대부님. 홍차입니다.”

“아. 고맙구나, 루크.”

루크가 탁자에 홍차를 내려놓았다. 데이지보다 약간 어수룩했지만 꽤나 각이 잡혔다.

루크는 자경단의 부단장직에서 사퇴했다. 자경단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제레미인 이상, 루크가 뛰쳐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자경단 대신에 루크에게 새로이 주어진 업무는 집사장이었다.

“집사 업무에는 조금 익숙해졌느냐?”

“아직 미숙하지만 시녀장 덕분에 어떻게든.”

루크가 멋쩍게 웃었다.

검은색의 집사복을 차려입은 루크는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엔 활기차고 순수한 천연 미소년이었지만, 지금은 눈동자에 깊은 슬픔과 회한이 배어들었다. 몸 한구석이 언제나 우수에 잠겼다.

영지의 처녀들은 변모한 루크에게 환호성을 질렀다. 상큼발랄한 루크도 좋지만 숙성된 포도주처럼 진한 향기를 풍기는 루크도 좋다나 뭐라나. 그러나 우리 영지민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문란하고 난잡한 연애생활을 뚝 끊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집사장이 시녀장보다 높은 직위인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데이지가 집사 업무도 겸임했으니, 여러 방면에서 너보다 선배이고 상사이다. 열심히 배우거라. 너희 남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예, 대부님.”

루크가 어딘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아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일부러 루크 앞에서 데이지 얘기를 많이 떠들었다. 그럴 때마다 루크는 슬퍼했는데 제 딴에는 나한테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게 더 애처로워서 즐거웠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아버님.”

데이지가 집무실에 들어와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데이지는 루크를 곁눈질로 보고 나서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 무뚝뚝한 눈길에 루크가 움찔거렸다.

이야아, 참으로 멋진 광경이로다.

최근에는 이 남매 덕택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 필요 이상으로 루크한테 차갑게 구는 데이지, 그런 여동생을 보면서 절망하지만 또 아무런 말도 못하는 루크. 정말이지 지켜보는 보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금단의 사랑을 키우면 더 멋질 텐데.

“무슨 일이냐, 사랑스러운 딸아.”

나는 데이지한테 실로 상쾌하게 미소를 웃어 보였다. 데이지의 표정이 일순 썩어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무덤덤한 얼굴로 돌아가서 내게 편지를 전달했다.

“……프랑크 남부에서 온 서신입니다.”

“흐음. 마살리아 공작인가.”

내가 봉인을 뜯어서 편지를 읽었다.

서신은 가지런한 필기체에 무척 정중한 어조로 쓰여 있었다. 첫 문장부터 ‘위대하신 제국의 기둥, 가장 강력한 제국의 궁중백이시자, 인간종과 마족의 유일하고도 굳건하신 가교, 커스토스 공작 전하께 삼가 아룁니다’라고 시작했다. 너무 심하게 아첨하는 나머지 잘못하면 내 항문이 다 헐어빠질 지경이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애를 먹는 모양이군.”

내가 미소를 지었다.

프랑크는 계획대로 혼란에 돌입했다.

법무상 베르시 백작이 국내의 모든 도시들에게 ‘자발적인 국가 구성’을 요구했다. 일종의 사회계약론에 기반을 둔 정책으로서, 도시들이 프랑크라는 국가에 소속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어디까지나 스스로 의지에 따라 결정했다.

이건 꽤나 의미가 깊었다.

“흐음.”

내가 편지를 접고 남매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솜씨를 시험해볼까.

보나마나 데이지가 압도적으로 우월하겠지만 약간의 여흥이었다.

“루크. 프랑크에서 베르시 법무상이 도시들에 자발적인 충성을 요구한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대부님.”

루크가 잔뜩 긴장한 것이 엿보였다.

“왜 이제 와서 베르시 법무상이 충성을 요구했다고 생각하느냐?”

“그게……프랑크에서는, 현재 세금을 내지 않는 도시가 많습니다. 그런 도시들을 질책하기 위해서 형식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루크가 띄엄띄엄 단어를 골라가며 대답했다.

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거의 어린애 수준의 답변이었다. 자경단의 부단장이라면 모를까 내 집사장은 정치에 안목이 있어야 했다. 이 정도 시험에도 통과하지 못하면 집사 실격이었다.

“데이지. 너의 생각은 어떠냐.”

“공화국의 탄생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절차입니다.”

데이지가 즉답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을까. 루크가 눈을 크게 떠서 데이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바로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호오. 어째서 그러한지 이유를 말해보거라.”

“먼저, 기존에 귀족들이나 도시들은 프랑크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세금이나 군대를 국가에 빌려줄 때는 '정부'에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프랑크의 '황제'에게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데이지가 한 차례도 막히지 않고 술술 말해나갔다.

“지금처럼 황제가 부재한 상황에서 정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이는 ‘프랑크에는 더 이상 황제가 필요하지 않다’라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즉, 공화국의 발족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짚었다, 데이지. 네 말대로 이건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구성하는 일이다.”

“…….”

내가 데이지를 칭찬하자 루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집사장이 된 이후, 루크는 여동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다. 데이지는 마왕성의 모든 잡무를 처리할 뿐만이 아니라 종종 영지의 업무에도 참여했다. 자경단에서 검술 연습이나 하던 루크와는 비교하기도 미안했다.

“대다수의 도시에서는 기꺼이 베르시 백작의 정책을 수용했다. 이미 프랑크는 세 명이나 연달아서 무능한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 자체에 질려버렸지.”

현실적으로 황제직을 수행할 만한 귀족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어찌나 꼼꼼하게 황가를 멸살했는지, 사생아는커녕 방계의 사생아조차 단 한 명도 남아나지 않았다. 황가와 핏줄이 이어진 대귀족 가문조차 깡그리 몰살당했다. 이래서야 황위를 주장할 가문 자체가 전무했다.

물론 모계까지 따져서 이리저리 족보를 추적하면 꽤나 여러 가문이 걸리긴 하는데……세력이 약해도 너무 약했다.

당연했다. 이들이 생존한 까닭은 앙리에타가 ‘설마 얘네까지 짓밟을 필요는 없겠지’ 하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곱 세대 전의 황제 첩실의 네 번째 아들의 사생아의 딸아이의 사위……같은 식이었다. 그게 뭔가.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막대한 권위를 가지는 사람은 황태후다.”

황태후는 유일하게 남은 황가의 일원이자 내전 내내 품위와 긍지를 지켰다. 황제가 학살을 명령했을 때, 황태후는 잠옷차림으로 궁전을 달려가서 제발 백성을 지켜달라고 울고불며 애원했다. 그런 황태후에게 신민은 경애를 품었다.

“그리고 황태후는 베르시 백작의 정책을 열렬하게 지지하고 있지. 법무상은 이길 확률이 높은 도박에 뛰어든 것이다. 뭐, 결국 남부 도시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만…….”

자아, 여기서부터 두 번째 시험이다.

특히 데이지. 모쪼록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너는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나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이 정도 시험조차 합격하지 못해서야 나를 죽이기란 불가능하다.

적어도 엘리자베트보다 뛰어난 정치적 안목을 보여줘야겠지. 그게 너 따위한테 가능하다면 말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프랑크 남부의 대귀족들은 베르시 법무상에게 반항하고 있다. 신생 정부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했지. 덕분에 독립이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다.”

문제는 자치권을 대가로 노예 해방의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마계에 붙잡혀 있던 노예들이 대거 풀려났다. 이들은 어떠한 조건도 없이 조국으로 귀향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프랑크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남부에선 이와 같은 혜택에서 제외되었다.

결과, 저번 전쟁에서 남부 대귀족들이 차지한 사르데냐의 영토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사르데냐인들은 전쟁에서 가족과 이웃이 대거 노예로 잡혀들었다. 당연히 가족과 이웃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소식에 환호했다. 그런 분위기에 남부 대귀족들이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가족을 돌려달라. 마을사람이 돌아오도록 해달라. 사르데냐인은 그런 구호를 외치면서 대귀족들에게 시위했다.

하지만 시위 도중, 사르데냐인의 대표자 중 세 명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사르데냐인들은 볼 것도 없이 프랑크 대귀족들이 저지른 짓거리라며 분개했다. 안 그래도 외국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사르데냐인들은 순식간에 반란을 일으켰다…….

정말 공교롭다는 말이지. 왜 하필 그런 시기에 사르데냐의 대표자가 세 명이나 암살되었을까.

그때 우연찮게도 제레미를 비롯해서 내 휘하의 암살단이 잠시 사라졌다마는――아마도 진실이 밝혀질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서신이다.”

내가 편지를 들어서 내보였다.

“남부 대귀족들은 자력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 프랑크 정부에 반항했는데, 이제 와서 뻔뻔하게 원조를 요청할 수도 없지. 결국 파르네세 공작령의 실질적인 주인인 나에게 군사원조를 부탁해왔다.”

내가 먼저 루크를 쳐다보았다.

“루크. 우리가 어떻게 하는 편이 좋겠느냐.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반란을 진압할까? 아니면 가만히 방관할까.”

“당연히 사르데냐인의 편을 들어줘야 합니다.”

이번에는 루크가 즉답했다.

“사르데냐인들은 지금 불합리하게 외국인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정당한 반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독립하여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아낌없이 원조해주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루크는 멍청했다. 답이 없었다.

“데이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고.”

“반란을 방관해야 합니다.”

“데이지……!”

루크가 깜짝 놀라서 데이지를 바라봤다. 그러나 데이지는 루크와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여기서 아버님께서 군대를 움직이시면 지나치게 경계를 사게 됩니다. 이미 아버님께서는 지난 전쟁에서 충분하고 넘치도록 전공을 쌓으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헌데 또 출전하신다면, 다른 왕후장상들이 아버님의 진의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방관하는 편이 좋다?”

“어차피 사르데냐인이 어찌되든 우리와 상관없습니다.”

루크는 데이지의 단정적인 대답에 충격을 먹은 눈치였다. 말도 안돼,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미소를 짓고 루크한테 축객령을 내렸다.

“내가 잠시 데이지와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구나. 루크, 자리를 비켜주겠느냐?”

“……예, 대부님.”

루크가 꾸벅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에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내가 싸늘하게 말했다.

“상의를 벗고 뒤를 돌아라.”

“…….”

데이지가 묵묵하게 옷을 벗고 나에게 등을 내보였다.

나는 집무실 서랍에서 채찍을 꺼내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말채찍이었다. 나는 주저없이 데이지의 등짝에 채찍을 휘둘렀다.

“읏……!”

데이지가 신음을 참으며 상체를 약간 구부렸다.

“우둔한 것. 그렇게 방관했다가 사르데냐인이 정말로 반란에 성공해버리면 어찌하느냐. 기껏 피를 흘려서 성공한 전쟁이 무용지물로 돌아가버리지 않느냐. 그게 네 머리에서 쥐어짜낸 해답이라니!”

차악, 하고 말채찍이 데이지의 살을 붉게 파냈다.

“우리가 군을 움직일 수 없다면 브르타뉴의 군대를 움직이면 된다! 브르타뉴군은 이제 와서 나빠질 인상도 없다. 고작 이런 것도 생각해내지 못하겠느냐.”

“하지만……국가적 원수인 브르타뉴군이 난리를 부리면, 이번에는 프랑크 남부의 백성들이 불만을…….”

“그러니 더더욱 브르타뉴군을 활용해야지!”

내가 가차없이 세 번째로 채찍을 가했다. 데이지는 이번엔 신음을 견뎌내지 못했다.

“사르데냐인은 사르데냐인 나름대로, 프랑크인은 프랑크인 나름대로 불만을 가지게 된다! 결국 남부 대귀족들은 권위를 잃게 된다. 반면에 베르시 법무상의 권위는 더욱 강해지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팔을 휘두른 다음, 채찍을 방바닥에 내던져서 버렸다. 데이지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말만 휘황찬란하지 실제 식견은 한참 모자르지 내 어찌 너에게 기대를 걸겠는고. 한심한 녀석. 썩 꺼지거라.”

“……예, 아버님.”

데이지가 떨리는 손길로 상의를 챙겨입었다. 그리고 나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나는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들어 불씨를 지피고 한 모금 빨아들었다.

저래서야 죽이기는 누굴 죽이겠는가. 데이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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