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1화 (411/510)
  • 00411 거미와 독사  =========================================================================

    “…….”

    체감상 사십 분쯤 흘렀을까. 데이지가 철문을 열고 나왔다.

    데이지는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얼굴이 썩었다. 당연했다. 과년한 남정네와 여인네가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두근두근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꼴에 아버님과 스승님이라는 작자……충분히 인생에 회의가 느껴질 만했다.

    “두 분께서 뭐하시는 겁니까?”

    데이지는 몸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피비린내에 로즈마리 향기가 살짝 풍겼는데, 수술 도중에 포션을 어지간히도 많이 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얼굴이었다.

    “하아아아…….”

    제레미와 내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데이지는 평소와 같이 무표정.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무표정이었다. 우리 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랑하는 오라비의 심장을 쨌는데도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다니…….”

    “이 선생님은 무척이나 실망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맛이 없을까.”

    “조금은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오늘 하루를 살아갈 기력을 얻지라도 않겠느냐. 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더니.”

    “이게 다 전하 때문이에요. 전하가 애를 워낙 굴리는 바람에 이제 내성이 붙은 거잖아요. 하여간 교육에는 영 자질이 없으셔.”

    우리가 대화를 이어나가면 이어나갈수록 데이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음식물 쓰레기를 바라보는 시선, 아니 음식물 쓰레기에 꼬여버린 구더기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안 되었구나, 데이지. 미안하지만 제레미든 나든 구더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러운 부류였다. 멘탈에 아무런 타격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너도 구더기 동료이지 않느냐.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

    “되었다. 내가 너처럼 멍청한 녀석에게 뭘 기대하겠는고.”

    내가 일어서서 데이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데이지는 의외로 순순히 내 손에 끌려왔다. 꼭 사람이 아니라 수수깡처럼 가벼웠다. 수술을 집도하느라 체력이 상당히 많이 떨어졌겠지.

    “흐음?”

    수술실 정중앙에 루크가 기절해 있었다. 루크는 아랫도리만 간신히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마치 수술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온몸이 깨끗했다. 내가 쿡쿡 웃었다.

    “자기 몸은 피투성이로 내버려둔 주제에 오라비는 끔찍하게 아끼는군.”

    “…….”

    “뭐, 좋다. 나를 따라서 말하거라.”

    첫 번째. 루크는 단탈리안에게 해를 입히지 못한다.

    두 번째. 루크는 단탈리안이 친애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를 입히지 못하며, 단탈리안과 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절대로 외면하지 않는다.

    세 번째. 루크는 단탈리안의 명령에 복종한다.

    네 번째.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단탈리안의 생명을 우선한다.

    내가 일찍이 데이지에게 내렸던 명령이었다.

    나는 여기에다 '데이지의 명령과 내 명령, 둘 중에서 내 명령을 더 우선할 것'을 추가했다. 데이지가 덤덤하게 내 말을 따라서 읊었다. 이제 루크는 데이지와 나의 공동노예가 되었다.

    ‘상태창.’

    내가 루크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 빌어먹을 효과음이 울리면서 푸른 빛깔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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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루크

    종족: 인간   주인: 데이지

    속성: 선(55)

    레벨: 21    명성: 1788

    직업: 모험자(C), 검사(A+)

    통솔: 43/100  무력: 107/140 지력: 27/125

    정치: 29/95   매력: 84/100  기술: 19/81

    호감도: 50

    *칭호: 1. 전설의 모험자 2. 전설의 용병 3. 던전 브레이커(-)

    *능력: 전술(C), 검술(A), 작전술(C), 설득(E), 기마술(A), 원소마법(-)

    *스킬: 의용병, 천리행(-), 필살무효(-)

    현재심리: [기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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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능력치였다.

    레벨이 고작 20대로 표시되고 있는데도 무력 능력치가 말도 안 되게 높았다. 칭호의 효과 덕분이었다. <전설의 모험자>와 <전설의 용병>, 두 칭호가 함께 발동하면 레벨이 하나 올라갈 때마다 무력은 자그마치 12씩이나 올랐다.

    비교적 <전설의 모험자> 칭호가 나중에 활성되어서 그나마 이 모양이지, 일찍 각성시켰다면 애저녁에 무력이 한계치인 140까지 찍혔을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드러나는 방식은――압도적인 재능.

    누군가가 검술을 시연하면 단 한 번만 보았을 뿐인데도 따라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보름이 지나면 완전히 터득해버리며, 한 달이 흐르면 마치 어릴 적부터 반복해온 동작인 것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응용한다.

    천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익히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지금까지 루크와 데이지를 가르쳐본 사람 전원이 남매를 가리켜서 희대의 재능이라고 극찬했다.

    예컨대, 루크는 무력 능력치가 높았지만 지력 능력치가 떨어졌다. 반면에 데이지는 지력 능력치가 월등하게 뛰어났다. 아직 열다섯 살인데도 불구하고 언어를 열한 개나 익혔으며, 기하학 서적과 철학 서적을 고대제국어로 읽어가며 마음껏 탐닉했다.

    ……좋겠지.

    녀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잔뜩 있었다. 하지만 되었다. 다만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괜히 데이지를 양녀로, 루크를 대자로 들인 것은 아니었다. 정작 본인들은 그 이유를 영원히 모르겠지만.

    “데이지. 너에게도 명령한다. 너는 나 혹은 내가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결코 루크에게 명할 수가 없다. 오로지 내 허락이 확실하게 있는 경우에만 특별히 가능하다.”

    “알겠습니다.”

    데이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되었습니다.”

    “음? 뭐가 되었다는 것이냐.”

    “아버님과 제가 처음으로 맺은 약속.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문득, 내 뇌리에 해답이 스쳐 지나갔다.

    “……너.”

    “루크가 아버님에게 진정한 복종을 맹세하게 된다면, 아버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루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요. 루크는 아버님에게 종속되었습니다. 이제 내기는 끝났습니다.”

    아.

    아아?

    내 얼굴이 와장창 일그러졌다.

    내가 데이지에게 내걸었던 내기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루크가 몸과 영혼을 전부 바치는 마법적 노예계약으로 맺어질 경우, 나는 데이지의 승리를 인정한다. 그리고 데이지의 말대로 지금 루크는 노예계약을 맺었다.

    데이지의 승리였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설령 데이지가 내기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나한테 불이익이 돌아올 일은 전혀 없었다. 당연히 나도 이걸 감안하고 노예계약을 시전한 것이었다.

    문제는 데이지의 목적이었다.

    “네 년……설마 루크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나는 여태까지 데이지가 그저 루크를 후보자 명단에서 지우기 위해서 노예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굳이 데이지는 지금 내기에서 자신이 승리했음을 강조했다.

    즉, 거짓말.

    나의 후보자 목록에서 루크를 삭제하라고 겁박한 것은 거짓. 당신을 죽일 사람은 오직 자기 하나뿐이라고 휘황찬란하게 꾸며댄 말도 거짓.

    오로지 목적은, 자신의 소중한 오라비를 내 마수에서 지켜내는 것.

    데이지가 말했다.

    “아버님께서 루크를 후보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철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크는 아버님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입니다. 만일 아버님께서 계획대로 루크를 육성하셨다면, 십중팔구 루크는 아버님 손에 죽었겠지요.”

    “…….”

    “위험을 원천봉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조금씩 내 몸에 분노가 차올랐다.

    내가 당장이라도 데이지를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나를 죽이겠노라고 맹세한 것이 전부 거짓이었더냐.”

    “아니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것 또한 진심입니다. 하지만…….”

    데이지가 입꼬리를 들었다.

    “제가 아버님을 위해서 그런 걸 맹세할 이유는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데이지의 뺨을 후려갈겼다.

    데이지가 힘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녀석은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진 채로 데이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데이지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제가 아버님보다 루크를 우선해서 분노하셨는지요. 우스운 일입니다. 만인의 사랑을 독차지하시는 분이 아버님입니다. 기껏해야 저 하나의 마음을 독차지하지 못했다고 해서 화내시다니 꼴불견…….”

    나는 녀석이 말을 끝마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복부에 힘껏 발차기를 날렸다. 그제야 데이지가 약간의 신음을 내뱉었다. 나는 성이 풀리지 않아서 몇 번이고 녀석을 짓밟았다.

    한참 뒤에야 내가 숨을 가다듬었다. 분노로 달아오른 숨이 폐를 지나 목구멍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나를 데이지가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대여섯 번 흘렸을 뿐이지, 딱히 괴로운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승리감.

    데이지의 눈동자에는 승부에서 이겼다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걸 읽을 수 있었다. 데이지가 헛기침을 토해내고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 저를 완전하게 취하고 싶으십니까?”

    “…….”

    “제가 오직 아버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신다면, 아버님 또한 저만을 바라보십시오. 저는 순전히 아버님만을 눈동자에 담는데 정작 아버님께선 이곳저곳으로 눈을 돌린다……도무지 공평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데이지가 웃었다. 내장이 상했는지 웃는 도중에 핏기가 섞인 기침을 했다.

    “아무도 아버님께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마왕 파이몬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감히 뚫린 입이라고……!”

    나는 데이지의 복부에 발끝을 꽂아넣었다. 그런데도 데이지의 입가에서는 웃음기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더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마왕 파이몬이 오직 아버님만을 우선하는 인형이 되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지요. 아버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마왕 파이몬만을 우선하게 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결국 아버님께서는……흐윽!”

    나는 데이지의 가슴을 아예 신발 바닥으로 마구 짓이겼다. 이번에는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데이지도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삼십 초쯤 흐르자 통증에 익숙해졌는지 데이지가 중얼거렸다.

    “결국, 아버님께서는……상대방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않아…….”

    “…….”

    “그런데도 저에게는, 오직 아버님만을 바라보고, 아버님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길 원하다니……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것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착한 아이로 보였습니까……?”

    데이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저를 온전하게 취하시고 싶다면, 먼저 저만을 바라봐주시길. 그게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엘리자베트 통령도 바라보고, 마왕 바르바토스도 바라보고 계시면서 이제는 제 시선까지 독차지하려 하다니……언어도단입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애송이 주제에.”

    내가 이빨을 바득 갈았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이었다. 이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점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송곳니를 날카롭게 갈고 있었다. 녀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한테 인생을 바치라고.

    그래야 자신도 인생을 바쳐줄 수 있다면서.

    “어디 해볼 테면 해보거라. 하지만 명심해라. 너까짓 것에게 내 모든 걸 갖다바칠 정도로 나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너에게 아무리 가치가 있다고 해도 사십만의 생명에 비기지는 못해!”

    “그럼 아버님께서는 저를 독차지하지도 못하실 것입니다.”

    나는 데이지에게 마지막으로 발차기를 날려준 다음, 성큼성큼 수술실을 나갔다.

    등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데이지의 웃음소리가 끝까지 귀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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