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10화 (410/510)
  • 00410 거미와 독사  =========================================================================

    소년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상대방에게 생명을……?”

    “그래, 루크.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이 타인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희생이지.”

    데이지가 제 오라비를 휘감아서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뜯었다면, 나는 루크가 천천히 거미줄에 걸려들기를 유도했다. 어디까지나 거미줄에 날아든 것은 루크 본인이었다. 내가 전면에 드러나서 해치지 않았다.

    “제레미에게 배웠으니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세상에는 노예각인이란 것이 있어.”

    제레미, 라는 이름을 듣자 루크가 움찔거렸다. 얼굴 표정에 잠깐이지만 혼란과 분노, 후회가 뒤섞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뿐이었다.

    루크는 자기 감정을 통제할 정도로 원숙하지 못했지만, 그 감정을 계속해서 방치해둘 정도로 미숙하지도 않았다. 원숙함과 미숙함 정중앙에 놓여 진자운동을 반복했다. 아마도 루크가 그리는 반원의 곡선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하겠지.

    즉, 루크는 소년이었다.

    “노예각인이 새겨지면 상대방에게 거의 완벽하게 종속된다. 주인이 명령하기 전에는 자살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

    삶에서 결단을 내릴 수는 있어도 미처 결단의 파장까지는 모르는 소년.

    “그뿐만이 아니다. 주인이 누군가를 죽이라고 하면 노예는 그대로 실행하는 수밖에 없다. 설령 노예가 사람을 살해하고 싶지 않을지라도, 생명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길지라도, 주인이 명령한다면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전부 뒷전으로 몰아둔 채 실행해야만 한다.”

    타인을 배신하는 것은 익숙해도 타인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서투른 소년.

    “상상해보렴, 루크. 인간이 그런 상태를 견딜 수가 있을까?”

    “……아니요.”

    “맞아. 보통 견디지 못해. 어쩌면 1년은 버틸지 모르지. 5년이 넘도록 무너지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10년, 20년, 그렇게 일생을 산다고 해보자…….”

    내가 양손을 벌려서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럼 자기 자신이란 것이 삭아서 사라진단다. 어느 시점에선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되어버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생명은 애당초 가벼운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믿어왔던 것과 생각했던 것이 바뀌고, 뒤틀리고,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되고, 결국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

    “진정한 의미에서 죽어버리는 거다. 자신을 죽여버리는 행위야. 목숨만이 아니라 너 자신을 구성하던 모든 것을 희생시킨다…….”

    나는 속삭였다. 거미가 사냥감을 실로 말아서 천천히 죽이듯이.

    “루크. 너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 상대방을 위해서 살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을 위해서 너의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겠느냐.”

    “…….”

    루크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시간이 흐른 다음, 루크가 얼굴을 들었다. 그곳에는 결연한 결심이 시리게 서려 있었다. 나는 루크가 침묵할 때 이미 이 아이가 어떻게 대답할지 예상하고 있었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

    “대부, 저는 그렇게 하겠어요.”

    걸렸다.

    이제부터 되돌이킬 수 없다, 루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마. 너는 아직 열여섯 살이야.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앞으로 살아갈 삶이 훨씬 많다. 그런데도, 너는 지금 저지른 죄 때문에 남은 인생 전부를 희생시켜도 괜찮겠느냐.”

    “네.”

    루크의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좋다. 나는 너의 결정을 존중한다.”

    데이지는 나의 노예였다. 루크가 데이지의 노예가 된다면, 징검다리를 하나 건너뛰어서 내 노예로 종속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용사가 되었을 남매 두 명 모두가 손아귀에 들어왔다.

    “노예각인을 심장에 새기는 수술은 무척 고통스럽다. 우리 영지에서 노예각인 수술을 맡길 만큼 실력이 좋은 사람은 두 명이지. 네가 마음에 든 사람에게 시술을 받거라.”

    “누구죠?”

    “제레미와 데이지다. 다행히도 모두 너에게 믿음직스러운 사람이구나.”

    루크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하필이면 각인을 새겨줄 사람이 제레미와 데이지밖에 없다니! 루크는 자신이 죄를 저지르도록 반쯤 유도한 장본인에게 수술을 맡기거나, 아니면 자신이 죄를 저지른 피해자에게 수술을 맡기거나, 양자택일해야만 했다. 이만한 아이러니가 따로 없었다.

    “저기, 대부. 혹시 다른 사람은 없나요?”

    “음? 일단 우리 영지에는 없구나.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수술이라서 말이지. 솜씨가 어설픈 사람한테 맡겨버렸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나는 노예각인 수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살갗을 파내서 심장에 직접 각인을 새긴다는 얘기에는 루크도 약간이지만 질색했다. 다른 곳에 각인을 새기면 쉽게 파기될 수 있으니 심장에 새기는 것이 관례라고 말하자, 루크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걱정하지 마라. 제레미도 데이지도 최고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두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성공할 거다. 솔직히 다른 곳에서 시술자를 찾아봐도 두 사람보다 뛰어날 것 같지가 않구나.”

    자아, 루크.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 테냐.

    가해자인 제레미냐. 피해자인 데이지냐.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너의 성향이 적나라하게 밝혀진다.

    이건 너의 인생을 결정지을 대사건이다.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자신의 심장을 드러낼지 선택해야 한다. 제레미에 대한 분노가 더 거대하다면 제레미를 선택할 터. 데이지에 대한 죄책감이 더 거대하다면 데이지를 선택하리라.

    제레미에 대한 복수심을 심장에 새겨넣을 것인가, 아니면 데이지에 대한 죄의식을 심장에 각인시킬 것인가……어느 쪽이라도 나는 즐거웠다. 너가 수술받는 광경을 기쁘게 지켜보겠다.

    아아――그래도 데이지를 선택하면 더 좋을 텐데.

    나는 개인적으로 데이지를 고르는 편을 선호했다. 제레미야 최종적으로 제3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데이지는 달랐다. 남매였다. 가족이었다. 여동생이 친오빠를 영원토록 노예로 만들어버리게 된다. 이쪽이 조금 더 역설적이어서 좋았다.

    게다가 데이지의 입장.

    데이지는 이미 나에 의해서 노예각인 수술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데이지는 결정적으로 나에게 증오심을 품었다. 복수를 맹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당한 짓거리를 이번에는 스스로 오빠한테 저지르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수술하고 난 다음에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볼까.

    자신이 증오하던 인간과 똑같은 행위를 범해버렸을 때, 그리하여 나와 똑같은 수준의 인간이 되어버렸을 때, 데이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안 되겠다. 참을 수가 없군. 잘못하다가 데이지한테 다시 한번 키스해버릴지도 모른다.

    루크, 데이지다. 데이지가 올바른 선택지이다. 너의 죄의식에 복수심 따위가 섞여들게 방치하지 마라. 아무리 원인을 제레미가 제공했다고 해도, 결국 이후에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른 장본인은 바로 너다. 설마 제레미한테 책임을 돌리지 않겠지.

    강해져라! 단호해져라! 무지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지옥을 더 순수하게 만들어라. 인간의 강함은 무엇에 얼마나 책임을 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명색에 용사가 되었을지 모를 남자가 자기 자신에게 변명의 출구를 허락하지 마라.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저는…….”

    루크가 입을 열었다.

    “저는, 데이지한테 맡기고 싶어요.”

    “알겠다. 데이지에게 내가 말을 전달해두마.”

    잘했다! 바로 그거다, 루크!

    나는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설령 대자(代子)일지라도 너는 어엿하게 나의 아들을 자칭할 자격이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너를 동족으로 인정하겠다.

    도대체 근친상간이, 실제로는 저지르지도 않은 근친상간이, 얼마나 큰 죄악이라는 말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아무런 죄악도 잘못도 아니다. 그런데도 루크, 너는 저울추에 가장 거대한 무게를 올려놓았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저울추에 올려진 무게는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루크의 무게였다. 루크가 스스로 판단하여, 아무것도 아닌 일에,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았다. 지금 이 순간 루크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었고 스스로 형벌이 되었다…….

    “누구의 노예가 되는 것인지는 묻지 않으마.”

    “고마워요, 대부…….”

    “무얼.”

    내가 루크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참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악질적인 걸로 따져서 네가 저지른 죄악에 비교해서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대부는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희생한 거잖아요. 저 같은 것과는 전혀 달라요.”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단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가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기로 결심해서 기쁘구나. 힘들 때도 있을 거다. 괴로울 때도 있을 거다. 너에게는 다른 인간들처럼 휴식할 권리가 없어진다. 하지만 그건 너가 비천한 노예이기 때문이 아니야.”

    나는 부드럽게 루크를 양팔로 안았다.

    “단지 너에게는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나도 명백할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목표란 것이 저 멀리 위치해 있다면 너에게 목표란 길 그 자체, 너가 내딛는 발걸음 자체다. 다른 사람이 휴식을 취하는 것은 보다 멀리 나아가기 위함이지만, 너가 휴식을 취하면 그 순간 목표를 포기해버리는 것이 된다.”

    꾸욱, 하고 루크의 머리를 내 가슴에 품었다.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할 이유도 무엇도 없다. 조급하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 내 말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네, 대부…….”

    루크가 내 상의에 얼굴을 박고 울었다.

    나는 루크의 뒷머리를 천천히 빗질하면서 히죽 웃었다.

    *  *  *

    수술은 바로 이틀 뒤에 이루어졌다.

    내 마왕성 지하 9층에는 죄수들의 감옥 및 고문실이 위치했다. 그곳에서 루크는 노예각인이 새겨졌다. 처음에는 제레미가 도와주겠다고 나서려 했지만,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간단하게 포기했다.

    “어머나. 언제 들킬까 조마조마했는데 드디어 루크가 알았군요.”

    “앞으로 밤길 조심하거라. 루크가 언제 너에게 복수할지 모르니.”

    “꼬맹이한테 밤에 당할 정도로 소인은 약하지 않답니다.”

    제레미가 쿡쿡 웃었다.

    “아아, 하지만 아깝네요. 데이지가 루크를 수술하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꼭 보고 싶은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 두 사람은 현재 수술실 출입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벽에 나란히 기대어서 쭈구려 앉았는데, 폼이 영 별로였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면 상당히 불쌍한 노숙자처럼 보일 것이었다.

    우리가 수술실에 직접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데이지 때문이었다. 이 맹랑한 꼬맹이가 절대로 우리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침입하면 루크의 수술을 포기해버릴 거라고 선언한 탓에, 우리는 꼼짝없이 부외자가 되어버렸다.

    “정말 은혜도 모르는 꼬맹이에요. 제가 그 애한테 가르쳐준 게 얼마나 되는데, 겨우 수술하는 모습 하나 안 보여주고……어휴. 이래서 제자 키워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니까요.”

    “후후.”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네모난 물체를 꺼내었다.

    제레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전하, 설마?”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나는 단탈리안. 사상 최악의 극악무도한 마왕이다.”

    훗, 하고 웃음을 흘려보냈다.

    “이럴 줄 알고 어제 미리 메모리아 마법을 수술실에 설치해두었지.”

    “꺄아아악! 전하 멋져요! 사랑해요!”

    제레미가 호들갑을 떨며 내 뺨에 입맞춤 세례를 퍼부었다.

    “그것도 하나만 설치한 게 아니다. 사방에서 세밀하게 지켜볼 수 있도록, 자그마치 전 각도로 서른여섯 개나 설치했다……! 이걸 마련하는 데 든 금화만 헤아려도 자그마치 수천 장!”

    “역시 단탈리안 전하입니다.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알고 계시다니까요!”

    “후후후. 데이지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예. 분명히, 틀림없이, 감미롭고도 각별한 표정을 보여주겠지요!”

    우리는 서로 꺅꺅거리면서 난리를 피웠다.

    그 나물에 그 밥, 이라는 문장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이것이 내 마왕성의 평범한 일상인 것을 어쩌겠는가.

    애당초 데이지가 지금 사용하고 있을 수술도구 자체가 내 돈주머니에서 나왔다. 데이지에게는 내 물건을 사용하는 이용료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디 데이지가 멋진 장면을 연출해주기를, 나는 진심으로 간절히 바랐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