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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409화 (409/510)

00409 거미와 독사  =========================================================================

데이지가 이제 절반이 남은 엽궐련을 내 몸에 갖다댔다.

앞가슴. 정확히 나의 심장이 위치한 흉부에다가 데이지는 연초 끄트머리를 비볐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천천히 다섯 번 연초를 돌렸다. 그렇게 불씨가 꺼지는 동안, 나는 가슴에서 온기를 느꼈다.

“바로 여기에 칼날을 쑤셔 넣겠습니다.”

데이지가 말했다.

“최대한 고통스러운 살인 방식을 택하고 싶습니다만, 아버님께서는 마왕입니다. 어중간하게 찔러서야 재생력으로 회복하시겠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일격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확실히 나같이 허약해빠진 마왕은 심장이 없어지면 회복할 도리가 없지.”

회복마법이나 포션도 만능에서 거리가 멀었다. 심장을 파괴할 정도의 일격은 역시 무마시키기 어려웠다. 글쎄, 바르바토스 같은 괴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바알한테 심장이 터졌는데도 바르바토스는 멀쩡하게 회복했다. 조무래기가 따라해도 될 묘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감이 지나치구나, 내 딸아. 너는 노예각인이 새겨진 일개 암살자에 불과하다. 바알을 참살하고 아가레스를 잡았다고 하여 자만하는 것 아니더냐.”

내가 미소 지었다.

“바르바토스는 마왕군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지녔다. 엘리자베트는 일국의 군주이다. 너 같은 쓰레기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지. 헌데 네 년이 무슨 도리로 그들을 제치고 나의 목을 딸 수 있을까.”

“서열 제71위의 마왕이 바알을 잡는 것 또한 터무니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버님께서 이미 해내신 일입니다. 제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방진 것.”

내 입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데이지가 확신에 찬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건방진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싶었다. 내 아래에 깔아뭉개서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욕망에 휩쓸려서 세상에서 제일 달콤해질 포도주를 서둘러 개봉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네가 계획을 줄줄이 밝혔으니 나 또한 계획을 말해주마. 무얼, 사양하지 말거라. 딸아이가 모처럼 자신만만하게 장래희망을 발표한 것이다. 아비로서 뿌듯하기 그지없구나.”

엘리자베트도 데이지도 한 가지 착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나는 최고의 죽음을 원했다. 그러나 선후관계가 잘못되었다. 죽고 싶어서 최고의 죽음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웬만하면 죽어줄 수 없으니까, 만약 죽어야만 한다면, 오로지 '최고'의 죽음만을 납득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으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쉬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희생함으로써 십만 명의 인간을, 자기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기꺼이 죽고자 하리라.

그것이 좋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의 죽음을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나는 최고의 죽음이 선사되지 않는다면 얌전히 죽어줄 생각이 일절 없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최고의 죽음이란 상당히 휘황찬란하다.

“네가 나를 죽이는 데 실패한 바로 그 순간, 나는 너를 깔아뭉개서 범할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서 루크와 친부모가 불에 타서 죽는 광경을 보여주지.”

“…….”

“아니, 내가 직접 범하는 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구나. 이건 어떠냐. 루크를 죽인 다음에 바르바토스에게 부탁하여 시체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시체 인형에게 명령해서 너를 범하도록 한다.”

내가 데이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애정을 듬뿍 섞어서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루크도 안 되었지. 그토록 오매불망 찾아해매던 일생의 연인이 여동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극적이건만, 죽은 다음에야 동생과 이어지게 되다니 말이다……흐음. 시체 인형도 정자를 생산할 수 있던가. 그건 바르바토스에게 물어봐야 알겠군.”

용사와 용사가 낳은 자식이다. 틀림없이 최상의 자질을 보여줄 것이다. 무척이나 기대된다.

“흐. 양아들과 양녀가 나의 손자를 낳아주리라 상상하니 벌써부터 흥분되는구나.”

“……아버님이나 떠올릴 법한 쓰레기 같은 미래도입니다.”

“저런. 겨우 이 정도로 매도해서야 내가 섭섭하다.”

아직 예고편에 불과하다. 정말로 재미있는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한다.

“다음으로 나는 마르바스의 양자로 들어간다. 마르바스는 형식상 제국의 황족이다. 나 역시 황족에 포함되는 게지. 그리하여 제국의 계승권을 받게 되면, 데이지, 너도 졸지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녀가 되는 것이다!”

“…….”

“세계 전체를 통틀어도 나만한 아비가 없음이라. 화전민촌에서 백정만도 못한 계급을 타고 태어난 딸아이에게 제일 고귀한 계급을 부여해주니 어찌 천하의 부친들이 본받을 만한 모범상이 아니겠느냐.”

내 손길이 데이지의 턱선을 타고 내려가서 목으로 흘렀다. 갓 내린 눈처럼 새하얀 살결이 적당히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합스부르크의 제1황녀, 데이지 폰 커스토스. 영원불멸하는 제국에 아름다운 영광이 되소서.”

내가 키득거렸다.

“지금 황제가 죽으면 나에게 황위가 돌아온다. 하지만 나는 황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속셈이다. 당연하지 않은고. 마왕이 황제에 등극해버리면 곧바로 다른 국가들이 격렬하게 반발할 터. 그러니 아깝지만 다른 사람에게 황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지. 내가 누구한테 양보할 지 이제 감이 오느냐.”

내가 데이지의 턱을 잡아 슬쩍 치켜들었다.

“바로 너다, 데이지.”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녀석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너를 흡혈귀로 만들어서 반영구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마. 황제가 되어서 이백 년, 삼백 년이 넘도록 홀로 제국을 다스리거라. 이 아비가 만든 제국을. 물론 너는 누구보다 제국을 부서트리고 싶겠지. 그러니 너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 될 것이야…….”

내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에 희미한 감촉이 느껴졌다.

“…….”

“…….”

마치 조용히 문을 노크하는 것처럼 가벼운 키스. 데이지의 입술은 물기가 없었지만 한없이 부드러웠다. 내가 키스를 하는 동안 데이지는 눈을 깜빡거리지 않았다. 다만 뚜렷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그러니, 사랑스러운 딸아. 부디 실패하지 않도록 주의하려무나. 너의 아비는 가혹하고 잔인하여, 실패한 자에게 관용을 베풀어주는 위인이 아니다.”

나는 데이지의 오른 손목을 쥐어잡았다. 그리고 내 심장으로 데이지의 손바닥을 가져갔다.

“확실한 순간에. 확실한 상황에. 확실한 일격으로,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번에 뚫어야 할 것이야.”

“명심하도록 하지요……아버님.”

데이지는 시선에 한점의 미혹조차 없었다. 좋았다. 나는 크게 웃으면서 데이지를 밀었다. 데이지가 균형을 잃고 침대에 넘어졌다.

나는 데이지를 내버려두고 그대로 침실에서 나왔다.

우울한 감정이 싹 사라졌다. 엘리자베트도, 데이지도, 최근 들어서 나를 즐겁게 해주기로 아예 작정한 모양이었다. 내 걸음걸이는 저절로 춤이 되어서 아무도 없는 마왕성 복도를 가뿐하게 밟으며 나아갔다.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내 마왕성도 지하 7층까지 완공되었다. 지하 8층도 거의 완성되었다. 지하 10층은 이미 나와 간부들 전용의 거주공간으로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이제 지하 9층만 마무리지으면 애시당초 목표했던 마왕성의 위용이 달성되었다.

지하 10층짜리의 거대한 마왕성이다. 웬만한 군대를 이끌고 와도 쉽게 함락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내 마왕성을 점령하려면 우선 바깥에 있는 영지부터 휩쓸어야 했다. 마탑들이 줄지어 있는 내 도시를 함락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언젠가, 데이지에게 제국을 맡겨버린 다음에는 이곳에 틀어박혀서 영원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죽인 자들을 끝없이 기억하면서. 괜찮았다.

사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죽음마저 사치이지 않겠는가.

*  *  *

“대부. 혹시……약간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다음날, 내 집무실에 루크가 찾아왔다.

나는 라피스와 함께 제법 밀린 서류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제국의 국정을 처리하느라 급급했기에 영지는 딴전으로 밀어두었다. 다행히 파르시가 나를 대신해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두었지만, 진짜 영주만이 처리할 수 있는 사안도 있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말해보렴.”

나는 루크가 찾아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여유로웠다. 당연했다. 지금 루크는 16년 인생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자기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도저히 역부적인 위기를.

그럴 때 어린아이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상담하겠는가. 친부모? 아마 루크가 지금 제일 피하고 싶고 마주치기 싫은 인간이 친부모이리라.

나밖에 없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대부인 나뿐이다.

“그런데……저기…….”

루크가 라피스를 조심스럽게 힐끔거렸다. 루크는 무척이나 어두운 안색이었다. 라피스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루크에게 말했다.

“제가 잠깐 자리를 비켜주는 편이 좋습니까?”

“아, 네……감사합니다, 상서님.”

“별말씀을.”

라피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라피스는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자아, 이리 가까이 와서 앉거라.”

나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면서 루크한테 자리를 권했다. 루크가 머뭇거리면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우리 루크가 나에게 보통 상담이란 걸 한 적이 없는데, 이제야 대부에게 조금 의지해주는 것 같아서 솔직히 기쁘구나.”

“대부…….”

루크는 감격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숨길 수 없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루크가 먼저 밝히기 전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였다.

루크는 몇 번이고 입술을 뻥긋거렸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내가 인내심을 갖고 너그럽게 기다려주었다. 오 분쯤이 지나자 마침내 루크가 말을 뱉었다.

“제가……제가 너무 큰 죄를 범했어요…….”

“……아무래도 정말로 심각한 일인 모양이구나.”

내가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나는 더없이 진지하게 루크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어조와 목소리가 나에게 대단히 심각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었다, 하고 포즈를 취했다. 이걸 위해서 조금 전까지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밝히지 않아도 괜찮단다. 그저 추상적인 얘기만 해도 좋아. 다만 진실을 말해주렴. 진실을 말해준다면, 어쩌면 루크 너에게 필요한 대답을 내가 들려줄지도 모른다.”

“네, 대부……고마워요…….”

루크가 물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너무 큰 죄예요. 제가 어떻게 해도 지울 수가 없을 정도로……상대방은 저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어요……하지만, 제가 자살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대요.”

루크는 이미 눈가가 퀭퀭했고 눈동자엔 붉은 실핏줄이 퍼졌다. 아마 어제부터 밤새도록 울었겠지. 이 순수한 소년이 지난 밤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지옥을 맛보았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저,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용서를 받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죽음으로 사죄하지도 못한다면……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대부, 이럴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

내가 신중하게 루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곧바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것처럼, 한없이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장해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루크의 양손을 잡은 채로 오 분 정도 침묵했다.

“그럴 때는, 오직 한 가지의 방법밖에 없단다.”

“한 가지……?”

어젯밤, 데이지는 '루크를 후보자 명단에서 지워달라' 하고 요구했다.

그 이유가 여기 있었다.

“너의 생명도, 인권도, 신념도, 모두 포기해서 상대방에게 바치는 수밖에 없어.”

루크는 이제부터 내 노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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