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08화 (408/510)
  • 00408 거미와 독사  =========================================================================

    “시작은 제레미 스승의 사소한 장난이었을지 몰라.”

    데이지가 말했다.

    “거기서 끝났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덮고 넘어갔을 거야.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전부 오빠가 저질렀어.”

    “정말로……몰랐어…….”

    “그거 다행이네.”

    상대방이 도망칠 수 없도록 데이지가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혔다.

    “오빠는 전혀 모르고 있어서. 나만 알고, 나만 당하고, 나만 상처 입어서 다행이야. 오빠가 그렇게 영원히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 테니까.”

    침묵이 감돌았다.

    루크라는 소년이 정신적으로 쌓아올린 건축물이 붕괴하는 데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소년이 믿어왔던 것,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 천천히 마음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덧없이 시간이 흘렀다.

    “……내가.”

    루크가 중얼거렸다. 폐허와 같은 목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더 이상 좋아질 것도 없어.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지. 단지 죄가 지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을 뿐이야.”

    데이지가 여유롭게 말했다. 이미 사냥감의 목덜미에 치명적인 독니를 찔러넣었다고 확신하는 뱀처럼, 어느 부위부터 물어뜯을까 즐겁지만 신중하게 고민하는 기색으로, 서서히 루크를 옥죄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오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

    “부디 영원히 속죄하도록 해, 오빠.”

    직후, 데이지와 루크 사이의 거리가 무척 가까워졌다가 곧바로 떨어졌다. 나는 데이지가 루크한테 입맞춤을 했다고 확신했다. 증거는 없었다. 다만 만약 내가 데이지의 입장에 서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오늘밤의 대화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끔 기억에 각인시키기 위해서.

    “나가.”

    데이지가 축객령을 내렸다. 루크가 유령같이 맥없이 침실을 나갔다.

    “…….”

    루크가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좀처럼 침대 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나가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데이지 역시 말 한 마디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데이지였다.

    “이제 도망칠 수 없어요, 아버님.”

    “……무슨 소리냐.”

    “아버님과 제가 맨 처음에 무슨 내기를 했는지 기억하시겠지요. ”

    당연히 기억했다.

    루크가 나에게 자발적으로 진심 어린 충성을 맹세하는 것. 그 경우, 나는 어떠한 일이 생겨도 루크와 데이지를, 그리고 두 아이의 친부모와 마을사람을 죽이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반면에 루크가 내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이상, 나는 언제 어디서든 그들을 죽여도 괜찮았다. 말하자면 그들은 시한부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프랑크의 화전민 마을에서 나와 데이지가 건 내기였다.

    “저는 왜 아버님이 루크를 전쟁터로 데려가지 않는지 쭉 의문이었습니다. 루크는 저만큼 쓸모가 있습니다. 아니, 암살자로 키워진 저보다 처음부터 전사로 키워진 루크가 백병전에서는 더 활약하겠지요. 그런데도 아버님은 루크를 영지에 내버려두기만 했습니다.”

    “…….”

    “아버님은 의도적으로 루크를 쓰지 않았어요. 거의 만나지도 않았지요. 저는 아버님이 '루크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낼 생각이 거의 없다'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루크를 방치하다시피 내버려두었다.

    “의문은 더 깊어졌지요. 루크만큼 써먹기 좋은 패를 썩히다니, 아버님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습니다.”

    내가 침대에서 기어나갔다. 이 대화는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나누어야만 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3시간 가까이 꼼짝하지 않고 있느라 굳어버린 몸을 풀었다.

    데이지는 침대에 걸터앉아 연초를 피고 있었다. 향기를 맡아보건대 상당히 강력한 물건이었다. 스승인 제레미, 주인인 나, 두 사람 모두 뼛속까지 썩은 골초였는지라 데이지가 연초에 손에 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데이지는 내 앞에서는 일절 연초를 피지 않았다.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것이 이유이겠지. 지금도 내가 침대에서 기어나오자, 데이지는 엽궐련을 방바닥에 찍어서 끄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허락하마.”

    나는 방구석에서 의자를 가져다가 데이지 바로 맞은편에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앉았다. 데이지가 우물처럼 검은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답에 대한 단서는 세 가지였습니다. 베르시 백작, 마왕 파이몬, 엘리자베트 통령.”

    “호오.”

    “먼저 베르시 백작입니다. 꼭두각시 전쟁에서 아버님께서는 대대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셨지요. 그때 베르시 백작이 분기충천하여 아버님께 따지러 들이닥쳤습니다. 저는 거기서 무척이나 이상한 점을 느꼈습니다.”

    나는 품안에서 담뱃잎을 꺼내어서 천천히 말았다. 연초를 끊은 지 제법 오래되었지만 어차피 마약이란 끊는 것이 아니라 잠시 중단하는 것에 불과했다.

    “바로 아버님께서 곧바로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심하게 기계적으로 담뱃잎을 말고 있는 동안, 데이지가 덤덤하게 말했다.

    “왜? 어째서?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님께는 범행을 자백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른 마왕이 계획한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속이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시원할 정도로 가볍게 범행을 인정했습니다.”

    데이지가 조용히 연기를 허공에 흘렸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버님께선 베르시 백작을 '시험'하고 있었다고.”

    “…….”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어째서인지 베르시 백작의 무언가를 가늠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습니다. 일부러 진실을 말해주고, 그 다음 백작이 어떻게 나오는지 기다리고 있었지요.”

    데이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두 번째 단서는 마왕 파이몬이었습니다. 작년 겨울이었지요. 마왕 파이몬이 공화주의 대표회의를 개최하자, 아버님께서는 그걸 무마시키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셨습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각 파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변명하셨습니다만…….”

    데이지의 연초 끄트머리가 벌겋게 빛났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아버님께서는 제국을 지키고 싶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신 것이 아닙니다. 마왕 파이몬을 지키기 위해서였지요. 아버님께는 마왕 파이몬이 너무나도 소중했던 것입니다. 도저히 잃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

    “그런데 왜 그처럼 소중한 연인을 죽였을까요. 단순히 제국이 붕괴될까봐 두려워서? 파벌의 다툼이 심해질 것 같아서? 아닙니다. 그런 건 전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데이지가 나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버님. 파이몬이 더 이상 당신을 죽이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작년 겨울에 아버님께서 그 여자를 지키려고 그토록 노력하신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버님께 있어서 파이몬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후보자' 중에서 유력한 인물이었으므로.”

    데이지의 입가에서 비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그때 공화주의 대표회의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십중팔구 마왕 파이몬은 평원파와 중립파에 의해서 짓밟혔겠지요. 아버님께서는 자신을 죽여줄지도 모를 후보자가 그토록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자해하면서까지 마왕 파이몬을 지켰습니다…….”

    엽궐련을 말던 내 손이 멈추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각이 마치 촉감처럼 느껴졌다. 데이지의 시선은 내 시선을, 내 시선은 데이지의 시선을 붙잡았으며, 늘어졌고, 끌어당겼다.

    “그제야 저는 베르시 백작에게 왜 아버님이 진실 따위를 고백했는지도 알아챘습니다. 베르시 백작도 아버님께서 세상 모르게 뽑아놓은 '후보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백작이 아버님을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시험해본 것이지요.”

    “…….”

    “틀림없이, 아버님께서는 마왕 파이몬에게도 자신을 죽일 기회를 선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파이몬은 그 기회를 걷어찼습니다……아버님을 죽이는 대신에 오히려 아버님께 종속되는 것을 선택했지요.”

    즉, 마왕 파이몬은 당신의 후보자에서 탈락했다.

    데이지가 그렇게 고했다.

    “마지막 세 번째 단서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엘리자베트 통령입니다.”

    데이지는 추측이 아니라 확고한 진실을 말하는 어투였다.

    “아버님께서는 엘리자베트 통령의 의중을 간파한 다음, 신기하게도 그녀에게 맞추어서 전쟁을 수행하셨습니다. 얼마든지 통령을 속이고 농락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마치 아버님께선 통령과 혈맹을 맺은 것처럼 박자를 맞추셨습니다. 통령의 목숨을 철저하게 끝장대는 대신, 도리어 질긴 목숨을 살려두었지요.”

    “…….”

    “이제 저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자베트 통령 또한 아버님의 후보자에 속합니다. 도대체 몇 명이나 목록에 올려넣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버님께서는 후보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물러터지신 구석이 있습니다.”

    데이지의 비웃음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일까.

    의도치 않았는데도 나의 입 끝이 기묘하게 비틀어졌다.

    “그렇다면 맨 처음의 의문, 왜 제 오라비를 활용하시지 않는지 또한 저절로 해소됩니다. 마찬가지로 제 오라비가 후보자 목록에 올라 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버님.”

    “옳다.”

    “루크를 전쟁이나 이런저런 일에 끌어들이지 않은 이유는 명료합니다. 아버님께서는 루크가 진실로 순수하고, 정의로우며, 올바른 인간으로 자라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님과 같은 악인을 처단해도 될 정도로 '순수히 올바른 인간'이 되기를.”

    악인이 악인을 죽이는 것은 단순한 살인이다.

    반면에, 선인이 악인을 없애는 것은, 매우 올바른 집행이자 처단이다.

    나는 엽궐련을 다 말고 입에 물었다. 그리고 얼굴을 쓰윽 내밀었다. 데이지가 연초 끄트머리를 내 연초의 끝자락에 살짝 갖다붙였다. 잠시 뒤, 나의 연초로 불씨가 옮겨 붙었다. 나는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아마도 아버님께서는 언젠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제 오라비가 진실을 깨닫도록 유도했겠지요. 그리고 당신을 죽이도록, 진정한 전사가 되도록 도와주었을 겁니다. 제 오라비가 모르는 사이에.”

    “…….”

    “어설펐습니다, 아버님.”

    데이지가 말했다.

    “저는 물론 어리석은 아이입니다. 그렇지만 단서를 세 개씩이나 보여주시다니요. 제가 알아차리지 않으려고 해도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베르시 백작, 엘리자베트 통령, 루크……설마 그들이 아버님을 죽여도 된다고 판단하셨는지요?”

    데이지는 미소를 지었다.

    “백작 따위에게, 통령 따위에게, 오라비 따위에게 제 권리를 양도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이 아버님의 무엇을 안다는 말입니까. 애당초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버님을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한참 엇나간 착각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연초를 핀 탓인지, 마음이 한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 오라비는 이제 스스로를 죄인이자 악인으로 여깁니다. 한점의 의심없이 악인을 처단할 만한 인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부디 후보자 목록에서 제 오라비의 이름을 지워주세요.”

    “…….”

    “제가 감히 판단하건대 베르시 백작도 인물이 아닙니다. 마왕 파이몬을 아버님 스스로 죽이셨으니, 이제 마왕 바르바토스와 엘리자베트 통령 정도가 유력하겠군요.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아버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절대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 한가운데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제가 그들로부터 아버님을 지킵니다.”

    데이지가 올곧은 시선으로 내게 선언했다.

    “이 세계에서 아버님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 하나뿐입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