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6 거미와 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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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잠자리가 줄어들었군요.”
베르시 백작을 내보내고, 나는 의자에 앉아서 더럽게 단 과일주를 홀짝였다. 혼자서 생각에 잠긴 것이었다. 요새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굳이 잠을 오래 잘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의 잠자리가 아닙니다. 아버님. 그 여자가 죽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갖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부터 네가 내 아랫도리 사정까지 훤하게 꿰뚫었는지 궁금하군.”
내가 비웃었다.
“이제 머리가 좀 굵었다고 네놈도 그런 방면으로 관심이 생겼느냐? 아서라. 너처럼 젖비린내가 아는 꼬맹이를 상대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말꼬리를 돌리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벌써 한 달이 흘렀습니다. 아버님처럼 사시사철 발정기에 시달리는 분께서 한 달이나 금욕한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겨우 한 달이다. 나도 쉬고 싶은 시기가 있는 것이지.”
“저는 아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지를 노려보았다.
데이지는 입가를 비틀고 있었다. 누구를 닮았는지 무척이나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그 여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
“아버님의 방식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은 이를 기억합니다. 제가 감히 말씀을 올리자면, 무척이나 꼴불견입니다. 진상에도 정도가 있지요.”
내가 과일주를 머금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라우라와 이바르가 네놈한테 칭얼거린 모양이군.”
“놀랍게도 마왕 가미긴까지 저를 만나서 정보를 요구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민폐입니다. 적당히 아무 여자나 잡아서 떡 치시지요. 어차피 아버님의 신체에서 쓸모있는 부분이라곤 입구멍과 아랫도리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절반으로 떨어트리실 셈입니까?”
어찌된 일인지 뻔했다. 내가 갑자기 잠자리를 멈추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다들 전담시녀인 데이지한테 물어본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여자들이었다. 15살짜리 꼬맹이한테 질문해도 될 것이 있고 질문하면 안 될 것이 있지, 쯔쯧…….
“괜히 참견하지 말거라. 남의 연애에 끼어들었다가 좋은 꼴 보기 힘들다. 그러는 네 연애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고?”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와 사귄 적이 없습니다만.”
“네 잘난 오라비가 있지 않느냐.”
이번에는 이쪽에서 비웃어줄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지의 얼굴이 시궁창처럼 썩어 들어갔다.
“……저는 루크와 사귀지 않습니다.”
“왜? 네가 동성애자라서 말이냐? 크흐, 거 좋은 변명이로구나. 네 오라비한테 연심이 있는 것을 숨기려고 필사적으로 연기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볼 만하다. 이바르의 엉덩이를 만지니까, 그래.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지더냐?”
“…….”
내가 이죽거렸다.
“갑자기 말이 없어졌구나. 어디 잘난 듯이 떠들어보거라. '저는 아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고. 어이쿠, 그래도 말이 없구나. 하긴 만약을 대비해서 친부모랑 절연까지 했으니 입구멍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겠지. 우리 딸의 연정이 참으로 대단해서 이 아버지는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노라.”
“죽여버리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협박이로군.”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퍼컷을 날려주려고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문득, 열 살에 데려온 꼬마아이가 얼마나 자라났는지 갑작스레 실감이 났다. 농담 삼아 말했지만 데이지는 정말로 거의 다 컸다.
“흐음.”
내가 데이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윽 만졌다. 아름다운 흑발이 손안에 들어왔다. 마치 백자 도자기처럼 새하얀 살결도 눈에 띄었다. 가슴은 크게 나오지 않았지만, 암살자에게는 그편이 오히려 좋았다.
그런가. 벌써 5년이 넘었는가…….
내가 함부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데도 데이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기본이 무표정인 얼굴에는 어릴 적부터 계획적으로 단련시킨 지성이 스며들어 있었다. 언어만 따져도 이 아이는 10개 국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결혼하고 싶느냐?”
“…….”
데이지가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뒤, 데이지가 길거리에 누군가가 구토해놓은 토사물을 본 행인처럼 우거지상을 지었다.
“미쳤습니까?”
“평범하게 결혼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면 내 특별히 고려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너도 열다섯 살이니 자기 인생을 스스로 결정해볼 법한 나이다. 솔직하게 말해봐라. 결혼하고 싶느냐.”
내가 의외로 진지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겠지.
데이지가 한층 싸늘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르네, 알베르, 브누아, 쟝, 토비, 아벨, 브뤼노, 티보, 루씨앙. 모두 아홉 명.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니.”
“아버님께서 죽이신 저희 마을의 주민들입니다.”
데이지의 눈동자에 독기가 번들거렸다.
“르네 아저씨는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서 매일 새벽마다 마을의 목책을 점검했습니다. 알베르 아저씨는 자기 가족한테 먹일 식량도 부족하면서 겨울에 굶어죽을 가족이 생기면 항상 도왔지요. 브누아 촌장 할아버니는 언제나 저희를 현명하게 이끌었습니다. 전부 아버님께서 파리 목숨을 없애듯이 죽이셨습니다.”
“…….”
“이제 와서 선인인 척 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은 구제할 도리가 없이 근성부터 썩어빠진 악인입니다. 제가 때때로 아버님을 위로해드리는 까닭은, 순전히 제가 아버님을 이 두 손으로 죽이기 전에 아버님이 망가지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데이지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깟 여자 한 명 죽였다고 망연자실하게 있다니, 너무 우스워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님은 이미 수십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자식이었으며, 누군가의 연인이었습니다. 하. 이제 와서 죽음을 애도하실 여력이 생겼습니까? 어차피 창녀였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촤악, 하고 데이지의 얼굴에 과일주를 내던졌다.
주홍빛 액체가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졌다. 데이지는 그러나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파이몬은……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어.”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하지요. 생명의 무게는 똑같은데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생명에만 유독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마왕 시트리도 순진한 얼굴을 해놓고는, 숭배하는 연인이 한 명 죽었다고 해서 아무런 죄가 없는 시민을 십만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놀라운 계산법이네요.”
데이지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서 얼굴을 닦았다.
“맹세합니다만 결혼 따위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인생의 의미는 그날, 아버님께서 저희 마을을 불사지르고 능욕한 날에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저는 아버님을 죽입니다.”
“…….”
“단지 아버님의 목숨을 거두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목숨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저는 아버님의 모든 죄악을 추궁하고, 끄집어내서, 그에 걸맞는 최후를 선물해드릴 것입니다.”
데이지가 얼굴을 전부 닦은 다음 희미하게 웃었다.
“우연치 않게도 마침 아버님께서 바라는 최후와 똑같군요. 안 그렇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제가 효녀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저 또한 진심으로, 마음 속 깊이 간절하게 소원하고 있으니까요.”
그거 대단한 효녀로군. 열녀문이라도 세워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은 제 침대에서 주무십시오, 아버님.”
“……뭐?”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데이지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저와 잠자리를 가져달라는 부탁이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미쳤어도 아버님께 처녀를 바칠 만큼 실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침대 아래에 숨어서 주무세요.”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게 되었다. 일단 말투부터 교정할 필요가 있었다.
“네 주인은 나다. 그런데 꼭 네가 내 주인이라도 된 것마냥 말하는구나.”
“결혼을 시켜달라는 부탁보다는 가볍지 않습니까? 제 아버님이 되어서 베풀어주신 것이 고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런 부탁 정도는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뻔뻔하게 요구하는 것까지 나를 닮았다. 정말로 교육을 잘못 시켰다. 내가 한숨을 쉬었다.
“……침대 아래에서 자라니. 대체 저의가 무엇이냐.”
“오늘밤에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데이지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날 밤. 마왕성에 위치한 데이지의 침실에서 자게 되었다.
방바닥이 차갑고 딱딱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예전, 라우라를 처벌하면서 나 자신한테도 편형을 내린 이후, 나는 등쪽에 감각이 거의 사라졌다. 덕분에 어느 길바닥에 잠들어도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는 체질이 되었다. 멋진 이득이었다.
그렇게 침대 밑에 누워서 뭘 하고 있느냐면.
“……이 녀석은 당최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데이지의 침실은 살풍경했지만 가구 자체는 최고급품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침대 역시 쬐끄마한 데이지가 독차지하기에는 상당히 거대해서, 내 몸 전체를 완전히 가려주고도 남았다.
그런데 데이지, 이 요망한 것은 마왕성의 주인이자 제국의 흑막을 감히 침대 아래 깔아뭉갠 것도 모잘라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핀잔을 주니까 ‘오늘밤은 그곳에서 절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라고 도리어 협박을 돌려주었다.
결국 나는 새카맣게 어두운 침대 아래에 누워서 역시 새카만 침대 밑바닥을 쳐다보고 있었다. 연초라도 피우거나 술이라도 마시면 좀 나으련만, 이 빌어먹은 장소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아.”
얼마나 엉뚱한 짓거리를 저지르려고 날 이런 곳에 몰아넣었는지, 원.
솔직히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짐작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나를 놀려먹으려는 것일지 몰랐다. 아니, 데이지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 끼이익.
침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돌아왔는가, 하고 내가 마음을 놓은 순간이었다. 상당히 귀에 익은 목소리가 침대 너머에서 울렸다.
“헤에. 여기가 데이지의 방이구나. 처음 봤어!”
……루크?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역시 데이지는 대부님의 총애를 받는구나. 부럽다. 나는 성에 개인 침실 따위는 가지지 못했는데.”
“아버님에게 총애를 받는 게 부러워?”
이번에는 데이지의 목소리였다. 데이지가 반말을 쓰는 걸 들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신선했다. 다만 어미가 반말로 바뀌었을 뿐이지, 어조 자체는 똑같았다. 무뚝뚝하고, 어딘지 서늘한 음색이었다.
“물론이지! 대부님은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신 분인걸. 나도 들었어. 얼마 전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법률을 통과시키셨다면서.”
“세상 전부는 아니야. 합스부르크 제국과 마계에만 해당하지.”
“어차피 곧 전 세상이 될 텐데, 뭐! 그게 그거지.”
루크는 확연하게 들떠 있었다.
생각해보니, 데이지는 이미 3년인가 4년 전에 루크와 일절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친부모와 절연한 뒤에 루크와도 인연을 끊다시피 했다. 그러니까 루크 입장에서는 3년 만에 누이동생과 대화를 나누게 된 셈이었다. 기뻐할 만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밤에 부른 거야? 아니, 싫다는 건 전혀 아니고! 그냥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아버님께서 오늘 나한테 말했어. 오빠랑 너무 소홀하게 지내는 것 아니냐고.”
“대부가…….”
루크는 살짝 감격한 듯했다.
“그렇구나……미안해, 데이지. 내가 예전에 아버님한테 너에 대해서 얘기했어.”
“괜찮아. 나도 일이 바쁜 걸 핑계로 오빠한테 소홀한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일 아침부터 하루종일 일해야 할 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서, 지금 부르는 수밖에 없었어.”
루크가 납득했는지 응, 그렇구나, 하고 말했다. 내 시점에선 루크의 발목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광경이 저절로 연상되었다.
“오빠. 이건 재회를 기념하자는 의미야.”
용사 남매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무슨 종류인지 모르겠지만 둘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두 아이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 훈련, 업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잡담이나 떠들고 헤어지려고 루크를 불렀을 리 만무했다. 데이지는 지금 무엇을 노리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