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04화 (404/510)
  • 00404 거미와 독사  =========================================================================

    절벽이 병풍처럼 줄지어 선 해안가.

    이미 오래 전에 바닷바람에 삭아서 허물어진 신전이 절벽에 걸쳐 있었다. 바다에는 거대한 잔해가 파묻혔다.

    마왕성 <공중정원>. 한때 허공을 부유하던 섬은 이제 주인을 잃었다. 마력이 사라지고서 공중정원은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우연의 일치였다. 파이몬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공중정원도 함께 이곳 앞바다에 큰 파도를 일으키며 침몰했다…….

    이제 사시사철 아름답게 꽃피던 정원은 없었다. 계절을 무시하고 우거지던 수풀도. 모든 것이 바닷물에 뒤덮혀서 천천히 어디론가 가라앉았다. 그것들이 다시 공중에 떠오를 일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

    “친애하는 동지들.”

    내가 뒤를 돌아섰다.

    “우리 해방동맹의 수장, 마왕 파이몬이 죽었다.”

    그곳에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열두 명 모여 있었다. 머리가 로브에 덮힌 터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서로 그럭저럭 면식이 있었다. 이들은 파이몬이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낸 조직 해방동맹의 간부였다.

    “바로 내 품안에서 죽었지.”

    “그분의 유언은 무엇이었습니까?”

    여인이 말했다.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안나 더 빗 총지부장. 해방동맹에서 바타비아 공화국 방면을 담당했다. 파이몬에 이어서 조직의 이인자로 취급되었는데, 바타비아에서 내로라 하는 권력자이기도 했다. 백합전쟁에선 나와 함께 군대를 이끌었다.

    내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녀처럼 고귀하고 명예로운 유언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파이몬은 대륙의 평화를, 모든 종족의 평등한 공존을 염려했다. 파이몬은 나에게 후사를 부탁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간부들이 멈칫했다.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안나 더 빗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건 고귀한 죽음도 아니었고, 명예로운 죽음도 아니었다. 파이몬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바로 암살이라는 방식으로.”

    내가 로브를 쓴 간부들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유언을 남길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파이몬은 오직 나를 감싸는 데 최후의 순간을 소모했다. 암살자가 그녀의 목등을 찌르고, 등을 찢어발기고, 미친 늑대처럼 물어뜯을 때마다, 파이몬은 내 몸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신음과 비명조차 참았다.”

    “…….”

    “마지막으로 쓰러지면서 파이몬이 조용히 속삭였다. '울지 마세요'라고. 그것이 유언이라면 유언이겠지.”

    간부들이 침묵했다. 나를 마음껏 저주해라, 파이몬. 나는 필요하다면 너의 유언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 여기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숨이 멎어가는 순간까지 파이몬은 눈앞에 비춘 사람을 걱정했다. 그것이 파이몬이었다. 나의 연인이었고, 그대들의 지도자였다.”

    “…….”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공화주의를 부르짖는 것인가. 대단히 드높은 이상이 그곳에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가 특별히 고결한 지식인이기에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짊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인가?”

    나는 밤공기가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공기가 부산스럽지 않았다. 내가 정확한 기교를 발휘해서 말할 때면 마치 나 자신이 주변에 녹아든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그러했다.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과 고통을 도저히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할 뿐이다. 길거리의 노파가 힘겹게 숨을 들이마실 때 우리 역시 숨이 막힌다. 저잣거리에서 노예가 채찍질을 당할 때 우리 역시 분노를 느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시작하는 것이다…….”

    “…….”

    “나는, 내 눈앞에서 가장 고결한 여인이 가장 비참하게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기에서 나는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품속에서 천조각을 꺼내들었다.

    파이몬의 핏물이 묻은 옷자락을 잘라내어 손수건처럼 만든 물건이었다. 보존마법을 걸어두어서 반영구적으로 피가 변색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해방동맹의 간부들은 이미 이것이 무엇인지 분위기상으로 짐작한 눈치였다.

    “동지들이여. 나 단탈리안이 그대들에게 맹세한다. 나는 최후를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파이몬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리라. 추모의 방법은 혁명이다. 올바른 것에는 정의를 되찾아주고, 슬픈 것에는 만인의 동정을 안겨줄 것이며, 분노해야 마땅한 것에는 철퇴를 내릴 것이다.”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와 함께 죽어줄 것인가.”

    간부들이 로브 너머로 묵묵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그때 체구가 땅딸막한 인물이 로브를 벗었다. 난쟁이였다. 자크 보놈, 내가 편안하게 자크리라고 부르는 간부로서 백합전쟁에서 나를 전력으로 보좌해준 용병대장이었다.

    “나는 단탈리안 전하를 우리의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하는 것에 찬성하오.”

    간부들이 웅성거렸다.

    자크리는 해방동맹에서 제일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요컨대 선봉대장과 같았다. 파이몬을 열렬히 숭배했으며 공화주의를 종교처럼 받들었다. 그런 열성분자가 나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하자 파장이 생겨난 것이었다.

    “나는 이중에서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단탈리안 전하와 보냈다고 생각하오. 만일 동지들이 내 안목을 조금이라도 신뢰한다면, 내가 지금 하는 말에도 약간의 신뢰를 보태주시오. 단탈리안 전하는 대륙에 공화주의를 꽃피울 분이오.”

    “우리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적어요.”

    안나 더 빗이 반박했다.

    “전하의 진심을 제가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동맹을 이끌기에는 경험이 부족하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수많은 것을 이루셨소.”

    자크리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프랑크 제국을 무너트리고 공화주의자들을 정부 수반에 앉혀놓았소? 단탈리안 전하요. 누가 사르데냐 왕실을 좌절시키고 자유도시들을 해방시켰소? 단탈리안 전하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종족을 불문하고 일체의 노예제를 철폐하겠다고 선언하셨지.”

    자크리가 오른팔로 나를 가리켰다.

    “전하께서는 감히 수천수만이 모여도 이루어내기 어려운 업적들을 홀로, 그것도 5년도 안 되어서 이루어내셨소외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반론을 나는 인정하지 않겠소. 감히 확신을 담아서 장담하건대, 단탈리안 전하가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대의를 실현시키는 데 앞장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간부들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간혹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대체로 권위보다 실적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나만큼 실적이 찬란한 인물이 없었다. 사실 노예제의 전면 폐지를 발푸르기스 밤에서 통과시켰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는 독보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튜튼 지부에서 찬성하오.”

    “모스크바 지부에서 찬성표를 던지겠습니다.”

    “사르데냐 지부 또한 찬성하겠소.”

    내가 해방동맹의 수장이 되는 것에 지부장들이 찬성을 표하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하고 열두 명의 지부장 중에서 찬성이 9표, 기권이 2표 나왔다. 이미 과반수가 한참 넘었으므로 내가 옹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관건은 모두가 동의하느냐 마느냐였다. 반대표가 하나라도 나온다면 동맹은 잠재적으로 분열할 위기에 처했다.

    “…….”

    마지막으로 총지부장인 안나 더 빗이 의사를 표시해야 할 때가 왔다.

    “살아 생전, 파이몬 전하께서는 언제나 기쁜 얼굴로 단탈리안 전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단탈리안 전하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제가 지겨워하는 것은 상관도 하지 않으시고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계속 수다를 떠셨지요.”

    안나 더 빗이 머리에서 로브를 벗었다.

    금발의 엘프는 뺨에 자상(刺傷)이 새겨져 있었다. 백합전쟁, 생드니 전투에서 앙리에타에 의해 처참하게 패배했을 때, 거의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다가 얻은 흉터였다.

    “저는 저의 안목도, 자크리의 안목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파이몬 전하의 안목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파이몬 전하께서 단탈리안 전하를 믿으셨으니, 저 또한 단탈리안 전하를 믿습니다.”

    마지막 찬성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기권이 두 표 나오긴 했지만, 이건 찬성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만장일치로 인해서 나에게 과도한 권위가 부여될까 염려되어서 의도적으로 기권한 것이겠지. 실제로는 전원이 찬동한 셈이었다.

    내가 간부들을 향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일지니.”

    “혁명을 위하여.”

    간부들이 조용히 해방동맹의 구호를 읊었다.

    포도주가 오가는 등의 화려한 의식은 전혀 없었다. 파이몬의 뒤를 이어서 새로운 수장을 맞이했다는 것은, 간부들에게 있어 절대로 기쁘거나 축하해야 할 사건이 아니었으므로.

    파이몬이 거느리고 있던 세력은 모두 유산이 되어서 내게 상속되었다.

    산악파의 지도자인 시트리는, 군사적으로는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나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내 의견이 곧 산악파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제는 해방동맹까지 내가 이끌게 되었다…….

    폐허가 된 신전을 뒤로 하면서 내가 생각했다.

    나는 평원파에도 산악파에도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마계 전체를 믿음직스러운 아군으로 두었고, 마인들 중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상단을 내 전용 금고마냥 사용했고, 대륙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진 비밀조직마저 내 손에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그림에 그린 듯한 마왕이었다.

    이바르는 나를 볼 때 종종 '앙골모아'라고 중얼거렸다. 마족들에게 내려져 전해오는 전설이었다. 언젠가 앙골모아라는 대마왕이 나타나서 모든 대륙을 마족들에게 열어줄 것이라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바르는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것처럼 의외로 사실을 적중했을지 몰랐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  *  *

    나는 프랑크의 정부 수반과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

    현재 프랑크 정부를 이끄는 인물은 물론 베르시 백작이었다. 내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법무상이었고 베르시 백작이 프랑크 제국의 법무상이었으니, 우연찮게도 지위가 똑같았다. 제국인 주제에 황제가 유명무실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오랜만에 뵙소, 궁중백. 그동안 평안하셨소?”

    베르시 백작은 역력하게 피로한 기색이었다. 엉망진창이 된 조국을 어떻게든 꾸려나가느라 잠도 아껴가면서 일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수척해졌군요.”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지 미처 몰랐소. 그러는 그대도 썩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구려.”

    “백작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경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베르시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처음에 쟝 볼레 사제를 연기하면서 베르시 백작과 만났지만, 약 1년 전에 이바르를 통해서 프랑크 제국에 막대한 금액을 차관으로 빌려주면서 마왕 단탈리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백작은 상당히 놀랐지만 꺼려하거나 그런 기색은 없었다. 베르시 백작은 공화주의자였다. 내가 브루노 평원에서 어떤 종류의 연설을 했는지 알고 있기에, 오히려 확실한 사상적 동지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리 비밀스럽게 만나는 이유가 무엇이오? 부디 내 잔주름을 하나 더 늘려주지 않는 일이기를 바라오만.”

    “미안하지만 잔주름이 늘어날 이야기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빌린 돈을 슬슬 갚아주셔야겠습니다, 백작.”

    “…….”

    “7푼의 이자로 빌려드린 차관 말입니다. 적어도 이자 정도는 돌려주십시오.”

    베르시 백작의 얼굴이 악마를 만난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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