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03화 (403/510)
  • 00403 방울져 떨어지는 밤  =========================================================================

    “이틀 동안 병문안을 온 사람이 많습니다. 가미긴, 바싸고, 제파르…….”

    “내가 그걸 일일이 기억하리라 생각하느냐? 멍청한 것. 종이에 써서 주거라.”

    “국무상서와 군무상서도 바로 옆 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내가 눈을 떴다.

    창문이 열린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나의 볼에 잠시 묻었다가 흘러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뺨을 만졌다. 손바닥을 살펴보았지만, 핏물이 묻어 있지 않았다.

    “파이몬의 시체는?”

    “영구보존 마법으로 엄중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장례식 절차에 대해서는 아직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우선 마왕 시트리가 원정을 다녀온 이후에 결정하자는 식으로 논의가 정리되었습니다.”

    “그래…….”

    “아버님이 깨어난 이후에 결정하자는 얘기도 함께 있었습니다.”

    대부분 마왕에게는 가족도 친지도 없었다.

    마왕이 죽었을 때는 보통 그 사람과 가장 친밀했던 자가 상주(喪主)를 맡았다. 이번 경우, 파이몬의 애인인 시트리와 내가 상주 후보로 거론되었겠지. 그렇지만 시트리는 파이몬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 전쟁터로 향한데다 나는 기절한 채로 깨어나지 않았다. 마왕들도 꽤나 곤란했으리라.

    “데이지.”

    “예, 아버님.”

    “노래를 불러다오.”

    데이지가 눈을 깜빡거렸다.

    데이지는 음색이 무척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과거 프랑크를 순례했을 때는 천사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용병들에게 찬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 마왕성에서도 데이지는 때때로 혼자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고는 했는데, 아마 책읽기와 더불어서 녀석의 몇 안 되는 취미일 거다.

    난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래서 데이지가 놀란 것이겠지.

    “……울게 내버려두소서.”

    잠시 뒤에 데이지가 작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녀석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  *  *

    많은 사람이 내 침실을 들락날락거렸다.

    가장 먼저 들이닥친 사람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라우라와 라피스였다.

    라우라는 나를 보자마자 엉엉 울면서 나의 침대에 달려들었다. “주군은 정말 바보다!”라느니 “멍청이!”라느니, 대체로 유치한 욕설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라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라피스는 라우라보다 대처하기가 훨씬 더 난감했다. 그저 빤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일종의 침묵시위였다. 왜 미리 말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걸 실행했느냐, 하고. 라피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내가 전부 가져가고 싶었다.

    거의 모든 마왕이 병문안을 왔다. 덕분에 별로 아프지도 않는데 며칠씩이나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참고로 제일 웃긴 병문안 손님은 바싸고였다.

    “쯧.”

    바싸고는 침실에 들어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바로 등을 돌려서 나가버렸다. 정말로 곧바로였다. 그러니까 바싸고가 와서 남긴 말은 '쯧' 하고 혀를 찬 소리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하러 방문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벨레드 형님은 마계에 대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울발라지옥에서 살아가는 마인이란 마인은 종족과 계급을 불문하고 학살당하고 있네.”

    “……시트리가 학살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시트리가 민간인을 싸그리 죽여댄다는 것이었다.

    “반역자들의 영지는 이미 일찌감치 항복했지. 이미 대공들이 죽은 판국에 우두머리도 없이 뭐 반항이야 할 수 있겠나.”

    “설마 항복을 했는데도 죽이는 것입니까.”

    “아아. 말려도 소용이 없더구만.”

    벨레드 형님이 어깨를 으쓱였다.

    벨레드 형님은 딱히 인도주의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학살을 선호하는 부류였다. 그런 벨레드 형님이 말려야 했을 정도라니, 얼마나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행각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기가 막힌 방법을 쓰더라니까 그래. 우선 일자로 구덩이를 파놓는 거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 마인들을 열에 맞추어서 대기시켜둬.”

    “생매장입니까?”

    “매장은 매장이지만 말이야.”

    벨레드 형님이 피식 웃었다.

    “뒷열의 사람한테 무기를 들려줘서 앞열의 사람을 찌르라고 명령한다.”

    “예?”

    “그렇게 첫 번째 열의 마인이 모조리 죽어서 구덩이에 떨어지면, 다음 차례는 두 번째 열이지. 무기가 뒷사람에게 넘어가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거야.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등을 찔러버리라고.”

    요컨대 민간인이 민간인을 찌르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죽일 수 없다면서 울어재끼는 마인이 부지기수였는데, 그런 놈들은 시트리가 직접 사지를 찢어버리더군. 얌전히 죽을 것인지 사지가 찢겨서 죽을 것인지 양자택일하라는 거야. 흐이구.”

    “…….”

    “나중에 가서는 마인이 울며불며 앞사람한테 미안하다고, 죽이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어차피 바로 자기도 죽을 테니 용서해달라면서 칼을 찌르지 뭔가. 앞사람은 뒷사람한테 괜찮다고 또 울면서 말하고……하여간 끔찍했어.”

    매당되어버린 민간인의 숫자가 무려 십만.

    울발라대공이 머무르던 도시는 문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고, 땅에는 다시 생명이 자라지 못하도록 대량의 소금이 뿌려졌다.

    그동안.

    수만 명의 마인이 단지 그곳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동안.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

    시트리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마치 얼굴에 근육이란 것이 사라진 사람처럼.

    마치 표정이란 것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대다수가 정신병을 갖고 있는 마왕들이 바라보기에도 적이 광적일 정도로, 시트리는 단지 학살에 학살을 더하였다.

    “결국 시트리한테 다들 질려버려서 말이지. 대부분이 이틀을 버티지 못하고 그냥 여기로 돌아와버린 걸세. 뭐, 사실상 전쟁은 첫 날부터 끝나버렸지.”

    벨레드 형님이 내 침대 옆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과일 중 사과를 집어들고 아삭 깨물었다.

    “시트리가 지금 마계에서 하는 일은 전쟁이 아니라 단순한 살인이야. 아우도 알겠지만 나는 미친 전쟁꾼이지 냉정한 살인자가 아니거든. 아무런 미학도 의미도 없는 학살에 동참할 이유는 없으니, 깔끔하게 접고 돌아왔네.”

    아마도 시트리는 역사상 마인을 가장 많이 살해한 마왕으로 남게 될 거라고, 벨레드 형님이 사과를 씹으면서 말했다.

    “더 재밌는 건 시트리 그 녀석이 정확하게 십만 명을 채우고 끝내겠다고 말한 거야. 글쎄, 뭐라더라. 내가 어제 떠날 때는 아직 9만 5천 몇 명밖에 안 죽여서 조금 부족하다던가.”

    벨레드 형님이 코웃음을 쳤다.

    “원래 미친놈이 정신이 나갈수록 숫자처럼 미세한 것에 집착하게 되거든. 자기가 벌이는 미친 짓에 전부 하나하나 이유를 붙여두려는 거지. 이해하겠나, 아우? 집착증이라구. 쯔쯧, 그 여자는 이제 끝일세. 너무 멀리 가버렸어.”

    “…….”

    시트리가 원정을 끝마치고 돌아온 것은 이틀 뒤였다.

    처음으로 대륙이 아니라 마계에 창끝을 돌린 월맹군은, 전쟁이 시작하고 열흘도 지나지 않아서 종료되었다. 마인이 마왕에게 반역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겨우 며칠 만에 시트리는 잔혹하고 잔인한 마왕의 대표주자로 바뀌었다.

    시트리가 귀환하고 첫 번째로 찾은 사람이 나였다.

    “다녀왔어, 단탈리안.”

    시트리가 환하게 웃었다.

    벨레드 형님이 전해준 것처럼 무표정한 학살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항상 그러했듯이 순진무구한 여자가 내 앞에 있었다.

    “많이 죽였어. 아주 많이 죽였어. 응, 파이몬 언니는 싫어하겠지만……언니는 바보처럼 착하니까 싫어하겠지만, 그냥, 용서할 수가 없었어.”

    “…….”

    “단탈리안. 나 잘한 걸까?”

    내가 말없이 시트리를 안아주었다.

    시트리는 아주 잘해주었다.

    그동안 산악파를 이끌어온 파이몬이 사라졌다. 산악파는 자칫 분열될 위험에 처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집단을 하나로 뭉치게 해주는 것은, 과감하고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한 행동이었다.

    우리가 분노하면 이렇게 공포스럽다. 우리를 얕보지 마라. 우리의 힘에 굴복하라…….

    이런 식으로 집단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되찾아주는 것이었다. 시트리는 파이몬의 다음을 이을 후계자로서 더없이 훌륭하게 행동했다.

    딱 10만 명을 맞추어서 학살한 것도 잘한 일이었다. 마왕 한 명이 죽었으므로 배신자 십만 명을 차단했다, 하고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어마어마한 학살이지만 동시에 '계산적인' 보복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시트리. 앞으로 당신이 산악파를 이끌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분명히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응. 나, 노력할게…….”

    시트리가 내 어깨에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었지만.

    시트리는 표정을 되찾은 것이 아니었다. 나와 단 둘이서 있을 때만 예전처럼 웃고 방실거리고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마치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무표정하게 변해버렸다.

    아니, 정말로 변해버린 것이겠지.

    시트리에게 파이몬은 그만큼 의미가 큰 존재였다.

    단지 시트리는 나를 똑같은 처지로 생각했다. 파이몬을 잃어버린 사람은 자기 혼자가 아니라 단탈리안도 포함된다고. 일종의 동지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기 때문에 오직 내 앞에서만 옛날처럼 웃을 수 있었다…….

    *  *  *

    “그럼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하겠습니다.”

    바로 다음날. 모든 마왕이 모여서 회의를 열었다.

    전후처리를 겸해서 이번 회의는 매우 중요한 안건을 세 개나 다루고 있었다. 그중 첫 번째는 모든 사단이 일어나게 된 원인인 노예제였다. 평소라면 안건에 대해서 여러 마왕이 시끄럽게 토론했겠지만, 이번 회의는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종족을 불문하고 모든 노예를 폐지하자는 안건에 대해서. 모두 투표해주십시오.”

    찬성 6표.

    기권 1표.

    “이로써 노예제는 전면적으로 폐지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실제로 노예가 사라지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괜찮았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마계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대륙이 노예제를 폐지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그러하기로 이미 맹세했으며, 단언하건대 나의 맹세를 방해할 세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자는 없애버리면 될 뿐.

    이제까지 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죽어나간 인명이 사십만에 이르렀다.

    사십만을 사백만으로 바꾼다고 해서 내가 무너질 일은 결코 없었다.

    “다음. 이번에 배신자를 처단하는 데 앞장선 공신들. 독사대공을 비롯해서 일곱 명의 대공에게 일찍이 반역도당이 점거했던 영토를 나누어준다는 안건에 대해서. 모두 투표해주십시오.”

    찬성 6표.

    기권 1표.

    “이로써 마계에서 대공을 칭할 자격이 있는 자는 일곱 명으로 영구히 제한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마계를 다스리는 대공들 전원이 나와 굳건한 동맹관계에 놓였다. 이제 나는 제국뿐만이 아니라 마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안건.

    “선제후 투표에서 공석이 되어버린 룩셈부르크 대공직을 마인츠의 선제후, 시트리로 하여금 겸임하도록 하는 안건에 대해서. 모두 투표해주십시오.”

    찬성 6표.

    기권 1표.

    “이로써 마인츠의 선제후 시트리는 룩셈부르크 대공이자 제국의 대시종장을 겸하며, 앞으로 모든 투표에 있어서 예외적으로 두 표를 행사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합니다.”

    파이몬이 가지고 있었던 선제후 지위를 시트리에게 양도했다. 이는 산악파에게 특별한 예외를 안겨주는 동시에 산악파의 권력이 시트리 이외에 다른 마왕에게 흘러가는 것을 사전에 방지했다.

    내가 시트리를 바라보았다.

    시트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의자에 가서 앉았다. 파이몬이 앉았던 의자였다. 시트리의 의자는 시종이 다가와 들어서 어디론가 치웠다.

    “오늘 발푸르기스의 밤은 여기서 폐회합니다. 동지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

    ………….

    회의가 끝나고.

    나는 황궁의 뒷정원에 앉아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원없이 잠을 잤다. 오늘 하루쯤은 잠들지 않아도 좋겠다 싶었다. 황궁 뒷정원에는 수영장처럼 직사각형으로 생긴 인공 연못이 나 있었는데, 나는 그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조용히 술을 마셨다.

    내 발밑에는 빈 유리병이 일곱 개 뒹굴었다. 마왕의 신체는 편리했다. 아무리 마셔도 쉽게 취하지 않았다. 라피스는 나에게 술도 끊으라고 권고했지만, 이런 몸을 가지고 주도를 즐기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을 일이었다.

    터억, 하고.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의자를 내려놓았다. 바르바토스였다.

    바르바토스는 의자에 앉아서 말없이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 역시 말없이 바르바토스한테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

    “…….”

    우리는 수면에 비춘 달빛을 바라보며 몇 시간이고 술을 마셨다. 어떠한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이제 와서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나와 친분이 있는 마왕 중에서 병문안을 오지 않은 사람은 바르바토스가 유일했다. 당연하게도, 바르바토스는 자신에게 병문안 따위를 핑계삼아서 내 침실에 들어올 자격이 없음을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대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술자리가 이어진 지 세 시간쯤 흘렀을까.

    그때 처음으로 바르바토스가 입술을 열었다.

    “단탈리안. 아직도 나를 좋아해?”

    서투르기 그지없는 한 마디였다.

    내가 유리잔에서 입을 떼었다.

    “사랑하고 있어.”

    천천히 한 잔의 포도주를 천천히 마셨다. 붉은 액체가 위장에 똬리를 트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잔이 금세 비워졌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 작품 후기 ============================

    ─ 챕터 <방울져 떨어지는 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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