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402화 (402/510)
  • 00402 방울져 떨어지는 밤  =========================================================================

    *  *  *

    내가 순간전이를 통해서 합스부르크의 황궁에 도착했을 때.

    마왕들은 궁전의 광장까지 몰려나와 무척 어수선한 공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밤에는 달빛이 어느 때보다 밝았다. 구름의 역할이란 그저 때때로 연한 보랏빛의 달무리를 뿌리는 것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속옷만 입은 마왕까지 있었다. 파이몬과 내가 피습을 받았다는 소식에 놀라서 앞뒤 가리지 못하고 헐레벌떡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러했다. 바로 시트리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시트리는 불길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불길함이 야트막한 안개처럼 광장 전체에 깔렸다. 산악파, 평원파, 중립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

    내가 걸음을 내딛었다.

    발목쯤에 무거운 안개가 걸려서 걸음걸이를 붙잡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내 종아리는 안개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더더욱 아래로 빠져들었다.

    나는 황금으로 가장자리가 마감된 정문을 지나쳐서, 광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우스운 일이었다. 가끔씩 내가 걷는 박자에 맞추어서 밤하늘의 조명이 번갈아 뒤바뀌었다. 달빛은 나의 발끝을 내리쬐었다가 다시금 구름에 어둡게 가려졌다.

    “하…….”

    누군가가 신음을 내쉬었다. 어쩌면 비명이었을지 몰랐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마왕들은, 내가 단지 홀로 걸어오는 것이 아니며, 품안에 누군가를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카락이 장미보다 붉은 여인을.

    마왕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럴수가…….”

    “신들이시여.”

    누군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고, 누군가는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밤구름이 물러나고 달빛이 비추었다. 덕분에 마왕들은 더 자세하게 이쪽을 관찰할 수 있었다.

    파이몬은 피투성이였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은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추악하게 더럽혀졌다. 내 입술과 입가에도, 왼쪽 뺨에도 그녀의 핏물이 칠해져 있었다.

    나는 파이몬을 조심스럽게 광장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 돼……아니야, 거짓말이야…….”

    시트리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주변에 있던 산악파 마왕들이 시트리를 부축했다. 시트리는 그들에게 양팔이 걸린 채 “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라는 말만을 고장난 오르골처럼 반복했다.

    그래, 시트리.

    나다.

    내가 이 여자를 죽였다.

    이 여자에게 착각을 심어주었고, 신념을 이용했고, 농락했으며, 왜곡했고, 가장 큰 행복을 약속한 다음 곧바로 그 행복을 이 두 손으로 강탈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이 여자의 이름은 파이몬이었다.

    “방금, 겨우 삼십 분 전에, 우리의 가장 사랑스럽고 명예로운 연인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제 품안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을 아주 뚜렷하게 기억했다. 내 입은 마왕들을 향해서 말을 내뱉었으나, 내 머리는 파이몬을 떠올리고 있었다.

    ─ 회의와 무도회를 시작하기 전에, 서열 제71위의 마왕 단탈리안을 추궁해야 한다고 소녀는 생각한답니다.

    ─ 단탈리안은 주저없이 안드로말리우스를 격살했습니다. 소녀로서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답니다. 그는 정말로 우리 마왕의 일원일까? 만일 마왕의 일원이라면 어떻게 그리도 쉽게 다른 마왕을 살해할까?

    ─ 소녀에겐 아직 단탈리안에게 추궁할 일이 남았어요!

    우리의 만남은 가히 최악에 가까웠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배신자는……여덟 명의 마계대공이었습니다. 주범은 울발라대공으로, 이 반역자는 파이몬과 저를 감금시키고 여러분에게 발푸르기스의 밤을 강요할 예정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을 인질로 삼고, 노예제를 영구히 폐지 불가능한 제도로 확립시킨다. 그것이 울발라대공이 밝힌 범행 동기였습니다……그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내가 입술을 물어뜯으며 분개했다. 입술이 터지면서 피가 흘렀다. 나는 이 정도 연기를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스킬 따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 손수건 갖고 계신가요?

    ─ 앞으로는 부디 손수건을 상비하세요. 신사의 소양이랍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내가 겪어온 시련에는 어김없이 당신이 개입했다. 내가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감옥에 갇힐 뻔한 것도, 월맹군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것도 당신 때문이었다.

    “……대공들 중에서 일곱 명이 우리의 편을 들었고, 결국 대공들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유리했습니다. 반역자들을 내쫓는 데 성공했지요. 하지만 반역자의 잔당은 건재했고, 아군은 그들을 마저 소탕하기 위해 추격했습니다. 그리고……대부분의 아군이 자리를 비운 틈에…….”

    나는 말문이 막혀서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울음기 때문에 말투가 헝클어지고 무뎌졌다. 모두 의도된 연기였다. 나는 내가 완벽하게 연기를 펼치고 있음을 자각했다. 나의 표정은 분노와 슬픔을, 충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내가 오로지 나 자신만 위해서 연기했다면, 파이몬, 당신은 전혀 달랐다.

    ─ 우리 마왕은, 얼마나 우둔했었나요! 마인을 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인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정작 죽어나간 것은 마왕이 아니었어요.

    ─ 위선이고 기만이었습니다. 대륙이 통일되어도 위선과 기만은 끊기지 않겠지요. 더더욱 화려하게 불타올라, 인간계, 마계, 이윽고 세계 전체를 태워버릴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동족을 버리고 인간만 사랑하는 위선자도 아니었고, 마왕이라는 한계에 얽매여서 무엇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외면하는 독선가도 아니었으며, 자기가 생각한 것을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겁쟁이도 아니었다.

    ─ 그거 아세요? 바르바토스와 소녀가 아직 친구일 무렵에 있었던 일이에요.

    ─ 우리가 농담 삼아서 얘기했답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말도 안 되지만, 만에 하나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과연 그 남자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요.

    ─ ……눈을 감아주세요, 단탈리안.

    당신은 나에게 선(善) 그 자체였다.

    고로, 당신을 살해한 나는 변명할 여지도 없이 악인이겠지.

    “파이몬은……파이몬은, 저를 감싸다가 죽었습니다!”

    내가 울부짖었다.

    “암살자가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청하게 서 있었습니다……그때 파이몬이 저를 껴안고, 암살자가 파이몬의 등에 몇 번이고……몇 번이고…….”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구겼다. 내가 파이몬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까닭은 하나뿐이었다. 가슴속에서 진실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추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추억을 이용해먹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칼날이 그녀의 등을 헤집는 것이, 저에게도 진동으로, 느껴졌습니다! 암살자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파이몬이 조금씩 무너져내렸습니다! 저는 그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느낄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보다 완벽한 거짓을 위해.

    “파이몬은 끝까지 제 몸을 놓치지 않았습니다……끝까지 양팔로 저를 감싸안고……저를 가려주고……그녀가 피를 내뱉었고, 그 피가 제 얼굴을 뒤덮었는데도……그런데도 파이몬은 마지막까지…….”

    내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절규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감정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토해냈다. 밤공기가 떨렸다.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손톱으로 살을 긁었으며, 목에서 핏기를 내뱉었다. 마왕들은 나의 분노에 압도되었다.

    여기서 하나의 진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복수를……!”

    절규와 절규 사이로 나는 띄엄띄엄 단어를 토했다.

    “용서 없는, 복수를! 전부……모조리……!”

    파이몬이 어떤 존재였는지 아는 사람은 이제 세계에서 나뿐이었다.

    내가 그녀를 거짓으로 물들인다면, 그걸 수정하고 고쳐주는 사람이 한 명 없이, 그대로 사실로 남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파이몬이라는 한 명의 여인에 대해 무제한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다.

    “파괴하고, 또 파괴해서!”

    어떠한 변명도 불가능하도록.

    파이몬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도록. 어떠한 책임도 파이몬이 짊어질 필요가 없도록. 바로 내가 그녀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범했으며, 마지막까지 소유했다.

    그렇기에.

    나는 단 한점의 흐릿함 없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머뭇거림도, 후회도, 의심도, 반성도 없이.

    “그녀의 복수를 해주십시오……!”

    내가 파이몬을 죽였다, 하고.

    “가장 끔찍하고, 가장 처절한 방법으로 배신자들을 싸그리 죽여주십시오!”

    파이몬을 죽인 장본인은 바로 나 단탈리안이다,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진실로써 세계에 못 박아둘 수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

    쿵, 하고 머리를 돌바닥에 부딪쳤다.

    “부탁드립니다……제발……동지 여러분, 제가 잘못한 것도 부족한 것도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를……제 모든 것을 바쳐도 좋으니 그녀의 복수만은……부디 제발…….”

    쿵, 쿵, 몇 번이고 이마를 바닥에 때려박았다.

    새카매진 세상에 내가 머리를 박는 소리만이 둔중하게 울려 퍼졌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나는 마치 땅바닥에 나의 데스 마스크를 뜨려는 사람처럼 두개골을 내리쳤다. 꼭 망치를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내 양쪽 귀를 감쌌다.

    “괜찮아.”

    내가 무겁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린 탓에 오른쪽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왼쪽 눈으로 희미하게 눈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시트리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처럼 떨렸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미소였다.

    “괜찮아, 단탈리안. 네 잘못이 아니야.”

    “…….”

    “응. 네 잘못이 아니니까……다 괜찮아질 거야. 전부.”

    시트리가 그녀의 뺨을 나의 이마에 꾸욱 눌러붙였다. 내 얼굴에 피가 아닌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시트리의 눈물이었다. 시트리한테서 흐르는 눈물이 나의 얼굴을 타고, 핏물을 씻어내며, 천천히 턱선을 따라서 흘렀다.

    내 피와 파이몬의 피, 시트리의 눈물이 섞인 액체가 땅바닥에 조용히 떨어졌다.

    “괜찮아질 거야……으응, 정말로 괜찮아질 거야…….”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슬퍼해야 할 시트리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내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시트리는 깨닫지 못했겠지만, 파이몬이 사라진 이때 시트리의 행동은 산악파를 대표한다고 보아도 좋았다.

    즉.

    나의 연기는 또 다시 성공하고 말았다.

    “제 잘못입니다……제가 없었더라면……저만 없었다면, 파이몬은…….”

    “으응. 괜찮아.”

    “파이몬은…….”

    내가 시트리에게 안겨서 울음을 쏟아냈다.

    나는 여태 마왕들 앞에서 지금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게, 때로는 상대방을 조소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런 내가 어린아이처럼 엉망으로 울어재꼈다. 그 의외성이 보다 연기에 신뢰성을 불어넣겠지.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눈을 깨고 보니, 침실에 누워 있었다. 데이지가 침대 옆에서 앉은 채로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 창문은 환하게 밝았다. 최소한 하룻밤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나는 무표정하게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데이지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정신을 잃은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어제, 월맹군이 결성되어 마계로 출군했습니다. 총사령관은 마왕 시트리입니다.”

    “…….”

    내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속이는 것은 이토록 쉬웠다.

    이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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