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01 방울져 떨어지는 밤 =========================================================================
우리는 포도주를 비우고 유리잔을 바닥에 내리쳤다.
월맹군에서 오래도록 내려오는 이 전통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의미했다. 깨진 유리조각을 이어붙여서 다시 술잔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우리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선택을 번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서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밟고 나아가리라. 그것이 전진을 의미하든지 후진을 의미하든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공들에게 명령하겠다.”
“분부를 내려주시옵소서, 전하.”
내가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짓밟았다. 까끌까끌한 감촉이 신발 밑창 너머로 느껴졌다.
“궁성에는 아직도 반역도당의 무리가 잠복하고 있다. 그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처형하라.”
오늘 연회에는 마왕과 대공만 참여했지만, 본래 내일 대공의 가족이나 휘하 귀족도 접견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현재 이곳 궁전에 머물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비란 없다. 종족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죽이도록. 당장 내일 죽을 것 같은 노인에서 시작하여 아직 햇빛을 보지 못한 태아까지, 반역도당의 피가 섞인 인물들은 모조리 사살하라.”
이것은 숙청을 빙자한 전쟁이었다.
일곱 명의 마계대공이 나를 따라온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를 뽑으라면 바로 막대한 이익에 있었다. 오늘부로 거주지를 명계로 옮기게 될 여타 대공들. 그들이 기존에 소유하고 있던 땅들이 모조리 일곱 명의 대공에게 돌아갔다.
마계는 더 이상 스물여섯 명의 대공이 다스리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오직 일곱 명의 대공이 마계를 통치할 것이다.
“존명.”
대공들이 오른주먹을 가슴팍에 올렸다. 군례였다. 대공들은 암살자들을 이끌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이미 내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학살이 예정되었는지, 복도 저 너머에서 아득하게 피투성이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바르. 여기에 적힌 대로 임무를 실행하고 와라.”
“예, 주인님.”
나는 이바르한테 옷소매에서 쪽지를 하나 꺼내서 주었다. 이바르는 쪽지를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바르가 나를 바라보았다. 자수정 빛깔의 눈동자가 '정말인가요?' 하고 묻고 있었다.
“현재 이 궁전에는 광범위한 반마법이 펼쳐져 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공으로 높이 날아야 할 것이야.”
“……분부를 받듭니다.”
이바르가 고개를 숙인 다음, 연회장에 길다랗게 나 있는 창문을 깨고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이곳에 남은 사람은 나와 파이몬 그리고 데이지뿐이었다. 물론 시체 수십 구를 제외한다면.
조용해진 연회장.
파이몬이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얌전히 포개었다.
“정말로 놀랐어요, 단탈리안.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런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내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데이지를 슬쩍 쳐다보았다. 파이몬과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으니 알아서 적당히 나가라, 하고 눈짓한 것이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저는 아버님의 호위입니다. 이바르 양이 사라진 이상, 저까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정 그렇다면 연회장 입구에 가서 망을 보아라.”
“의외입니다. 제가 있어야 할 장소는 언제나 항상 아버님의 바로 옆자리 아니었나요?”
나를 증인으로 삼은 장본인은 바로 당신이다, 그러니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해달라. 데이지가 그렇게 암묵적으로 시위하고 있었다.
“…….”
좋다.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지에게는 참관할 권리가 있었다. 파이몬과 단 둘의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것은 내 과한 욕심일지도 몰랐다.
“저는 바르바토스가 대공들에게 접촉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요?”
“제가 대공들을 만나러 간다는 정보도, 당신과 함께 방문한다는 정보도 대놓고 사방에 흘렸습니다. 바르바토스 입장에서는 충분히 배신으로 여겨질 법했지요. 바르바토스가 대공들에게 접촉하는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파이몬이 진지하게 내 얘기에 집중했다.
“미리 선수를 친 것이군요, 단탈리안.”
“예.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특별히 신뢰할 만한 마계대공이 일곱 명 있었습니다. 바르바토스가 미처 움직이기 전에, 제가 먼저 그들에게 연락했습니다.”
곧 바르바토스가 그대 마계대공들에게 어떠한 음모를 전달할 것이다.
그 음모는 속임수이다.
우리의 진정한 계략은 15명의 대공에서 믿음직스럽지 못한 8명을 축출하는 것. 그리고 그대들에게 나머지 마계의 통치를 위임하는 것이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연락을 하고서 겨우 이틀 뒤에, 바르바토스가 대공들에게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일곱 대공들 입장에서는 제 말에 신뢰가 갈 수밖에 없겠지요.”
독사대공을 포함하여 나에게 섭외된 일곱 명의 대공.
이들은 과거, 바르바토스와 내가 성교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 둘 사이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었다.
고로, 일곱 대공은 '바르바토스가 마왕 단탈리안을 따돌리고 단독으로 음모를 꾸미고 있다'라는 시나리오보다 '바르바토스와 단탈리안이 또 다시 짜고 치는 극본을 마련하고 있다'라는 시나리오를 신뢰했다.
“지금도 대공들은 오늘밤 일이 바르바토스와 내가 짜놓은 숙청이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습니다.”
“단탈리안……대단해요.”
파이몬이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나에게 깊이 안겨왔다. 파이몬의 부드러운 몸이 나를 따뜻하게 감쌌다. 파이몬은 나의 어깨에, 나는 파이몬의 어깨에 턱을 올려두는 자세가 되었다.
포근했다.
지금까지 나를 안아준 여인은 꽤나 많았다. 바르바토스, 라우라, 시트리, 이바르. 하지만 파이몬에게 안겼을 때가 가장 따뜻했다. 파이몬은 햇살과 같은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의 감촉을 좋아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대공들이 사실을 눈치 채버릴 텐데. 그게 유일한 걱정거리네요.”
파이몬이 바로 내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마치 목소리 자체가 하나의 고요한 음악과 같았다. 일정한 박자로 울렁거리는 무반주 첼로곡처럼.
“그때 가서도 과연 대공들이 바르바토스가 아니라 단탈리안을 선택해줄지, 소녀로서는 약간 자신이 없어요……아. 물론 단탈리안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전부 알아서 잘 하겠지요, 후후.”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파이몬.”
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쥐었다.
“전부 진실이니까요.”
“예?”
파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칼자루를 잡아 파이몬의 목덜미에 힘껏 찔러넣었다.
붉은 피가 공중에 흩날렸다.
순간, 파이몬이 비명을 토해냈다. 그것과 동시에 내 몸을 껴안은 파이몬의 손길에도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하나하나. 열 개의 손가락 전부가 등줄기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파이몬이 미약하게 신음했다.
“단, 탈리안……?”
나는 단검을 휘둘러서 파이몬의 등에 꽂았다. 칼날이 파이몬의 몸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하윽, 하고 파이몬이 다시 한번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그녀의 속에서 분출된 핏물이 내 손장갑을 축축하게 적셨다.
평범한 단검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맹독이 묻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파이몬의 뒷목에 칼날을 쑤셔넣었다. 그러자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서 있었던 파이몬이 힘을 잃고 허물어졌다.
그녀의 무너지는 몸을 내가 왼팔로 지탱했다. 파이몬은 아주 서서히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내 왼팔에 안긴 채 망연자실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으……흐크읍, 프흑…….”
파이몬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의 말은 목에서 쉴 새 없이 뿜어지는 핏물에 가로막혀서 미처 발언되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피거품을 토해낼 따름이었다.
“노예제는 전면적으로 폐지될 것입니다. 마족도, 인간종도, 어떠한 예외도 없이. 바르바토스가 노예제 폐지에 동의하는 대가로 요구한 것이 바로 당신의 목숨입니다.”
“흑, 하프흐읍……커흑…….”
“만인의 해방보다 저 한 명을 더 소중히 여긴 시점에서, 파이몬.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내가 파이몬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전에 당신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었습니다. 마지막 기회였어요, 파이몬.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제는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단탈, 리안……흐끄으윽……단, 탈리안…….”
“그러니 제가 당신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날밤에 약속한 것처럼. 영원히.”
파이몬이 천천히 오른팔을 들었다.
그녀는 내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피가 묻은 파이몬의 손바닥은 평소보다 더 뜨거웠다. 그녀의 손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사랑, 해요…….”
“…….”
“사랑해요……울지, 마세요……단탈리안…….”
그리고 파이몬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내 뺨에 길게 피의 붉은 궤적을 그리면서, 한없이 낙하했다.
모든 것이 멈추었다.
내 품안에서 느껴지던 무게도, 고동도, 감촉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더 이상 파이몬이 아니라 그녀가 남긴 일종의 여진과도 같은 떨림이었다. 상태창, 하고 내가 자그맣게 중얼거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
나는 파이몬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피비린내 향기가 풍겨왔다. 나는 개의치 않고 키스를 이어갔다. 붉고 따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하.”
이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바르는 어느새 창가에서 넘어와 내게 다가서고 있었다. 이바르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움찔거렸다. 발걸음이 멈추었다.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보고하라.”
“……마왕 바르바토스에게 전달했습니다. 사건은 종결. 바르바토스는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서 반역자 대공들의 영토를 유린하겠다고 대답을 돌려주었습니다.”
내가 이바르에게 전해준 쪽지에는 바르바토스한테 연락하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이바르가 깜짝 놀란 이유가 거기 있었다. 이바르는 내가 바르바토스와 함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바르바토스가 대공들에게 '단탈리안과 파이몬을 붙잡으라' 하고 거짓 명령을 내린 것도.
내가 일곱 대공한테는 전혀 다른 밀명을 내린 것도.
전부, 바르바토스와 내가 계획하여서 주도한 대본이었다.
“수고했다. 데이지.”
“……예, 아버님.”
“복도에 돌아다니는 아무 암살자나 잡아서 데려오도록.”
데이지는 연회장을 나서더니 고작 3분도 지나지 않아서 하녀 옷차림의 암살자를 대동하고 돌아왔다. 내가 휙, 하고 턱짓하자 데이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암살자를 일도양단했다. 암살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나는 암살자의 손에 내 단검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손에 쓰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불태웠다.
“데이지. 너는 나의 명령으로 근처에 암살자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암살자가 침입하여 나를 공격했다. 파이몬은 그런 나를 감싸고 대신해서 봉변을 당한 것이다. 이해했느냐.”
“……예.”
“파이몬을 죽인 것은 암살자이고, 결국 암살자를 고용한 여타 대공들이다.”
그것이 공식적으로 드러나게 될 내용이었다.
산악파 마왕들은 분개하겠지. 배신한 대공들에게 격노할 것이 분명했다. 일부 마왕은 혹시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니냐고 의심하겠지만, 문제는 누가 산악파의 의견을 주도하느냐였다.
파이몬이 사라진 이상 앞으로 산악파를 지도할 인물은 시트리밖에 없었다. 시트리는 누구보다 나를 신뢰했다. 나에 대한 의심을 단번에 일축해버릴 것이다. 설령 약간의 의심을 품을지라도 그때는 내가 시트리를 속이면 그만이었다.
배신자 대공들이 전부 죽어버리고, 그 친지까지 오늘밤 안에 모두 죽을 것이므로, 진실을 아는 제3자들은 모조리 땅에 묻혀버리고 마리라.
나의 권력은 유지된다.
바르바토스의 지지, 시트리의 지지, 마르바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계속해서 유지된다. 파이몬이 죽었다는 사실을 빼면 파벌들의 균형은 안정적으로 지속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가자.”
나는 양팔로 파이몬을 안아 들었다.
“제국의 황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