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9화 (399/510)
  • 00399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대공의 안내에 따라서 궁전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독사대공을 제외하고 14명의 마계대공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중에 절반 가량이 흡혈귀나 엘프였고, 나머지 절반은 호족과 묘족, 그리고 켄타우로스, 오크, 고블린으로 이루어졌다. 마계에서 종족으로 인한 계급의 상하가 얼마나 뚜렷한지 엿보였다.

    대공들 전원이 일어서서 깍듯하게 인사했다. 파이몬과 나는 대공들에게 일일이 악수했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두 분께서 함께 다니시니 소인들의 눈이 다 부실 지경이옵니다.”

    의례적인 인삿말이 몇 차례 오가고, 우리는 상석에 앉았다. 데이지와 이바르가 우리를 호위하듯이 양옆에 섰다.

    “모두들 앉아주시오.”

    “예, 전하.”

    “본론부터 간결하게 말하겠소.”

    내가 대공들을 둘러보았다.

    “본인이 지난 무도회에서 그대들을 강압적으로 다룬 것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사과하오. 그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낸 업적과 지위를 무시한 처사였소.”

    “망극하신 말씀이옵니다.”

    독사대공이 다른 이들을 대표해서 말했다.

    “만마의 주인께서 어찌 시종에 불과한 저희에게 고개를 숙이십니까. 그저 저희의 자그마한 노력을 인정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명예이고 영광입니다.”

    “그대들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재차 감사하는 바요. 만마를 위하여.”

    내가 포도주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대공들도 술잔을 집어서 화답했다. 만마를 위해, 하고 나의 선창에 따라서 대공들이 포도주를 마셨다. 시종들이 테이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빈 잔에 새로 술을 따랐다.

    자아, 여기서부터 본론이었다.

    “노예제 폐지에 대한 안건이 다음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다시 제청될 예정이라오.”

    “…….”

    “저번에 의제가 부결된 까닭은 평원파와 산악파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오. 인간종까지 노예 해방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쟁점이었지. 그리고.”

    내가 슬쩍 얼굴이 돌려서 파이몬에 눈짓했다.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산악파에서는 평원파에 한 발자국 양보하기로 결정했어요. ”

    “전하, 하오면 다음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는…….”

    “예. 인간종을 제외하고 모든 노예에 대한 해방이 선언될 거랍니다.”

    대공들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음…….”

    “크흠.”

    대공들은 다른 마족을 노예로 부리면서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를 쟁취했다. 코앞에서 당신네의 기득권이 사라질 거라고 들었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 한 차례의 휴지(休止)를 두고 독사대공이 발언했다.

    “전하. 부디 소신들의 충심을 의심하지 말아주시옵소서. 모든 마족이 마왕 아래 평등해야 한다는 대의에, 저희만큼 공감하는 이들이 달리 없습니다.”

    “십분 이해하오.”

    “소신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너그러운 자비심뿐입니다.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필요악이란 게 있습니다.”

    독사대공이 상인처럼 두 손을 모아서 작게 흔들었다.

    “소수의 노예에게 고된 노동을 강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유민들은 생계의 부담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정치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월맹군이 일어날 때마다 저희 마계에서 막대한 의용군을 지원했습니다만, 만일 노예가 후방에서 산업을 지탱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만한 의용군이 결성되기란 아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

    “전하. 저희들의 헌신은 상당 부분이 노예로부터 나옵니다. 이 점을 이해해주셔야만 합니다.”

    노예가 해방되면 자신들의 권력과 부가 줄어든다.

    이 경우 자신들이 마왕군에 원조하는 금액과 병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즉, 대공들은 '만약 노예를 해방시키면 그걸 구실로 더 이상 마왕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겠다'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물론 일방적인 출혈을 강요할 생각은 없소.”

    “오오. 그 말씀은?”

    “그대들에게 대륙의 영지를 배분하겠소외다.”

    대공들이 웅성거렸다.

    “실례하오나, 전하. 어느 정도의 영지를, 어떻게 소신들한테 나눠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지도를.”

    이바르가 품속에서 큼직한 두루마리를 꺼내어서 펼쳤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그려진 지도에는 대공들에게 분배될 영지가 따로 까맣게 색칠되어 있었다.

    “본래 역적 발레포르를 비롯하여 여섯 명의 마왕이 소유한 토지였소. 보다시피 상당하지.”

    “……실로 그러하옵니다, 전하.”

    “이 토지를 최대한 공평하게 그대들한테 분배할 생각이오. 만일 원한다면 그대들이 스스로 분배해서 가질 몫을 정하여도 좋소. 전적인 자유를 보장하겠소.”

    “으음.”

    대공들이 옆에 앉은 사람들과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아마도 애당초 친분이 있는 대공들끼리 가깝게 자리를 차지한 것 같았다. 시종들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자신의 주인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상대방에게 전달했다.

    어느 정도 의견이 정리되었을까.

    독사대공이 시종에게 귓속말을 전해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로운 제안에 모두를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하오나 전하. 과연 저희 대공들에게 대륙을 나눠준다는 의제가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통과할 수 있겠사옵니까? 예컨대 바르바토스 전하께서는 저희가 대륙에 진출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실 것입니다.”

    “이 제안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오.”

    대공들이 눈썹을 찡그렸다.

    독사대공만은 평탄한 표정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황송하옵니다만, 비공식적이라는 단어가 소신의 귀에는 결코 호의적으로 들리지 않사옵니다.”

    “백작이나 남작과 같은 직위를 공식적으로 수여해줄 수는 없소. 그러면 그대들이 마왕과 동급이 되어버리니 말이오.”

    “하오시면?”

    “그대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관료로 임명될 것이오.”

    기본적인 눈속임이었다.

    우선 여섯 명의 역적에게 거둬들인 영토를 계속해서 황제의 토지로 묶어둔다. 다만, 마계대공들이 '황제를 대신해서 영토를 돌보는 관리인'으로서 각지에 파견된다. 실질적으로 땅을 다스리는 주인은 대공이 되는 것이다.

    “황제에게는 개인적으로 관리인을 임명할 권리가 있지. 구태여 발푸르기스의 밤에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좋소. 설령 일부 마왕들이 반대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을 거요.”

    대공들이 다시 한번 저들끼리 귓속말을 나누었다.

    수군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가라앉은 가운데, 한 명의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뚱뚱한 체격에 머리가 벗겨진 호족의 대공은 울발라지옥을 다스리고 있었다.

    참고로 저 대공은 지난번 무도회에서 나한테 협박을 들었을 때 특히나 불쾌해한 인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투가 공손한 것에 비해서 말의 내용은 제법 공격적이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저희에게 제안해주신 약속에는 담보가 필요해 보입니다.”

    “담보라? 어디 말해보시오.”

    “황제가 독단적으로 영지의 관리를 맡길 수 있다는 얘기는, 뒤집어서 말해, 언제든지 또 다시 독단적으로 관리인을 해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울발라대공의 지적에 다른 자들이 음, 하고 턱을 주억거렸다.

    “전하의 약속은 매력적이나 항구적이지 않습니다.”

    “…….”

    “약속을 일시적인 위안이 아니라 영구한 계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하께서 소신들에게 어떠한 보증을 맡겨주셔야 하옵니다.”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러자 울발라대공이 고개를 반쯤 숙였다.

    “결혼동맹입니다, 전하.”

    결혼. 갑작스럽게 나온 단어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울발라대공이 말을 당당하게 이어나갔다.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아직 공식적으로 부인을 맞이하시거나 첩을 들이신 적이 없는 걸로 아옵니다. 전하. 소신들에게는 마침 장성한 딸아이들이 있습니다. 소신들의 여식을 첩으로 받아주시옵소서.”

    “무슨……!”

    파이몬이 흥분해서 자리를 박차려고 했다. 파이몬의 호감도는 이제 80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고 생뚱맞게 첩을 들이라고 말하면 당연히 분노가 치밀겠지.

    내가 재빨리 파이몬의 손을 잡아서 제지했다. 파이몬이 이쪽을 쳐다보고 눈빛으로 말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파이몬이 흥분을 억누르고 의자에 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한편, 대공들은 한두 명씩 울발라대공에게 합세하고 있었다.

    “피보다 더 진한 동맹을 성사함으로써 전하께서 저희를, 저희가 전하를, 영원하고도 굳건하게 신뢰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전하. 울발라대공의 제안이 실로 적절하다 사려되옵니다.”

    “부디 윤허해주시옵소서, 전하!”

    곧이어 대공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건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대공들은 마치 결혼동맹에 대해 처음 들어본 것처럼 낯빛을 꾸미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아무런 의논 없이 좋다고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미리 대공들 사이에 밀담이 오고 갔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얘기를 꺼냈다.

    내가 물끄러미 독사대공을 쳐다보았다.

    독사대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읍례했다.

    “소신 또한 적절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전하, 윤허해주시옵소서.”

    “…….”

    나에게 첩이 생기면 대공들은 제국의 심장부에 첩자를 심어두는 꼴이었다.

    마계대공의 친딸인 이상, 아무리 내가 최고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녀들을 멋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어엿한 첩으로 대접해줘야 했다. 그러면 그녀들은 '궁중백의 첩'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이런저런 음모를 꾸밀 수가 있었다.

    사자의 심장에 벌레.

    저기서 가장 목소리를 크게 높이고 있는 대공들은 그런 생각을 품고 있겠지. 반면에 나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희생.

    필요에 의한 희생.

    내가 입을 열었다.

    “좋다.”

    “그럴수가…….”

    파이몬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파이몬에게 눈짓으로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라고 신호를 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파이몬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단, 그대들의 여식을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가히 부담스럽소. 열다섯 명이 아니라 일곱 명만을 첩으로 받아들이지. 더불어서 이것은 흥정이 아니라 최후의 조건이오.”

    대공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리고 미리 약속한 것처럼 하인들이 온갖 산해진미를 들고 연회장에 입장했다. 테이블에 빠르게 요리들이 진상되었다.

    대공들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술잔을 들었다. 내가 만마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선창하자 대공들이 “단탈리안 전하 만세! 파이몬 전하 만세!” 하고 외쳐먼서 술잔을 기울였다. 단숨에 연회장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유일하게 그 공기에서 소외된 사람은 파이몬이었다.

    건배가 오가는데도 파이몬은 오른손에 유리잔을 든 채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빛이 어둡고 깊게 가라앉았다. 대공들이 웃고 떠들고 술을 마셨다. 파이몬은 그저 조용하게 술잔을 들고 있기만 했다.

    “……실례하겠어요.”

    파이몬이 탁자에 유리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녀는 드레스 양끝을 쥐어잡고 빠른 발걸음으로 무도회장을 나갔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파이몬은 일어설 때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주연이 퇴장하자 잠시 무도회장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러나 대공들은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함으로써 다시 공기를 북돋았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본인도 잠시 실례하겠네.”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전하.”

    독사대공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파이몬을 뒤쫓아서 무도회장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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