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8화 (398/510)
  • 00398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대공들은 파이몬이 참석한다는 말에 오히려 반색했다.

    내가 혼자서 아무리 절절하게 사과해봤자, 대공들 입장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겠지.

    반면에 파이몬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마인들에게 인기가 드높은 파이몬이 몸소 고개를 숙인다면, 대공들은 체면이 살아났다. 이른바 정치라는 영역이었다.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바르가 파이몬의 시중을 들기로 했고, 데이지가 내 시중을 들기로 했다.

    이바르와 데이지는 겉모습이야 미숙한 여자아이에 불과했지만 전투력으로 따지면 상당했다. 한쪽은 무려 오십 개의 전투인형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인형술사. 다른 한쪽은 바알의 대검으로 무장한 용사였다. 최고의 패라고 해도 좋겠지. 내 신변을 보호하는 데 이들보다 믿음직스러운 경호원이 없었다.

    “단탈리안 님. 저는 아무래도 걱정입니다.”

    다만, 나의 성실한 국무상서만은 염려를 거두지 않았다.

    “작금에 마계는 결코 단탈리안 님께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왜, 설마 대공들이 나를 암살하려 들까봐?”

    “이미 단탈리안 님께서는 한 번 암살될 위험에 처하신 적이 있습니다.”

    라피스가 나에게 망토를 여며주었다.

    “이바르 양과 데이지 양이 유능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가…….”

    “만약의 사태란 없어.”

    내가 라피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계에서 내가 암살당할 뻔했을 때, 나를 대신해서 상처 입은 사람이 바로 라피스였다. 그녀가 감싸준 덕분에 나는 멀쩡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라피스 없이 마계에 가게 되었다…….

    “그때를 제외하고 내가 암살될 위험에 처한 건, 모두 내가 계획해서 스스로 연출한 무대였어. 라피스. 언젠가 내가 죽을지 몰라도 이번만큼은 아니야. 대공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멍청하지.”

    “……요즘.”

    라피스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매사에 정확하고 깔끔한 라피스가 할 말을 도중에 끊는 것은 무척 드물었다. 나는 너그럽게 라피스가 다음에 할 말을 기다렸다.

    라피스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제 모친은 몸을 파는 서큐버스였습니다.”

    “…….”

    “서큐버스 창녀와 어느 이름 모를 인간. 저는 그 둘의 혼혈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보름 만에 모친은 저를 버리고 어디론가 도망쳤고, 저는 마을의 마굿간을 전전하며 자라났습니다.”

    라피스는 단 한번도 나에게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나 또한 과거의 일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우리에게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서로가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라피스가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족은 저를 일종의 저주이자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안 그래도 천대 받는 창녀. 거기에 가장 저열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핏줄을 타고난 것입니다. 불가촉천민이란 저를 말하는 것이었지요. 음식물 찌꺼기로 끼니를 떼우지 않은 날이 없었고, 넝마조각으로 몸을 가리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짐작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창부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인간의 혼혈이라고 들었을 때부터 라피스가 적이 쉽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묻지 않았다.

    라피스가 스스로 얘기하면 얘기하도록 내버려둘지언정, 절대로 내가 먼저 질문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우리 두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었다. 이 관계에서 내 호기심 따위는 지극히 사소했다.

    “어느 날, 마을사람들이 날린 돌에 머리가 맞아서 기절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저는 쓰러진 채로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목이 무척 말랐습니다.”

    라피스가 머리끈을 풀었다.

    양갈래로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풀어졌다. 라피스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동안 머리칼에 가려져 있었던 뒷골을 손가락으로 드러냈다. 그곳에는 명백한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웠습니다. 목덜미 전체에 무엇인가가 들러붙어서 끈적했습니다. 간신히 시냇가까지 기어가서 게걸스럽게 물을 마셨습니다. 문득, 수면에 제 얼굴이 비추었고, 그제야 저의 상반신이 온통 피투성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

    “저는 그날 처음으로 권력을 열망했습니다.”

    라피스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계에서 유일하게 신분을 불문하고 실력만으로 평가하는 집단이 쿤쿠스카 상회였습니다. 물론 상회에서도 암묵적인 차별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상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는 것이 저의 목표였으므로.”

    단탈리안 님, 하고 라피스가 말했다.

    “제가 단탈리안 님을 담당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쿤쿠스카 상회에서는 단탈리안 님을 거진 떨거지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직급이 높은 상인들이 거절하고, 거절하고, 또 거절해서 마침내 밑바닥인 저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마왕한테 서큐버스와 인간의 혼혈인 소녀를 전담으로 붙여주는 것 자체가 대단히 큰 무례였다. 보통 마왕들은 호족(虎族)이나 묘족(猫族)처럼 마계에서 귀족으로 분류되는 종족을 전담원으로 두었다.

    한쪽은 서열 제71위의 떨거지 마왕.

    다른 한쪽은 마계의 불가촉천민인, 서큐버스 창부와 인간의 혼혈.

    더없이 잘 어울리는 한짝이었다.

    “저는 곧바로 전담원 자리를 승락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단탈리안 님께서 훗날 권력을 잡으시면 저 역시 옆에서 호가호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계산적인 접근이었고, 제 출세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나에게 조력자가 라피스 한 명밖에 없었듯이.

    라피스에게도 출세할 기회는 내가 유일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했다. 그 사실을 우리 모두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우리는 군신(君臣)이 아니라 파트너였다. 내가 유독 라피스에게만 모든 것을 양보하는 까닭이 여기 있었다.

    “단탈리안 님께서 미네르바 작전을 고안하여 모든 인간군과 모든 마왕군을 파멸로 몰아넣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혼란의 틈새에서 단탈리안 님께서 권력을 잡으신다면 저 또한 권력에 한층 다가서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아.”

    “단탈리안 님께서 인간의 마을과 도시를 짓밟기로 결정하셨을 때, 학살과 더 많은 학살을 결의하셨을 때, 심지어 자해를 결심하셨을 때, 저는 매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권력으로 향하는 지름길임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단탈리안 님의 공범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것에 대한 공범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단탈리안 님을 위해서 누군가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단탈리안 님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 얼굴 모르는 어미와 이름 모르는 아비를 부모로 둔 라피스 라줄리는, 오직 저의 얼굴과 저의 이름으로 제 삶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라피스는 한점의 거짓 없이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 미약하게 전달되는 그녀의 감정은 오로지 순수하게 진심뿐이었다.

    “라우라 양에게 채찍질을 가하신 이후로, 매일밤 술로 지새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침대 밑에 포도주를 숨기셔도 소용없습니다. 침실의 남서쪽에 바닥을 떼어내고 그 속에 자그마한 술창고를 마련하신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젯밤에 철거했습니다.”

    “하하.”

    나는 유쾌해져서 웃었다.

    “마약을 끊으신 건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이제 술도 끊어주세요.”

    “알겠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혼자서 책임지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아아.”

    “저도, 힘껏 버티겠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죽지 않을게.”

    라피스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부디 다녀오세요, 단탈리안 님.”

    *  *  *

    초로의 노인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제 초라한 거처에 왕림해주셔서 지극한 영광이옵니다, 전하.”

    마계를 다스리는 대공 중에 독사지옥을 다스리는 남자였다. 나와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대공이기도 했다. 허리를 낮게 숙인 대공을 향해서 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일세, 대공. 도대체 몇 년 만에 방문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허허. 세월이 유수와 같아 어느새 오 년이 흘렀습니다.”

    독사대공이 황공하다는 듯 양손으로 공손하게 악수해왔다.

    일전, 나는 바르바토스 몰래 SM 영상을 찍어서 대공들을 협박하는 데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메모리아 영상을 목격한 대공의 숫자가 총 일곱 명이었다.

    이 일곱 명은 전원 지난번의 숙청에서 제외되었다.

    본래 마계대공이 26명. 저번에 깡그리 숙청된 대공이 11명. 이제 15명의 마계대공만이 남았으며, 이중에서 7명은 나와 '무덤에까지 들고가야 할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다. 독사대공은 물론 7명에 속했다.

    “오오, 파이몬 전하!”

    독사대공이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이번에는 더더욱 과장스럽게 환대했다. 내 팔짱을 끼고 있는 파이몬에게 독사대공은 거의 바닥에 키스할 지경까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미천한 종자가 만마의 영광이시요, 약자의 대변인이시자, 모든 명예와 약속의 증인이신 주인 중의 주인을 뵈옵니다.”

    독사대공이 능숙하게 윙크했다.

    “물론, 소신에게 감히 전하의 위명에 하나를 덧붙일 기회를 하사해주시오면, 소신은 '모든 마왕을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을 뵈어서 영광이라고 말하겠나이다.”

    “후후. 성실한 환대에 감사드려요, 대공.”

    파이몬이 살풋 웃었다. 이럴 때 파이몬이 보여주는 눈웃음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결국 대륙은 외지(外地). 비록 황폐할지라도 우리의 고향은 이곳 마계예요. 우리 마왕들이 고향을 떠나서 전전할 동안, 대공은 언제고 마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집을 지켜주었사와요. 대공이 보여준 헌신에 저 파이몬이 개인적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황공, 또 황공하신 말씀이옵니다.”

    파이몬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대공이 무릎을 꿇어 파이몬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여기에서 나와 파이몬 그리고 독사대공 사이에 오간 정치적인 제스처를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 독사대공은 파이몬이 아니라 내게 먼저 인사했다. 이것은 독사대공이 반쯤 공개적으로 '소신에게는 파이몬 전하보다 단탈리안 전하가 우선이십니다'라고 표시한 것이었다.

    두 번째, 그러나 독사대공은 나에게 짧은 인삿말을 건넨 반면에 파이몬한테 긴 인삿말을 건넸다. 나에게는 처음으로 인사하고 파이몬에겐 더 화려하게 인사함으로써, 약간이나마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었다.

    세 번째, 파이몬은 솜씨 좋게도 긴 인삿말에 똑같이 긴 화답을 돌려주었다. 게다가 손등을 내밀어서 키스를 유도했다. 비록 내가 처음으로 인사를 취했으나 극례를 받은 쪽은 파이몬이 되었다. 결국 제3자 입장에서 보자면, 독사대공은 우리 두 명의 마왕을 정확히 동등하게 환영한 것처럼 비추었다.

    “단탈리안 전하. 파이몬 전하.”

    그렇다.

    이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한없이 많은 것들이 배후에서 교환되고, 속닥거리고,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실력을 인정함으로써 우글거린다.

    마왕들이 소수를 제외하고 정치판에 미숙한 것과 달리, 대공들은 근본적으로 정치에 잔뼈가 굵은 자들.

    “소신의 궁전에 어서 오십시오. 다른 대공들이 있는 자리로 안내하겠나이다.”

    이곳이 마계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