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7화 (397/510)
  • 00397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나는 닥치는 대로 몸부림을 쳤다.

    의자를 들어서 다섯 번, 열 번, 수십 번을 내리쳤다.

    방향성 따위는 없었다. 단지 무언가를 내동댕이치는 것에 불과한 동작을 반복했다. 의자는 좋았다. 고급스러운 목재로 만들어져 단단했다. 수백 번을 때려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의자는 스무 번도 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어떤 것이든 간단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내가 손을 내뻗었다. 벽에는 롱소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칼날을 빼어들어서 마구잡이로, 사방에다 휘둘렀다. 생명이 있는 것은 쉽게 죽어버렸다. 생명이 없는 것은 쉽게 망가져버렸다.

    침대가 찢어지고 깃털이 새하얗게 흩날렸다.

    공중에서 깃털이, 너무 많은 깃털이 쏟아져 내렸다.

    땡그랑,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어느새 내 오른손에서 칼자루가 빠졌다. 그와 동시에 내 무릎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가슴과 볼, 손바닥에 깃털이 스쳤다.

    “…….”

    희뿌옇게 깃털에 가려진 시야 저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일렁거렸다. 내가 난동부리기를 멈추자 깃털들은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곳에는 검은색 옷차림에 검은색 머리카락, 우물처럼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데이지가 서 있었다.

    “단 한 마디도. 나한테 단 한 마디도 하지 마라.”

    데이지가 나에게 서서히 걸어왔다.

    나는 바닥에 떨군 검을 다시 꾸욱 잡았다. 헛소리라도 놀리면 데이지의 심장을 찔러버릴 생각이었다. 비이성적인 생각이었지만, 나는 지금 비이성적이었다. 데이지는 이미 용사의 경지에 거의 다다랐지만 나에게 반항할 순 없었다. 어디 아무런 잡담이라도 떠들어봐라. 단칼에 죽여버릴――.

    퐁, 하고 우스운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품안에 술병을 들고 있었다. 포도주병에서 코르크 마개가 따였다. 데이지가 술병을 내 머리 위에 갖다 대더니 거꾸로 쥐어잡았다. 당연하게도, 와인색의 술이 나의 머리에 줄줄 쏟아졌다.

    내 머리카락과 턱선을 따라서 포도주가 흘러내렸다.

    붉은색의 액체가 나의 얼굴을, 옷을, 방바닥을 적셨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하얀 깃털에도 포도주가 스며들었다. 그동안, 데이지는 한없이 무심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술병 하나가 동났다. 데이지는 방 한켠에 마련된 술 저장용 서랍을 열어서 포도주를 한 병 더 가져왔다. 퐁, 하고 코르크 마개가 개봉되는 소리가 울렸고, 또 다시 내 머리로 술이 흘러내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이윽고 열 몇 병이나 되는 술을 전부 비워버린 다음에야 데이지가 멈추었다. 방바닥이 붉은색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머리가 조금 식었는지요, 아버님.”

    “…….”

    “제가 심장각인 수술을 받으면서 흘린 피가 대략 이 정도 양일 것입니다.”

    내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쩌면 웃음이 아니라 그저 허파에서 새어나온 공기였을지도 몰랐다.

    “이것보다 삼분의 일에 불과했다.”

    “아버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열 개로 불리시는 것이 취미인데, 제가 고작 세 배쯤 부풀려서 말했다고 한들 거짓말이 되지는 않겠지요.”

    내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마저 술에 푹 절어 있었다. 그러자 데이지가 하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서 얼굴을 닦으면서, 지나가는 말투로 툭 내뱉었다.

    “더 죽여야겠다. 더 많이 죽여야겠어.”

    머리가 차가워졌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가 명확하게 떠올랐다.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질 정도였다. 보통 때라면 내 계획에 허점이 없는지 라피스와 상담하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상담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것이 명백했다.

    이건 내가 온전히 판단하겠다.

    “데이지. 파이몬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데이지가 한점의 의문을 내비추지 않고 명령에 따랐다. 나는 엉망진창으로 찢어진 침대에 앉아서 파이몬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십 분 정도가 지나고, 파이몬이 내 방에 들어왔다. 마침 잠을 자다가 나왔는지 잠옷 차림이었다.

    “세상에. 단탈리안?”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파이몬이 기겁했다. 가구란 가구는 죄다 부서져 있었고, 바닥에는 도자기 파편과 깃털들, 게다가 술까지 쏟아져 있었다. 놀랄 만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대체 무슨 일이…….”

    “바르바토스가 저를 배신했습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바르바토스가, 저를 배신했어요.”

    “…….”

    파이몬의 눈에는 내가 어떤 표정으로 비추었을까.

    파이몬은 입을 다물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다음, 파이몬이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단탈리안. 바르바토스는 단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에요. 하필이면 우리와 완전히 정반대의 신념을……그 아이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신념을. 예, 바르바토스는 그런 마왕이에요.”

    “파이몬…….”

    “후후. 어쩌면 우리가 한 발자국 물러서야 할지도 몰라요.”

    파이몬이 밝게 말했다. 아마도 애써 밝은 척하는 것이리라.

    노예제 폐지 안건이 통과되지 못해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파이몬 본인이었다. 솔직히 나는 노예제가 폐지되든 말든 별로 상관이 없었다. 파이몬의 신념을 내가 대신 짊어지기로 결심했기에 묵묵히 추진했을 따름이다.

    “인간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어도 괜찮아요. 약간 조건을 완화시켜서 마인 노예만 해방시키자고 다시 의제를 제출하면,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도 분명히 통과될 것이와요.”

    “하지만, 파이몬.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파이몬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마계대공들은 인간 노예를 집중적으로 사서 모을 겁니다. 마인들이 해방될지라도 그만큼 인간들은 나락으로 빠져들겠지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아요. 괜찮을 리 없잖아요.”

    파이몬이 무언가를 꾹 참는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노예제 자체가 멀쩡히 남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

    “소녀는 세상이 절대로 한번에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사와요. 단숨에 바뀌는 것처럼 보여도 그 배후를 살펴보면 수없이 많은 개혁과 수없이 많은 희생이 숨어 있어요.”

    파이몬이 내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우리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쳤다. 파이몬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처연한 미소였다.

    “단탈리안, 우리는 역사를 느긋하게 관찰하는 학자가 아니라 역사를 짊어진 장본인들이잖아요. 한 발자국에 불과할지라도 그 한 발자국은 우리가 움직이는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요…….”

    “대공들을 설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내가 파이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식적으로야 인간 노예를 허용할지라도 비공식적으로는 금지시킬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파이몬. 저는 이제부터 대공들과 단판 승부를 볼 생각입니다. 어차피 마인 노예가 금지되면 대공들의 세력은 순식간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면 됩니다.”

    파이몬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어떤 대가를 말하는 거죠?”

    “저번 숙청에서 거두어들인 여섯 마왕의 영지. 그것을 대공들에게 분배합니다.”

    “……!”

    파이몬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난 숙청에서 제거된 인물은 마왕이 여섯 명, 대공이 열한 명이었다. 본래 여섯 명의 마왕은 당연하지만 대륙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 그들의 영지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반환된 상태였다.

    “하, 하지만, 단탈리안. 그걸 건네주면 대공들이 입는 타격은 상당히 낮아져요. 애당초 대공들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노예제 폐지라는 안건을 꺼내들었는데, 본말전도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사와요.”

    “어차피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이었지, 대공들을 약화시킨다는 건 평원파와 중립파를 설득시키는 데 필요한 명분이었지요.”

    “예. 그러니까 이제 와서 대공들한테 영지를 나눠준다고 하면 다른 마왕들이 반발할 거예요.”

    “비밀로 해두는 겁니다.”

    “…….”

    파이몬이 입술을 닫았다.

    “다른 마왕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주고받는 제안입니다. 만약 대공들이 우리의 제안에 따라 인간 노예까지 포기해준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영지의 감독을 맡겨줍니다. 영주로 임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주의 대리인으로 삼으면 그만이지요.”

    “즉……다른 마왕들을 속이자는 얘기군요.”

    파이몬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눈꺼풀 너머로 진지한 기색이 머물렀다.

    “위험한 거래예요, 단탈리안. 마왕들이 이걸 알고 나면 크게 비난할 게 분명해요.”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우리 두 사람이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뒤, 파이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소녀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앞으로 잠시 동안만 당신의 '신뢰'를 빌리겠습니다, 파이몬.”

    우리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노예제 폐지의 안건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다.

    대공들은 어리둥절했겠지. 나에게 이미 협박을 단단히 받았는지라 틀림없이 안건이 통과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건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싶을 터.

    그런 상황에서 바르바토스와 내가 거세게 대립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렀다.

    ‘최근 들어서 마왕 단탈리안이 마왕군의 권력을 거의 독점했다. 바르바토스는 이러한 단탈리안의 행보에 불만을 표시했고, 결국 두 사람이 부닥치기에 이르렀다…….’ 대충 그런 소문이었다.

    대체로 틀린 소문이었지만 핵심만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바르바토스와 나는 실제로 냉전을 연출했다. 그날 밤에 싸운 이후로 한번도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지 않았다. 마법수정구를 통해서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어쩌다 황궁에서 서로 마주쳐도,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서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 소문에는 꽤나 신빙성이 있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바르바토스가 대놓고 내게 반대표를 던진 것도 맞았고, 우리 둘이 예전과 다르게 냉랭하게 지낸다는 것도 맞았다.

    하지만 마계대공들 입장에서는 덜컥 소문을 믿기 어렵겠지.

    대공들은 나 단탈리안을 지극히 경계했다. 어떤 소문이 흘렀다고 해서 쉽게 믿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불과 반년 전에 대공들이 열 명이 넘게 숙청되지 않았던가?

    “대공들에게 화해의 서신을 보내라.”

    나는 마계대공들을 황궁으로 초대했다. 용건은 단순했다. 지난번에 내가 개인적으로 대공들을 협박한 것에 대해서 사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15명밖에 남지 않은 마계대공들이 나한테 답장을 보내왔다.

    온갖 수식어를 걷어내고 내용만 뽑아내자면 다음과 같았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으나, 황궁에 가지는 못하겠다.’

    대공들은 의심하고 있었다. 이쪽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 아닌가. 저번 신년회처럼 자기네를 불러모은 다음 한꺼번에 없애버리려는 속셈은 아닌가, 하고. 다른 마왕은 믿을 수 있을지 몰라도 단탈리안만큼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대공들의 의견이겠지.

    그때 독사지옥(毒蛇地獄)의 마계대공이 한 가지 제안을 보내왔다.

    ‘만일 합스부르크의 황궁이 아니라 소신의 궁전에서 회합을 개최하신다면, 기꺼이 응하겠나이다.’

    이 제안에 다른 마계대공들도 동의했다. 요컨대 자기들이 대륙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보고 자기네 안마당인 마계로 건너오라는 얘기였다.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진심으로 사과하려면 그 정도 성의는 보여주어야지 않겠느냐'라는 의중이 담겨 있었다.

    몇몇 대공들은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는 흔쾌하게 허락의 메세지를 보냈다.

    내가 사과하는 입장에 처한 만큼 당연히 이쪽에서 수고해야 마땅하며, 마계에 방문하는 것은 마왕이 된 자로서 하등 거리낄 것이 없다면서.

    단, 조건이 붙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파이몬과 함께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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