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6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바르바토스.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했어. 앞으로도 너를 선택할 거야.”
“파이몬 그년을 죽여. 네 손으로 직접.”
바르바토스가 늑대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진지하게 바르바토스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이럴 때 상대방의 말을 반박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바르바토스는 무척 흥분했고, 나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여기서는 일단 순순히 따라주는 제스처를 표시해줄 필요가 있었다…….
“너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파이몬을 죽일게.”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바라는 게 그거니까.”
“왜 하필 지금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너가 나를 설득해야 돼.”
바르바토스가 눈가를 찡그렸다.
“설득? 지금 나한테 설득하라고 말한 거야?”
“파이몬은 산악파의 수장이야. 약간 지지도가 떨어진 면이 없지 않지만 여전히 인망이 있어.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을 아무렇게나 죽일 수는 없다, 바르바토스. 마왕군이 분열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상에야.”
이번에는 내가 바르바토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우리 두 사람은 조금만 더 움직이면 서로 입술이 맞닿을 거리까지 이르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조금 더 잘 보였다. 바르바토스는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오기 전에 술을 마신 것이었다. 코끝으로 허브 향기의 술냄새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내 귀에는 그래서 못 죽이겠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말했잖아. 왜 하필이면 지금 당장 죽여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봐. 마왕군이 하나로 통합된 지 이제 겨우 일 년이 지났다. 우리가 충분히 힘을 비축할 때까지 써먹기 위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외양까지 세웠다. 그걸 다시 흙바닥에 던져서 짓밟자고?”
내가 입 끝을 말아올렸다.
“그게 너의 소원이야? 정말 고상한 취향이로군.”
“입 조심해.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나는――나의 모든 피와 땀을 바쳐서 이 제국을 만들었어!”
이쪽의 멱살을 쥔 바르바토스의 손을 이번에는 내가 오른손으로 강하게 잡았다. 바르바토스, 누군가를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너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옛날부터 대등한 관계였다.
“이천 년 동안 병력을 땅바닥에 내던진 월맹군 원정을 누가 처음으로 성공시켰냐. 나다! 삼천 년 동안 마왕군을 기만한 바알을 처단하는 데 누가 앞장섰냐. 바로 나다! 우리의 성공을 일시적인 기적으로 끝내버리지 않고 영구적인 역사로 남기도록 누가 제국이라는 체계를 성립시켰냐. 나다, 바르바토스! 대지에 흩뿌려진 핏물 중에 내 손에서 비롯하지 않은 핏물이 없고, 하늘을 메운 비명 중에 내 칼날에서 비롯하지 않은 비명이 없다!”
나는 바르바토스의 손을 멱살에서 떼어냈다.
“너가 파이몬과 둘이서 시답잖은 파벌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평원파와 산악파가 지금 공존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빌어먹을 네 년들이랑 내가 동시에 사귀고 있으니까!”
찰싹, 하고 바르바토스가 내 뺨을 후려쳤다. 나는 고개가 돌아갔지만 즉시 곧바로 시선을 제자리로 돌렸다. 때릴 테면 얼마든지 때리라고 해봐라. 차라리 검이라도 꺼내들어서 내 심장을 찌르라지. 그래도 내 입을 막을 수는 없다.
“아아, 그래. 내가 너희 둘이랑 떡을 치고 있어서 제국은 유지되고 있는 거다. 이게 진실이야. 왜, 언제부터 진실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워지기라도 했냐, 바르바토스? 반년 동안 보지 못한 사이에 아주 겁쟁이가 되셨군.”
“개 같은 새끼……!”
“그리고 넌 그 개새끼를 개새끼라는 이유로 좋아한 녀석이지.”
바르바토스가 또 다시 내 뺨을 때렸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입안에서 어딘가가 터졌는지 혓바닥에서 비린 피맛이 느껴질 뿐이었다. 마침 잘 됐다. 내 입구멍에서 피냄새가 흘러나오면 바르바토스도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겠지.
“내가 괜히 벨레드 형님을 의형으로 모신 줄 알아? 내가 할 일 없어서 시트리를 애인으로 삼은 줄 알고 있냐? 평원파에서 가장 성질 더러운 남자랑 산악파에서 제일 다혈질인 여자가 정말로 '우연하게' 나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바르바토스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예상하고 있었다. 삼세 번이라는 말도 있다마는, 난 똑같은 짓을 세 번이나 당하는 호구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얌전히 맞아줄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었다.
나는 왼손으로 바르바토스의 팔목을 붙잡았다. 이제 바르바토스는 내게 양손이 붙잡힌 셈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발버둥을 치자, 우리 둘은 균형을 잃었다. 나는 여전히 바르바토스의 양쪽 팔목을 쥐어잡은 채로, 그녀를 방바닥에 넘어트렸다.
“나는 내 온몸과 마음을 버려가면서 파벌들을 조율하고 있다!”
바르바토스에게 올라타서 소리쳤다.
“나의 우정을, 나의 헌신을, 나의 애정을, 진심이란 진심은 모두 쏟아부었어! 아아, 덕분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저열한 남창이 되었지! 기분이 끝내주더군. 하지만 무슨 상관이냐. 나의 사소한 감정 따위는 포도주 한잔으로 때우면 될 만큼 시시한 일이다!”
파이몬도 그렇고, 바르바토스 너도 그렇고, 전부 지나치게 감정에 휘둘린다.
알고 있다. 감정은 때때로 강렬해진다. 그 강렬함 덕분에 감정은 진심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진심과 진실은 전혀 다르다!
네가 진심으로 지껄인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어주진 않는다! 네가 파이몬을 없애버리라고 아무리 소리쳐봤자, 그것이 파이몬을 없애도 된다는 걸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왜 이런 가장 단순한 사실조차 너희는 외면하는 것이냐.
사람의 감정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질투라느니 원한이라느니, 그까짓 감정으로 제국을 무너트려도 괜찮은 것이냐! 겨우 하나가 된 마왕군을 다시 갈갈이 찢어놓으라니――정말 제정신으로 말하는 거냐, 바르바토스!
“그런데 이제 와서 너는 내 손으로 직접 제국을 무너트리라고 말하고 있지. 좋아, 바르바토스. 나는 너한테 언제나 영원히 너를 우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네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나는 기쁘게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내가 이를 꽉 물었다.
“적어도, 너가 나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은 이미 목소리보다 신음에 가까웠다. 나는 나의 목소리를 씹고 또 씹어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가 만든 제국을 너가 기어코 짓밟겠다면, 좋아. 내가 흘린 피와 땀을 전부 쓸모없는 것으로 되돌리겠다면, 그것도 좋아. 하지만 최소한 나를 설득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거냐, 바르바토스……?”
그때 바르바토스의 눈언저리에서 무언가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괴로워, 단탈리안.”
“…….”
“나, 알고 있어. 바타비아에서 너가 암살까지 당해가면서 공화주의 회의니 뭐니 성공시키려고 한 것도 다 파이몬 때문이잖아. 결국 파이몬 때문에 죽을 뻔한 거잖아.”
바르바토스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얼굴이 엉망이 된 것은, 월맹군 시절 파이몬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여 뛰쳐나간 그날, 장대비가 하염없이 내린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 네 목숨을 위협한 것도 파이몬이야. 월맹군에서 널 나락으로 끌고간 장본인도 파이몬이야. 그리고 저번 겨울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됐어…….”
“바르바토스.”
“내가 파이몬한테 죽는 건 괜찮아. 응, 그것까진 용납할 수 있어. 하지만 너가……단탈리안, 너가 만약에 파이몬 때문에 죽는다면……난 정말로 모든 걸 저주할 거야.”
“…….”
“그럴 수는 없어. 그건 안 된다고, 나쁜 새끼야…….”
바르바토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흐려졌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만약 너가 죽는다면 틀림없이 파이몬 때문이야. 난 더 이상 그년 얼굴도 보기 싫어……제발 파이몬을 죽여줘.”
“나는 죽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
바르바토스가 소리 질렀다.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딛었어도 넌 그때 죽었어! 거짓말 따위로 날 안심시키려고 하지 마!”
사면초가.
바르바토스는 그때의 암살이 자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비밀로 해두었으니까.
만약 내가 여기서 그게 자작극이었다고 밝힐지라도, 바르바토스는 결국에 납득하지 못하겠지. 왜 그런 자작극을 벌였냐고 물어볼 것이다. 그럼 나는 파이몬을 위해서 암살을 연출했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토스에게 거짓말을 하면 간단히 해결될지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바르바토스한테 거짓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파이몬에게 연기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이바르도 거짓으로 속여도 괜찮았다. 하지만 바르바토스와 라피스만큼은. 두 사람한테는…….
도대체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내가 무엇을 해낼 수나 있었겠는가.
두 사람을 속이는 일은 나에게 불가능했다. 그저 단순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이몬이 너를 파멸시킬 거야, 단탈리안! 나는 알 수 있어. 알고 있다고……네가 파이몬을 죽이지 않겠다면 내가 그년을 죽이겠어!”
“안 돼, 바르바토스. 제국을……우리의 새로운 마왕군을 생각해라.”
나는 목구멍에서 치밀어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러나 참지 못한 여분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우리의 미래를……바알도 죽었고, 아가레스도 죽었어. 산악파가 협력해주지 않으면 대륙 정벌은 불가능해. 냉철하게……냉정하게 생각하는 거다.”
“그 미래에 네가 없으면 무슨 의미인데?”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는 너가 대륙 전체만큼이나 소중해, 단탈리안. 빌어먹을 얘기지만 그렇게 되어버렸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나는……나한테 아무리 패업이 중요해도, 그만큼 너도 중요해……어느 한 쪽만 선택할 수가 없어…….”
“…….”
“백 년 뒤에 대륙을 정벌하지 못해도 좋아. 이백 년 뒤에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도 좋아. 천 년이 걸리더라도, 이천 년이 걸리더라도, 삼천 년이 걸리더라도……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내 옆에 있어줘……나를 더 이상 혼자로 내버려두지 마…….”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고개를 들어 나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바르바토스의 눈 밑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내 눈가에서 넘쳐서 새어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바르바토스의 새하얀 볼을 따라서 마저 흘러내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만약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이미 잘못된 것을 어디서부터 숨기려 들었을까, 라고 고쳐서 물어야 하겠지.
누가 먼저 입술을 뗐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뒤로 물러섰을지도 몰랐고, 어쩌면 바르바토스가 그만두었을지도 몰랐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이다.
우리 둘 모두 얼굴이 망가져 있었다. 내 표정이 통제력에서 벗어났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이 방안에는 합스부르크의 궁중백도, 제국의 섭정도 없었다. 물기에 젖어버린 사람이 두 명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
내가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만 참을 수 없어져서 방을 박차고 나갔다. 이미 시간이 늦어질 대로 늦어져서 황궁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복도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만이 반박자 느리게 나의 그림자를 따라왔다.
내가 머무르는 침실의 문앞에는 데이지가 조용히 서 있었다. 이쪽의 발걸음이 다가가는 것을 들었는지 데이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버님, 어서……?”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내 얼굴을 바라보자 데이지는 말을 끊었다. 아니, 말이 끊어졌다고 표현해야 더 적절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데이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세심하게 바라볼 이유도 하나 없었다. 데이지를 무시하고 침실문을 열어재낀 뒤, 무작정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방에 놓인 물병을 집어들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그걸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