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95 방울져 떨어지는 밤 =========================================================================
“그럼 다음 의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내가 무덤덤하게 곧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똥 씹은 표정이라든지 불쾌한 낯빛을 보여주면 절대로 안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재빨리 넘겨야만 했다.
내가 당황하면 당황할수록 마왕들은 이쪽의 지도부가 분열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분열하는 집단의 지도부만큼 무능하게 보이는 지도부는 없다. 지도부는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얼굴에 가면을 써야 한다.
“…….”
안타깝게도 파이몬은 그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파이몬이 눈동자에서 아주 용암을 발산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채찍으로 쳐죽일 기세로 바르바토스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반면에 바르바토스는 입가를 씰룩거리면서 ‘왜, 꼽냐?’ 하고 파이몬을 쳐다보았다.
“……오늘 발푸르기스의 밤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동지 여러분, 모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결국 그날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공기가 어수선했다. 마왕들이 일어서서 삼삼오오 모여 퇴궐하기 시작했다. 말소리는 정확하게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들이 무슨 주제로 속닥거리는지 정도는 훤하게 보였다. 제기랄.
나는 바싸고에게 눈짓을 주고 대전(大殿)에서 나갔다.
먼저 복도에 나가서 분을 삭이고 있자, 바싸고가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바싸고를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저의가 무엇입니까?”
“바르바토스가 어젯밤 나를 찾아와서 반대표를 던지라고 언질했다.”
바싸고가 복도벽에 기대어서 담뱃대를 꺼내들었다. 본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양반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나를 따라서 담배에 취미를 붙였다. 후우, 하고 바싸고가 연기를 흘려보냈다.
“나는 네놈이 바르바토스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했는 줄 알았지. 하지만 이렇게 나를 따로 불러내는 것을 보아하니, 네놈은 완전히 모르는 일이었군. 어떤가, 우리의 위대하신 단탈리안 전하? 신뢰하던 애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바싸고가 비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일부러 바르바토스에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습니까.”
회의 초반에 바싸고는 바르바토스에게 대적했다. 덕택에 두 마왕은 서로 같은 편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변에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바싸고가 반대표를 던진 까닭은 단지 노예제의 '전면' 폐지에 반대하기 때문. 즉, 마족뿐만이 아니라 인간종 노예까지 해방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겠지.
바싸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바토스가 나한테 각본을 쥐어주었다. 처음에는 반대하라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인간종 노예에 대한 화두를 던지겠다면서?”
“아아.”
우리는 벽에 기댄 채로 조용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 둘 다 상대방이 아니라 단지 눈앞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구태여 몸짓이나 눈짓을 동원해서 서로를 협박할 필요가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바싸고. 당신은 지금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렇게 된 모양이로군.”
“저는 항상 당신에게 직접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당당하게. 면전에서. 아무리 바르바토스가 저의 애인이라 할지라도, 제가 바르바토스를 '시켜서' 당신한테 말을 전달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이를 갈았다.
“바르바토스는 제 전령이 아니고, 당신도 제 부하가 아닙니다. 제가 애인한테 의사를 대신 전달시킬 만큼 게으른 사람으로 보였습니까? 제가 그 정도로 당신을 존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까?”
“내 잘못을 인정한다.”
바싸고가 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목소리에 약간 분노가 실려 있었다.
“알다시피 네놈은 빌어처먹을 정도로 오만방자하고 교만한 애송이 아니냐. 바르바토스를 전령으로 삼아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가벼이 넘겼다.”
“그렇다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저한테 얘기를――.”
“하지만 네놈도 잘못한 것이야, 단탈리안.”
내가 고개를 돌려서 바싸고를 바라보았다. 바싸고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네놈이 바르바토스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네놈은 공공연하게 바르바토스와의 관계를 과시하고 다녔어.”
“…….”
“행여나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꼴 보기 싫게 여기저기서 시시덕거리면서 온 세상을 지들 안방인 마냥 활보하던 꼬락서니 하고는. 흥, 이래서 사랑 따위에 생명을 거는 놈들은 언제고 큰코다치는 것이지.”
내가 묵묵하게 시선을 되돌려서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의 지적에 수긍한다는 의미였다.
“……저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바르바토스가 저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이럴 줄은.”
적막.
나는 품속에서 담뱃대를 꺼내었다. 그때, 바싸고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담뱃대에서 저절로 피시식 불꽃이 미약하게 일어났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담뱃대를 뻐끔거렸다.
“내가 네놈을 위로해줄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네놈은 상종하지 못할 개자식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 녀석이 약해지면 내가 곤란하다. 빌어먹을 놈, 나는 내 정치적 생명을 네놈한테 모조리 내걸었다는 말이다. 아가레스를 토벌하느라 정령왕을 세 개체나 잃었다. 수천 년이 넘도록 공을 들인 정령왕을 세 개체씩이나 상실했다는 말이다.”
바싸고가 퉷,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애송이. 내 앞에서 약한 모습 따위 보이지 마라.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다. 세상에 위안이 필요할지언정 네놈만큼은 절대로 위안의 수혜자가 아니다. 정말 기분이 더럽군…….”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바싸고는 더더욱 화내겠지. 나는 침묵하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를 알지 못했다. 화제를 바꾸는 수밖에.
“하지만 이상합니다. 바르바토스는 왜 당신을 끌어들인 것일까요.”
“흠?”
“어차피 저한테 바로 들킬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굳이 당신을 끌어들였지요. 분명히 다른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물끄러미 허공을 보았다.
“만약에 바르바토스가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고 해보지요. 이 경우에는 평원파가 단독으로 반기를 든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싸고, 당신까지 반대표에 섞이면…….”
“각자가 자기 신념에 따라 투표한 것처럼 비추겠지. 과연. 그것을 노렸는가.”
바싸고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턱을 주억거렸다.
“예. 바르바토스는 저에게 반대표를 던지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저와 아주 척을 진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습니다. 당신을 끌어들인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습니다.”
“졸지에 나도 모르게 부부싸움에 이용된 꼴이로군. 빌어먹을 것들.”
이제 의문은 하나가 남았다.
바르바토스는 왜 나에게 반대표를 던졌는가.
이에 대한 의견을 바싸고가 내놓았다.
“허면 네놈한테 불만을 표시한 것 아니겠느냐? 네놈이 하도 마음대로 제국을 쥐락펴락하니 바르바토스 입장에서야 셈이 날 만하지.”
“……바르바토스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불만을 표시할 리 없지 않습니까. 불만 따위야 저한테 직접 말해도 됩니다.”
“흥, 녀석은 어린애가 맞다.”
바싸고가 벽에서 등을 떼었다.
“외견도 속마음도 풋풋하지. 자기 부하들을 살리겠답시고 검을 버리고 흑마법사가 된 놈이다. 그런 녀석이 어린애가 아니라면 뭐겠느냐. 어디 애송이와 어린애끼리 열심히 부부싸움을 벌여봐라. 나는 시시해서 도저히 같이 놀아주지 못하겠으니.”
바싸고는 그 말만 남기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
나는 복도에 남아서 담배를 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한동안 서성거리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바르바토스가 머무르는 침실로.
* * *
바르바토스의 침실이 위치한 복도에는 경비병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죽음의 기사들이 투명한 영체가 되어서 이곳을 물 샐 틈 없이 지키기 때문이었다. 내가 복도를 걸어오자 죽음의 기사들이 차갑게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구제할 도리가 없는 로리타 콤플렉스 놈들.
흑기사들이 노려보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노크도 생략하고 바르바토스의 침실문을 열어젖혔다. 어떤 죽음의 기사도 나를 말리지 못했다.
방안은 어두웠다.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어둑어둑한 그곳에서, 바르바토스는 창가에 걸터 앉아서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흥얼거렸다.
“의외로 늦게 왔네.”
“충격이 컸거든. 나 혼자서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지.”
나는 방안에 있는 아무 의자에나 앉았다.
“바르바토스. 너는 나를 배신했어.”
“알아.”
“배신이라니. 우리 둘 사이에 배신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어.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바르바토스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야? 단탈리안. 네가 멍청한 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머리가 병신인 줄은 몰랐는데.”
“나는, 너한테, 직접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내가 나지막하게 끊어서 말했다.
나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에 노기가 넘쳐 흘렀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서로한테 자신의 생각을 숨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군.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비겁하게 굴지 마, 바르바토스.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떠넘기지 말고 네가 직접 그 빌어먹을 말을 입에 담아! 네가 책임을 져라!”
“비겁한 건 네 자식이야.”
바르바토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바르바토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이번 법안, 파이몬 년을 위해서 내놓은 거지?”
“…….”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갈 것 같았어? 마계대공은 핑계거리에 불과하고 사실은 파이몬 년 때문에 벌이는 짓거리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냐고.”
바르바토스가 이빨을 까득 물었다.
“마왕은 절대적이어야 한다느니……대공들한테 응징이 뭔지 보여주어야 한다느니……전부 핑곗거리야. 네가 거짓말로 진열해놓은 말재변에 내가 속아서 옳다구나 동의할 줄 알았으면, 단탈리안. 정말 나를 우스운 년으로 본 거야.”
“바르바토스.”
내가 괴롭게 중얼거렸다.
“대공들한테 응징할 필요가 있는 건 사실이다.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하. 그럼 왜 인간종까지 노예로 두면 안 된다고 주장한 건데? 그것도 네가 지껄인 대로 필수불가결한 조치여서?”
“…….”
바르바토스가 창가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나한테로 다가오더니 나의 멱살을 꾸욱 잡았다.
“처음부터 이번 안건에 대해 듣고 눈치 깠어. 네가 파이몬 년을 위해서 움직이려 하고 있다는 걸. 만약 처음부터 나한테 솔직하게 사실을 밝혔으면 그래, 한번쯤 눈 감고 넘어가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는 사실을 숨겼어. 그리고 그럴듯한 헛소리로 넘어가려고 했지……!”
바르바토스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누가 먼저 우리 관계를 배신했는데? 응? 누가 먼저 서로한테 자기 생각을 숨겼는데? 내가 제일이라고, 행여라도 파이몬을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일은 없을 거라고 수십 번이나 말했으면서!”
개 같은 자식, 하고 바르바토스가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잘 들어. 나는 더 이상 네가 파이몬이랑 놀아나는 걸 지켜보지 못하겠어. 애당초 나랑 파이몬을 동시에 따먹으려고 든 네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선택해. 나를 고르든지, 파이몬 그년을 고르든지. 여기서 당장 말해……!”
바르바토스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입술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