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4화 (394/510)
  • 00394 방울져 떨어지는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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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스부르크의 황궁. 이제는 거진 마왕들의 전용 회의장이 된 장소였다.

    제일 상석에 황제 폐하. 우리의 친애하는 루돌프 폐하께서 근엄하고도 엄숙하게 앉아 계셨다. 좌우 제1석에는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제국에서 서열이 높은 순서대로 이어졌다.

    참고로 나는 법무상(法務相)으로서 황제의 바로 왼편에 섰다.

    황제를 대신해서 회의를 주관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내가 유독 눈에 띄어서 싫어하는 마왕도 있지만 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권력이란 본래 이런 행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느냐에 따라 드러났다. 나에게 권력이 제일 많은데 어쩌겠는가?

    “노예를 해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마왕 아미가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회의에서는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일수록 송사리 바람잡이였다. 아미로 말하자면 옛날에 검은 산맥을 돌파할 적에 나와 함께 활동한 마왕이었는데, 내가 제국의 권력자가 되는 동안 저 녀석은 쓸데없이 허송세월이나 했다.

    “노예제는 가장 중요한 제도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제일 거대한 분야에는 노예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내가 다른 마왕들을 대신해서 질문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미가 움찔거렸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미는 나를 두려워했다. 아마 내가 언젠가 자신을 숙청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피해망상증 환자 같으니, 쯔쯧.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욕망은 언제나 가장 저열하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자리에서 더러운 얘기를 꺼내서 죄송합니다, 동지 여러분.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처럼 선천적으로 고결한 마왕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매일마다 배변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배변물을 치워야 합니다!”

    아미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열변을 토해냈다.

    “우리 문명 사회에는 언제나 배변물이 넘쳐 납니다. 노예는 바로 이 필수불가결한 작업에 동원되는 필수불가결한 인력입니다! 노예제에 대한 공격은 문명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헤에. 자기 똥은 자기가 치워야지, 무슨 헛소리야.”

    가미긴이 웃었다.

    “다른 사람한테 밑구멍을 닦아달라고 부탁하는 놈은 두 종류밖에 없는걸. 불행한 장애인이거나, 아니면 무진장 게으른 부자뿐이야. 네가 말하는 문명이란 것이 누구를 위한 문명인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

    아미가 입을 다물었다. 서열이 한참 낮은 아미로서는 감히 가미긴에게 반박할 배짱이 없었겠지. 그러니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네가 애송이로 남는 것이다. 아미는 평원파였으며, 모든 평원파의 뒤를 바르바토스가 봐주고 있었다. 대체 뭐가 두려운지, 원.

    “아아. 괜히 우리 애들 가지고 놀지 말고.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보자고.”

    바르바토스가 귀찮아하는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거 봐라. 바르바토스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자기 파벌의 부하는 철저하게 챙겨주었다.

    “억울하게 노예가 된 애들을 풀어주자. 이건 좋다 이거야. 하지만 결투에 의해서 노예가 된 경우라든지, 전쟁에서 패배해서 노예로 전락한 경우라든지, 이런 거에는 예외를 둬야 할 거 아냐? 전부 다 풀어주면 뭐 어쩌자는 거야. 우리가 무슨 자선가도 아니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평등해요.”

    바르바토스가 나서자 이번에는 파이몬이 치고 나왔다.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노려보았다.

    “만인이 태어날 때 이미 똑같은 권리를 부여받지요. 그건 바로 모두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거예요. 하지만 노예는…….”

    “시발, 빌어먹을. 진짜 네 년의 입구멍에서 먹물 냄새가 풍기지 않는 날이 도래하는 것만이 내 평생 소원이야.”

    바르바토스가 으르렁거렸다.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다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당하면 안 된다고? 여기가 무슨 도덕 수업을 가르치는 신전이야, 뭐야? 그 소중하다던 목숨을 전쟁터에서 수십만은 죽여버린 게 네 년이고 우리야.”

    “전쟁과 노예는…….”

    “똑같아.”

    바르바토스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왜 전쟁터에서 적군을 쳐죽이는데?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우리가 죽이지 않으면 빌어먹을 적병이 우리를 죽이니까. 그거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사람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딴 놈들 목숨을 취해버릴 수 있다고.”

    바르바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목소리를 키웠다.

    “오직 피 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만 전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삶 자체가 전쟁이고, 매일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기꺼이 타인의 목숨을 거둬들인다. 만일 노예가 우리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우리는 노예제를 받아들이지.”

    “무척 인상적인 철학이다, 바르바토스.”

    바싸고가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에 빈정거리는 말투가 잔뜩 배어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은 단 한 번도 철학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어. 바르바토스. 문제는 노예제를 사용해서 마계대공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놈들은 노예를 수천 명씩 부리면서 자기네가 마왕이라도 된 것처럼 잔뜩 멋을 부리고 있어. 본인은 마계대공들을 압박하는 전술적 용도로써 노예제 폐지를 찬성한다.”

    “중립파도 이에 동의한다.”

    마르바스가 이어서 발언했다.

    “마왕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우리 마왕들에게 있어서 마족들은 원래부터 노예인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마계에서는 노예가 다시 노예를 부리는, 매우 기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왜 우리가 '마족의 주인'으로서 마왕 이외에 또 다른 존재를 인정해야 하겠는가?”

    마왕들이 웅성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는 마왕이 다수 있었다.

    파이몬처럼 권리에 기반해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할 때는 대다수가 코웃음을 흘렸지만, 바싸고와 마르바스가 실리를 따지자 서서히 설득되는 분위기였다. 파이몬이 분한 듯이 입술을 꾸욱 물었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파이몬의 심정이야 이해된다마는 이건 당연한 광경이었다.

    “좋아. 너희 말이 맞다고 하지.”

    바르바토스가 씨익 웃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마족들 사이에서는 노예제를 철폐한다고 해보자고. 그래. 하지만 인간종의 경우에는 어때. 인간종까지 노예로 삼으면 안 되는 건가?”

    마왕들이 수군거렸다. “인간종은 얘기가 다르다”, “어차피 마계에도 인간 노예는 별로 없으니 예외로 남겨도 괜찮지 않은가” 등등, 대체로 바르바토스의 말에 수긍했다. 마왕들은 대개 인간종에 적대적이었으므로 이 역시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등한 인간종한테 자유를 건네줄 필요까지는 없겠지.”

    “중립파도 마찬가지이다. 보다 다른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겠지.”

    마르바스가 한 걸음 물러서서 유보를 표시했다. 아마 대륙의 외교적인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

    그 와중에 파이몬만이 자신의 무릎을 꾹 쥐고 있었다.

    바르바토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바르바토스는 파이몬의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죽거렸다.

    “동지 여러분의 의견이 곧 나의 의견이야. 인간종은 어디까지나 예외이지. 하지만 우리 중에는 꼭 첩자가 한 명 숨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지. 구태여 마족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성적 존재자'처럼 겉멋이 든 용어를 쓰는 여자가 있거든.”

    “…….”

    “어이, 파이몬. 내가 질문하지. 인간종에 대해서도 노예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냐?”

    좌중의 시선이 파이몬에게 쏠렸다.

    파이몬은 한없이 차가운 눈동자로 바르바토스를 쏘아봤다.

    “예. 소녀는 인간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배신자다!”

    평원파 마왕 중 엘리고스가 일어서서 삿대질을 했다. 그걸 기점으로 평원파 마왕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월맹군의 이상을 져버린 창녀!”

    “인간놈들에게 가랭이를 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그러자 산악파 마왕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황궁은 순식간에 노성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저 개 같은 새끼, 파이몬 언니한테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네 모가지가 따여도 혓바닥을 놀릴 수 있는지 시험해주겠어!”

    “너희 평원파야말로 저기 황제인지 뭐니 웃기지도 않은 병신한테 가랑이를 벌린 주제에 어디서 까불고 있는가! 매일 밤마다 황제한테 따먹히는 년은 바로 바르바토스이지 않는가!”

    “이놈들이 아주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아가리를 벌려대는군.”

    하아.

    내가 한숨을 쉬었다. 어째 회의를 열 때마다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내가 지긋지긋하다는 눈초리로 마르바스를 쳐다보자, 마르바스도 똑같이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마르바스 님. 저 발정난 개들을 말려주시지요.’

    ‘본인이 무슨 보모도 아니고 만날 저 녀석들 말리는 데 시간을 낭비해야겠는가?’

    ‘마르바스 님 말고 누가 천치들을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자네가 하게. 본인은 솔직히 자네 애인들 때문에 위장이 남아도는 날이 없네.’

    ……대충 이와 같은 대화가 암묵적으로 지나갔다.

    나는 재차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제국에 없는 동안 국정을 도맡다시피 돌본 사람이 마르바스였다. 빚을 졌다고 표현하면 우습겠으나, 어찌되었든 일처리를 넘겨버린 셈이었다. 여기서는 내가 나설 수밖에…….

    내가 입술을 열었다.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나의 한 마디에 가장 먼저 시트리가 입을 다물었다.

    다음에는 바싸고가, 가미긴이, 파이몬이, 바르바토스가 입을 닫았다. 제파르 형님과 벨레드 형님이 자리에 앉았다.

    서열이 높은 마왕과 과격한 무투파 마왕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나머지 잔챙이 마왕들도 서서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언성이 잦아들자, 몇몇 마왕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곧 분위기를 파악하고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30초 만에 궁전이 조용해졌다.

    “여러분께서도 아실 겁니다. 그동안 마계대공들은 대마왕 바알에게 협력하여서 월맹군이 의도적으로 실패하도록 도왔습니다. 아직 우리가 평원파와 산악파, 중립파로 갈라지기 이전부터 대공들은 우리를 속였습니다.”

    내가 마왕들과 한 사람씩 눈을 마주쳤다.

    “대공은 우리의 적입니다.”

    마왕들은 파벌을 불문하고 자존심이 하나같이 강했다.

    “저는 대공과 같은 존재가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은 하나뿐입니다. 우리 마왕을 제외하고 다른 마족들이 권력과 부를 충족시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째로 설득하기 위해서는 신념도, 이익도 아니라 자존심을 활용해야 했다.

    “주제도 모르고 우리들에게 덤빈 대공들한테 본때를 보여줍시다.”

    “…….”

    “물론 여전히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 개들이 있을 것입니다. 노예를 전부 해방하라 명령해도 불응하겠지요. 하다못해 인간종 노예라도 인정해달라고 징징거리는 놈들도 틀림없이 나옵니다. 만일 우리가 고블린을 예외로 둔다면 대공들은 즉시 사방에서 고블린을 긁어모을 것이요, 만일 인간종을 예외로 둔다면 인간종을 긁어모을 것입니다.”

    내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적들에게는 어떠한 예외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한 복종을.

    처절한 응징을.

    “오로지 우리 마왕만이 세상을 지배할 권리가 있습니다.”

    직후, 노예제 전면 폐지에 대한 투표가 이루어졌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는 모든 의제가 투표에 의해서 정해졌다. 다만 모두가 투표권을 가지지는 않았다. 선제후로 선발된 일곱 명만이 투표에 참여했다. 즉, 궁중백인 나는 투표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리고 만장일치가 이루어져야만 정책이 통과했다.

    내가 황제를 대신해서 일곱 명의 선제후 마왕에게 표를 받았다. 비밀투표나 무기명투표 따위는 없었다. 각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채로 투표했다.

    “투표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마르바스, 폐지 찬성.”

    “음.”

    마르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에게 뜻 깊은 눈길을 보내왔다.

    “가미긴, 폐지 찬성. 시트리, 폐지 찬성.”

    마왕들이 조용히 수군거렸다. 이번에도 만장일치로 통과할 모양이라고 얘기가 오갔다.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논의될 만한 의제는 사실 회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기 이전에 어느 정도 합의가 오갔다. 이번에도 그랬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얼굴을 굳혔다.

    “……바싸고. 폐지 반대.”

    좌중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강해졌다.

    바싸고가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로 계속해서 투표 결과를 읊어나갔다.

    “제파르, 폐지 반대. 파이몬, 폐지 찬성.”

    나는 마지막으로 바르바토스를 쳐다보았다.

    바르바토스가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바르바토스, 폐지 반대.”

    황궁이 더더욱 어수선해졌다.

    내가 찬성을 표시한 안건에 대해서 바르바토스와 제파르 형님이 반대표를 던졌다. 우리 세 명은 언제나 의견이 일치했다. 바싸고 또한 마찬가지였다.

    “……찬성 4표, 반대 3표로 노예제 전면 폐지에 대한 안건이 부결되었음을 알립니다.”

    처음으로.

    우리의 의견이 갈려진 채로 의제가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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