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3화 (393/510)

00393 방울져 떨어지는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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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밤, 황궁에서는 승전을 축하하는 기념 무도회가 열렸다.

인간들은 이번 전쟁을 해석할 때 라우라 데 파르네세한테 초점을 맞추었다. 황제의 대리장군이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 이것이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반면에 마족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의외로, 마족들이 주목한 부분은 바로 헬베티카 연방이었다.

여태까지 마왕군은 연이어서 실패만을 반복했다. 이백 년 전, 마왕군이 대륙을 토벌할 의지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엘프와 난쟁이 같은 아인종들은 과감하게 마왕군을 버렸다. 더 이상 자신들은 월맹군에 참전하지 않겠다며 영구중립을 선언함으로써…….

헬베티카 연방은 그런 아인종들이 모여든 국가였다. 즉, 여타 마족들 입장에서 헬베티카 연방은 비겁하고 저열한 배신자 집단에 불과했다.

그리고 헬베티카 연방은 다시금 마왕군에 복종하겠노라고 서약했다. 연방은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에서 '마왕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이제 헬베티카 연방은 충성심을 증명했다. 한때 사분오열되었던 마족이 다시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마족들은 이렇게 이번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해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년 봄. 서열 제1위의 마왕 바알이 척살되었다.

작년 가을. 서열 제2위의 마왕 아가레스가 처형당했다.

올해 봄. 세 명의 마왕과 열한 명의 마계대공이 숙청되었다.

올해 가을. 신생 마왕군에 헬베티카 연방이 복종했다.

고작 2년 만에 거대한 사건들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틀림없이 어떤 격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은 시대의 격류였고, 철저하게 계획되어 진행된 연극이었으며, 피하거나 숨지 않는 이상 결코 피해갈 수 없는 화살이었다.

신생 마왕군은 명백하게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그 배후에 누가 숨었는지 대부분의 마족은 몰랐다. 마족들은 그저 예전과 마찬가지로 영원불멸하는 군대의 바르바토스에게, 고결하고 아름다운 파이몬에게, 공정한 마르바스에게 열광하였다…….

하지만 극소수의 마족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계의 대공은 이 극소수에 들어갔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인이 미처 전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였나이다.”

“괜찮다. 과인은 그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노라.”

“하오면, 미천한 소인에게 다시 한 번만 말씀을 들려주시오면…….”

마계에서 울발라지옥(嗢鉢羅地獄)을 다스리는 대공이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대공의 눈앞에는 마왕 단탈리안이 앉아 있었다. 단탈리안은 포도주를 홀짝이고 느긋하게 대공을 바라보았다.

“과인은 빠른 시일 안에 귀공의 영토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라고 말했다.”

“저, 전하…….”

울발라 대공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쉴 새 없이 닦았다. 체격이 뚱뚱한 대공은 안 그래도 땀이 많았다. 그러나 대공은 평생 지금처럼 땀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만일 소인이 전하께 불충했던 점이 있었다면 부디 말씀해주시옵소서. 곧바로 시정하겠습니다……소인은 언제나 전하께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과인이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일세. 노예제를 폐지하게.”

노예제를 폐지하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저히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대공은 자신을 숙청하기 위해서 마왕 단탈리안이 음모를 꾸미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단탈리안은 표정이 진지했다.

“과인은 지금 그대에게 수작질을 거는 것이 아니다. 마계에서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린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지. 자네와 같은 대공은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노예를 수천 명이나 부린다. 반면에 가진 물건이라곤 자기 몸뚱어리밖에 없는 마족이 수두룩하지.”

“…….”

“단적으로 말해주겠네, 대공. 과인은 마왕을 제외하고 어떠한 권력층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마왕의 발밑에서 만민은 평등하다.”

너무나 솔직한 발언에 대공은 할 말이 사라졌다.

단탈리안은 대놓고 '네 세력을 약화시키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건 마치 이제부터 상대방을 두들겨팰 거라고 예고한 다음에 실제로도 두들겨패는 사람과 같았다. 이런 사람에게 뭐라고 이성적으로 반박할 수 있겠는가?

“노예제는 저희 선조의 선조가 살아가던 시절부터 이미 존중되던 전통입니다. 전하께서 서열 제도를 폐지하신 것에 저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오나, 과거의 유산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이 있지는 않습니다.”

“과거의 유산이라.”

단탈리안이 작게 웃었다.

“과인이 옛것 중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직접 말해주마. 새로운 마왕군에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복종한 15명의 마계대공은 좋은 옛것이다. 그러나 마왕군에 대항하고, 반란을 획책하고, 감히 암살을 계획한 11명의 마계대공은 나쁜 옛것이다.”

“…….”

“선과 악은 자네가 결정하지 않는다, 울발라 대공.”

단탈리안이 대공에게 상반신을 쓰윽 숙였다. 더없이 가까워진 거리에서 단탈리안이 말했다.

“우리 마왕들이 선악을 결정하지.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 선악은 기준이 무척이나 명확하다. 복종이 선이며 저항은 악이다. 자네는 편을 잘 선택해야 할 것이야.”

“바,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울발라 대공이 악을 썼다.

“마계에서 노예를 소유한 것은 대공뿐만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귀족들이 노예를 축적하고 있나이다. 수백 년이 넘도록 쌓아올린 재산을 하루 아침에 포기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시면, 그들은 참지 못하고 폭발할 것입니다!”

단탈리안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폭발하게.”

“예?”

“자네는 의외로 순진하군. 설마 반란 한번 일어나지 않고 노예제가 조용히 폐지되겠는가? 과인이 그런 기적을 기대할 만큼 멍청한 사람으로 보였는가. 울발라 대공. 당연히 반란이 일어나겠지.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어쩌면 백 년에 걸쳐서 일어날지도 모르네.”

“하, 하온데 어째서.”

단탈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 과인이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편을 잘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

“우리는 그대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는다. 부탁도 하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따름이다. 물론 그대들은 노예가 아니므로 자유의지에 따라 반항할 수 있다. 단, 그 경우에는 가슴에 자유를 품은 채 무덤까지 걸어가야 하겠지.”

침묵이 찾아들었다.

멀리서 무도회의 열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무도회장에서 다소 떨어진 장소였다. 밀담을 나눌 목적으로 만들어진 방이었다. 대공은 마왕 단탈리안이 자신을 이곳으로 부를 때 '어떠한 얘기를 들어도 겁먹지 않을 각오'를 끝마쳤으나, 실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각오였다…….

대공이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전하. 모든 마족이 마왕 전하들께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일부 대공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할 것입니다.”

“하,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다는 말인가? 심장에 노예각인을 새긴 암살자들이라도 이용하려는 것이냐.”

단탈리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마음껏 동원해보거라. 그런 암살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 이백 명? 이천 명? 오오, 마왕의 억제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는 암살자 군대라! 너무 무서워서 그만 오줌이라도 지려버리겠구나.”

“…….”

“예전에 알찰타 대공이 암살자를 고용해서 과인을 습격한 적이 있지. 알고 있는가?”

울발라 대공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알찰타 대공은 어리석게도 단탈리안을 암살하려 들었고, 그 대가로 죽음의 기사들에 의해 참살당했다…….

알찰타 대공이 머무르던 궁성은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이백 명의 귀족이 전원 참수되어서 꼬챙이에 뚫렸다. 마왕 단탈리안은, 모든 머리통에 일일히 하나의 문구를 칼로 새겨넣었다.

네 자신을 알라.

“그대 자신을 알게, 대공. 우리에게는 십만 명의 군대가 있다. 하지만 자네는 아니야. 과인은 언제든지 자네를 짓밟을 수 있다. 하지만 자네는 아니지.”

“만약 노예제를 폐지한다면…….”

대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에게는 어떤 보상이 주어지옵니까?”

“목숨.”

단탈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또한 자네의 헌신적인 충성심에 대한 선물로써, 다시는 이렇게 강압적으로 정책이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 그것뿐이옵니까? 수천 명이 넘는 노예를 순순히 포기하는데도, 오직 저희가 얻는 것은 안전밖에 없나이까?”

“대공.”

단탈리안이 물끄러미 울발라 대공의 눈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등줄기에 한기가 들었다. 방안의 온도가 한순간에 수십 도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목숨은 말일세, 무척――그야말로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일세.”

“…….”

“권력자들은 목숨이 얼마나 무거운지 쉽게 잊어버리지. 그리고 과인은 목숨의 무게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을 존중하기가 어렵더군.”

이날 밤.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무도회에 참석한 15명의 마계대공은 단탈리안에게 똑같은 통보를 전해들었다.

접견이 모두 끝나자 어느새 새벽이 되었다. 단탈리안은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휴식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파이몬이 안으로 들어왔다. 단탈리안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대공들에게 전했습니다. 늦어도 보름 안에 반응이 오겠지요.”

“……단탈리안.”

“바르바토스와 마르바스도 동의했어요. 일주일 뒤에 발푸르기스의 밤을 개최해서 정식 안건으로 올릴 겁니다.”

단탈리안이 오른손으로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유리잔은 텅 비어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어서 인간들을 멸망시키자고 호들갑을 떨어대고, 파이몬 당신은 어서 공화주의를 퍼트리자고 난리입니다. 바르바토스를 달래려고 사르데냐 왕국을 짓밟았습니다. 이제는 당신을 달래려고 돌아오자마자 대공들을 협박하고 있지요……. 솔직히 너무한 거 아닙니까?”

단탈리안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 파이몬은 그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단탈리안, 소녀는 다만…….”

“아아. 그냥 조금 푸념해본 겁니다. 누가 옛날에 연인이 아니었다고 할까봐 두 사람이 서두르는 성격까지 비슷해서요.”

단탈리안이 고개를 돌려서 파이몬을 쳐다보았다. 단탈리안의 얼굴에는 약간 생기가 없지만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여간 저의 연인들 중에서 저한테 뭔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시트리밖에 없군요. 바르바토스는 만날 인간을 죽여라, 당신은 만날 인간을 살려라, 가미긴은……음. 뭐. 제 사지를 절단해서 자기 전용의 창고에 보관해두지 않으면 성깔이 안 풀리는 모양이고.”

“후후.”

파이몬이 키득거렸다.

그녀는 안심했다. 평소와 똑같은 단탈리안이 눈앞에 있었다. 빈정거리고, 비웃고, 그렇지만 '어쩔 수 없군요'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는 단탈리안이. 파이몬은 바로 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다들 욕심쟁이인걸요. 그런 욕심쟁이들을 독차지하려는 단탈리안이야말로 욕심이 과한 것 아닐까요?”

“어이쿠, 결국은 전부 제 잘못입니까. 도대체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다음 생애에서는 시트리 같은 연인들만 사귀기를.”

파이몬이 옷자락을 벗었다. 무도회 드레스가 슬그머니 방바닥에 떨어졌다. 파이몬은 단탈리안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감쌌다.

“다음 생애에서도 연인을 여러 명 사귀려고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저는 욕심쟁이니까 말입니다.”

단탈리안이 파이몬에게 입술을 맞추었다.

한동안 방안에는 두 사람의 더운 숨소리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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