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2화 (392/510)
  • 00392 방울져 떨어지는 밤  =========================================================================

    마왕 마르바스.

    전직 서열 제5위이자 현직 판노니아의 국왕,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세바스토크라토르의 호칭을 허락받았으며, 황제를 제외하면 유일무이하게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고, 마왕군에서 중립파를 이끄는, 초로의 신사.

    감히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어 보이는 이 마왕은――놀랍게도 현재, 절찬리에 한숨을 쉬어대고 있었다.

    원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음에 있었다. 마르바스의 바로 옆에서 여마왕 세 명이 살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 그러니까 대가리에 골 빈 년들아. 내가 첫타로 예약해뒀으니까 더럽게 군침 흘리지 마시고요. 좋게 좋게 말할 때 그냥 얌전히 꺼져.”

    “어머나. 순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순번이 중요하와요. 하긴 뇌 없는 시체들이랑만 놀고 있서야 두 개의 차이점도 모르겠지만요.”

    “너희 두 년 다 하는 일이라고는 밥 먹고 뱃살 늘리는 것밖에 없잖아. 헤헤.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보상이 돌아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차례대로 바르바토스, 파이몬, 가미긴이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세 마왕 모두 얼굴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잘 관찰해보면, 어쩌면 굳이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도 없이, 전원이 눈웃음만 지었을 뿐이지 입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여마왕들의 입가가 떨릴수록 마치 그 진동이 주변에 퍼지듯이, 황궁 앞마당의 공기도 불온하게 떨어댔다.

    여기에 바로 역사적으로 중대한 쾌거가 있었다. 평원파, 산악파, 중립파, 각 파벌은 수천 년 전부터 반목과 대립을 되풀이해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파벌들은 하나의 거대한 조약에 암묵적으로 합의했다.――저 여마왕들로부터 반경 20미터까지 접근하지 말 것.

    그리하여 마르바스 정도 되는 마왕을 빼고, 모든 마왕이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파별의 구분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왕들은 사상적이고도 이념적인 차이를 뛰어넘어 공통적인 의견, 즉 ‘정말로, 진심으로 말려들고 싶지 않다……’라는 의견에 동의했다.

    “아아앙? 뇌 없는 시체? 그건 내가 아니라 네 이야기겠지, 두개골에다 화단을 마련한 년아. 네가 단탈리안한테 해준 일이라고는 위장에다 염증 생기게 한 것밖에 더 있어? 아주 걔가 권력을 쥐니까 이제서야 꼬리 살살 흔들리는 꼬락서니가 아주 고귀하십니다?”

    바르바토스가 콧방귀를 뀌고 비웃음을 날린 다음, 파이몬을 정확히 32˚각도로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단탈리안이 “무덤에 묻힌 성녀가 관짝을 차고 나와서 쌍욕을 퍼부어댈 만한 파괴력을 가졌으니 결코 상대방한테 쓰지 마라” 하고 경고한 제스처였다.

    “참, 여우가 아니라 서큐버스년이었지! 창녀가 권력자한테 가랭이 벌리는 거야 직업윤리에 충실한 행위였는데 내가 잘못 말했네. 미안, 창녀야. 네가 창녀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창녀짓하는 것을 욕헀어, 창녀야. 부디 네가 창녀라고 욕한 나의 잘못에 대해서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를 바랄게, 창녀야.”

    파이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장담하건대, 마르바스는 이때 '빠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확신했다. 틀림없이 혈관이 터지는 소리였으리라. 그와 동시에 마르바스는 자신의 위장도 터지는 것을 느꼈다. 속이 쓰렸다.

    “어머나, 그저께도 황궁에 기녀들을 잔뜩 불러모아서 단체 성교를 벌인 여자한테 창녀라는 소리를 듣다니 정말 의외네요. 듣자 하니 대단한 무도회였다면서요. 그렇게 허구한 날 몸을 버려서야 어디 구멍이 남아나기는 하련지 모르겠사와요. 몸집은 꼬맹이처럼 작은 주제에 구멍만 헐렁해진 것 아니에요?”

    파이몬이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하아, 단탈리안이 불쌍해서 어쩜 좋을까요. 안 그래도 가슴이라고는 발페르 해협마냥 쑥 들어간 꼬맹이랑 잠자는 것도 고역인데 이제는 구멍에 넣어도 이게 넣어진 것인지 아니면 공기를 범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에요. 옛날에 잠깐 사귀었다고 해서 만날 자기가 첫 번째라느니 뭐라느니……어휴, 귀찮게 달라붙는 여자만큼 꼴불견인 것도 없다지요.”

    또 다시 어디에선가 혈관이 파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은 이제 거의 서로 코를 맞댄 채 중얼거렸다.

    “걸레년이 누구 보고 헐렁하대, 썅?”

    “제가 막 물에 씻은 걸레라면 당신은 바닥을 닦고 탁상을 닦고 더해서 화장실 바닥까지 닦은 다음에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3달 동안 숙성시킨 걸레죠.”

    “호오. 요컨대 네 년 모가지를 잘라서 제발 3달 동안 숙성시켜주시라는 요청이지?”

    “소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겠으니 이제 싸움으로 해결하자는 말인가요? 누가 야만적이고 천박하다고 말하지 않을까봐 참 단순하게 나오시네요. 뇌에 주름이 조금 부족한 건 아닌지? 원하신다면 소녀가 직접 주름을 새겨드릴 수도 있는걸요.”

    마르바스는 점점 더 위가 쓰려왔다.

    황궁 앞마당은 마력이 너무 진하게 내려앉은 나머지 거의 마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찍이 대마왕 바알을 토벌하기 위해 마흔 명의 마왕이 집결했을 때도 이보다는 숨 쉬기가 편했다. 진실이었다.

    ‘나조차 이리 속이 쓰린데 대체 이 아해는 무엇인고.’

    마르바스가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반인반마의 서큐버스가 허리를 쭉 피고 서 있었다.

    단탈리안의 개인 비서이자 단탈리안이 부재할 경우 그를 대신해서 국정을 보좌하는 아이였다. 라피스 라줄리. 그녀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옆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래서, 라줄리. 누가 가장 먼저 순서가 돌아와~?”

    바르바토스와 파이몬이 신경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가미긴이 슬그머니 라피스에게 달라붙었다. 마왕이 한낱 마인에게 대하는 태도치고는 다소 저자세였다. 라피스가 마계 사회에서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받는 인간-혼혈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파격적이었다.

    이런 태도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군요. 반 년 전의 상황을 이어서 계산해보면, 바르바토스 님께서 4회. 파이몬 님께서 2회. 가미긴 님께서 3회이십니다. 형평성을 따져서 파이몬 님께 다음 차례가 돌아가는 것이 순리입니다.”

    바로 단탈리안의 잠자리를 관리하는 장본인이 이 서큐버스 혼혈이었다.

    라우라나 제레미처럼 직위가 비교적 낮은 연인은 물론이고, 여마왕들도 라피스 라줄리의 스케줄 관리에 의해서 잠자리가 결정되었다. 지난 번에 가미긴과 파이몬이 치정극을 벌이면서 대판 싸우고 난 뒤, 단탈리안은 완전히 질색하여 “라피스한테 전부 관리를 맡기겠습니다!”라고 선언해버렸다.

    그 결과.

    “그거 보세요! 소녀가 제일 먼저잖아요!”

    “야, 야, 야. 재상 아가씨. 우리 너무 고지식하게 나오지 말자고. 응? 제국에서 서열로 따지면 내가 제일 위잖아. 저거 파이몬 저 년은 나보다 서열이 두 개나 낮아요.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는데 내가 당연히 먼저지.”

    “하하, 마왕의 대소사를 제국 서열 따위로 정하다니 지나가던 슬라임이 허파로 웃어댈 논리네. 나는 좋아. 첫 번째가 아닌 건 아쉽지만 두 번째라면 뭐어, 납득할 수준인걸.”

    천하를 호령하는 세 명의 여마왕은 때때로 서큐버스 혼혈의 한 마디에 희비가 교차하는 비극이, 아니, 희극이 연출되었다.

    평범한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탈리안은 사시사철 발정난 개처럼 껄떡거렸으며, 여마왕들은 딱히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연인 행세를 할 수가 있었다.

    문제는 지금 단탈리안이 황궁을 떠난 지 6개월이 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이 '리셋'된 상황에서는 누가 제일 먼저 단탈리안의 시간을 빼앗느냐, 즉 누가 단탈리안을 가장 압도적으로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여마왕들의 자존심이 세워졌다.

    만일 여기서 상대방보다 뒤쳐진다면……그러니까 가령 바르바토스가 파이몬보다 하루 늦게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나는 파이몬보다 나중에 만나도 되는 여자'가 되었다.

    여마왕들은 그런 사태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애인들을 사귀는 것은 좋았다. 얼마든지 상관없었다. 파이몬은 시트리와 사귀었고, 바르바토스는 무수히 많은 애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다들 자유연애주의자였다.

    ――하지만 자기가 다른 여마왕보다 뒤쳐지는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했다!

    “재상 아가씨. 우리 이렇게 하자고. 내가 이번 달에는 딱 2회만 채울게. 응? 겨우 2회야. 대신에 날 앞으로 밀어줘. 빡빡한 세상에 그 정도 융통성은 있어도 괜찮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푸후. 그럼 난 1회로도 충분하거든? 우리 시체녀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아?”

    “그럼 시발 나보고 네 년들 차례 전부 돌아간 다음에 자라고!? 내 눈알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그 꼴은 못 본다, 이 쌍것들아!”

    “잘 됐네요. 소녀가 직접 당신의 눈구멍에 흙을 채워 넣어드리겠어요!”

    “아앙!?”

    “하아!?”

    마르바스가 기침을 했다.

    마르바스는 손바닥을 살펴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기침에 피까지 섞여버린 것이었다. 마르바스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기도했다. 단탈리안이여, 제발 빨리 와주게. 이 이상 본인을 기다리게 만들면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경전을 구경하던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트리의 입에서 폭탄 발언이 떨어졌다.

    “응? 그러면 세 명이서 다 함께 자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

    “그럼 순번도 다 공평하게 1등이잖아. 헤헤. 단탈리안도 괜히 이런 거에 신경 쓰는 것보다 마음 편하게 해결하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침묵.

    바르바토스, 파이몬, 가미긴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에게 삿대질을 했다.

    “내가――.”

    “이렇게 천박한 여자들이랑.”

    “같이 잔다고?”

    시트리가 응, 하고 활짝 웃었다. 해바라기가 꽃피는 것처럼 환한 웃음이었다.

    “완벽한 해법이잖아. 내가 생각해도 천재적이야! 참, 기왕이면 거기에 나도 끼어들면 더 좋구. 히히.”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라피스가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경우에는 일정도 한결 편하게 관리할 수 있겠습니다. 어떠하온지요? 전하들께서 동의만 하신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단탈리안 님한테 말을 전해드릴…….”

    “절대로 안 돼!”

    세 여마왕이 이구동성으로 맹렬하게 소리쳤다.

    라피스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허면 시트리 님께서 제1순위가 되시겠습니다.”

    “예? 왜 시트리죠? 제가 먼저 아니었나요?”

    “송구하옵니다만, 파이몬 전하께서도 엄밀히 말하여 첫 번째가 아닙니다.”

    라피스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만 지금 세 분 중에서 첫 번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전체를 통틀어서 계산하면 시트리 전하가 우선입니다.”

    “…….”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타이밍 좋게도 황궁 정문에 순간전이 마법진이 그려졌다. 검은색 마력이 사방으로 안개처럼 퍼지더니 그 속에서 단탈리안이 걸어나왔다.

    시트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서 단탈리안에게 와락 안겼다. 마치 애완견이 오랜만에 돌아온 집주인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어서 와, 단탈리안――!”

    “시, 시트리. 하하. 무겁습니다.”

    단탈리안이 깜짝 놀라면서도 시트리를 가슴으로 받아주었다. 단탈리안은 시트리를 안은 채로 황궁 앞마당에 모인 마왕들을 둘러보았다.

    “아니. 고작 저 하나 온다고 해서 뭐 이리 다들 모이셨습니까? 제가 도리어 부끄러워질 지경입니다.”

    “자네는 승전을 올리고 귀환하는 것 아닌가.”

    마르바스가 말했다.

    사실은 조금 달랐다. 바르바토스, 파이몬, 가미긴, 세 명이 단탈리안을 환영해야 한다면서 자기네 파벌을 긁어모아 집결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침묵해야만 하는 진실이 있음을, 마르바스는 경험상 터득하고 있었다.

    “황도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 우리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보상이란 이런 것뿐일세. 사양하지 말게, 궁중백.”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단탈리안은 자신을 맞이하러 나와준 마왕들 약 서른 명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단탈리안을 마뜩치 않게 여기는 마왕조차 상대방이 극진하게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하자 차마 안 좋은 표정을 짓기 힘들었다.

    참고로 단탈리안이 악수하러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시트리는 거머리처럼 그의 허리에 찰싹 들러붙어 있었다.

    “에이, 단탈리안. 시시껄렁한 의식은 집어치우고 빨리 들어가자.”

    “……정말로 죄송합니다, 동지 여러분. 시트리를 대신해서 제가 여러분께 마음 깊이 사과드립니다.”

    “빨리!”

    단탈리안이 한숨을 쉬며 황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환영식이 얼떨결에 빨리 끝나자, 대체로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마왕들도 기뻐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광장을 떠난 사람은 물론 마르바스였다.

    “…….”

    “…….”

    “…….”

    오직 세 명의 여마왕만이 얼떨결에 남아버렸다.

    세 명은 슬쩍 서로를 바라보더니,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실로 쓸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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