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1화 (391/510)

00391 죽은 귀족의 국가  =========================================================================

장기말이 전부 갖추어지자, 엘리자베트와 나는 땅따먹기에 들어갔다.

이건 무척이나 간단한 게임이었다.

제국군이 군대를 이끌고 출현하면 엘리자베트는 도망쳤다. 이 도주에는 '청야전술' 혹은 '지구전'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혹여라도 사르데냐 왕국에서 누군가가 이걸 비난하면, 엘리자베트는 또 다시 단기결전으로 맞붙어서 패배하고 싶냐며 단박에 일축시켰다.

반대로, 프랑크 귀족군이나 이곳저곳에서 여우떼처럼 모여든 군대가 나타나면 엘리자베트는 곧바로 태세를 돌변해서 달려들었다. 엘리자베트는 피 흘리는 물고기를 물어뜯는 상어처럼 처참하고 확실하게 상대편을 죽였다.

우리 제국군도 똑같았다.

엘리자베트가 다가오면 교묘하게 경로를 바꾸어 비켜나가는 한편, 사르데냐의 귀족군이 결성되어 우리를 요격하러 나오면 언제 조심하게 움직였냐는 듯 재빨리 달려들었다.

마치 우리 두 사람은 잘 차려진 만찬에서 식탁 정반대 방향에 앉아, 조금씩 손을 뻗어서 요리를 먹어헤치우는 손님들 같았다. 굳이 우리가 서로를 잡아먹지 않아도 먹을거리는 넘쳐났다.

사르데냐의 도시는 함락되었고, 농지는 불타올랐으며, 창고는 약탈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엘리자베트와 내가 이동안 단 한번도 의사를 교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편지를 주고받지도 않았고, 수정구를 이용해서 통신하지도 않았다. 대외적으로 우리 둘은 철저하게 앙숙이자 원수로 여겨졌다.

하지만 우리는 능숙한 춤꾼들이 비록 무도회장에서 처음 만났을지라도 어찌저찌 훌륭하게 박자를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편이 군사를 움직이면 나는 저쪽으로, 내가 이쪽으로 움직임으로써 상대편을 다른 곳으로 유도했고, 결코 서로의 의중에서 어긋나지 않았다.

사르데냐 왕실이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빠르게 닥쳐왔다.

엘리자베트가 다행히도 각지에서 선전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제국군만큼은 어찌 처리하지 못했다. 엘리자베트 본인도 공공연하게 “야전에서 제국과 맞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자살행위”라고 말하고 다녔다.

설령 엘리자베트에게 싸울 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병사들에겐 없었다.

이제 적군들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의 이름만 들어도 덜덜 떨었다. 명령하면 전쟁터에 나서긴 나서겠지만, 조금이라도 패전의 그늘이 뒤덮으면 ‘또 진다! 얼른 도망치지 않으면 학살당한다!’ 하고 줄행랑을 쳐버릴 분위기였다.

휴전협정.

이 음울한 네 글자 이외에는 어떠한 정답도 없었다.

그리고 사르데냐에게 휴전이란 항복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고상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구, 궁중백 각하……이건 너무나도 가혹한 조건입니다…….”

사르데냐의 외무대신이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외무대신의 손에는 우리 측에서 제시한 휴전협정안이 담겨 있었다.

“우리 사르데냐 왕국에게 북부는 주요 항구도시와 산업지대가 집중된 곳입니다……이, 이곳을 이렇게 포기해버리면 왕국의 미래란…….”

“왕국의 미래라.”

내가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외무대신이 입을 뚝 다물었다.

“공작. 과거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미래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에, 궁중백 각하.”

“우리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제일 처음에 제시하신 협상안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외무대신이 침묵했다. 협상안을 몰라서 침묵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파르네세 공작가의 명예를 복권시켜달라. '고작' 그것뿐이었습니다.”

“…….”

“맨입으로 해달라는 얘기도 아니었습니다. 충분하고 넘치는 사례금까지 명시했습니다. 그런데도 귀국에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반역도당의 무리를 복권시키는 건 가당치 않다고 말했을뿐더러, 심지어 파비아 백작을 앞장세워 데 파르네세 공작을 공개적으로 모욕했습니다.”

외무대신이 뭐라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내가 오른손을 세워서 제지했다.

“이 모욕을 당하고 아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진심 어린 사과를 바란다.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공작, 제가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과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는지요?”

“…….”

유구무언인가. 미안하지만 내 쪽에는 조금 더 공격할 거리가 있었다.

“제2차 협상안은 어떠했습니까. 그저 파르네세 공작에게 유산으로 넘겨져야 마땅했던 파르마-피아센차 공작령, 여기에 전쟁배상금의 일환으로 밀라노 공작령을 요구했습니다. 이번에도 귀국에서는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끌어들임으로써 화답했지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내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공작. 귀국은 무례하고 뻔뻔하며 외교적인 존중이란 눈꼽만치도 없는 파렴치한입니다.”

“구, 궁중백…….”

“아국에게서 일말의 자비조차 기대하지 마십시오. 귀국에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협상안을 받아들이십시오. 아니면 거절하십시오.”

내가 몸을 일으켜서 외무대신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언젠가 제4차 협상안을 체결해야 될 때가 온다면, 오, 제가 장담해드리겠습니다. 그때는 겨우 사르데냐의 북부만 가지고 논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맹세해도 좋습니다. 솔직히 저는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되는군요.”

“…….”

“가서 공작의 멍청하고 쓰잘데기라곤 하나도 없는 국왕에게, 자국의 백성이 약탈당하도록 내버려두고 외국의 군주한테 국방을 떠맡기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국왕 전하에게 전하십시오. 제국의 권고를 무시하는 자에게 어떤 결말이 다가올지 기대하라고.”

그대가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역사가 그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전쟁 직전에 합스부르크 황제가 한 말은 워낙 인상 깊었던 탓인지, 요즘 와서는 거의 합스부르크 황실의 가언(家言)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내 단호한 통첩에 외무대신은 차마 더 말을 붙여보지도 못하고 퇴장했다.

그해 11월 겨울, 사르데냐 왕실은 전면적인 휴전협정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대륙의 열세 국가에서 파견한 외무관료가 피렌체에 모여들었다. 나는 합스부르크 황제를 대신하여 조약에 날인하였다. 피렌체 조약이라 명명된 휴전협정안은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1. 파르네세 공작은 과거 파르네세 공작가의 상징인 푸른 산수화를 자신의 문장에 새겨넣을 권리를 획득한다. 향후 이것은 더 이상 전쟁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2. 파르네세 공작은 밀라노, 베르가모, 파비아, 피아센차, 라스페치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다. 파르네세 공작은 사르데냐 왕에게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는다.

3. 브르타뉴 왕은 제노바, 니케아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다.

4. 아나톨리아 황제는 베네치아, 파도바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다.

5. 피렌체 대공이 적법한 나이까지 성장할 때까지 피렌체 대공령은 프랑크의 황태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가 섭정으로서 대리통치한다. 단, 황태후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피렌체 대공령에 대한 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한다.

6. 피에몬테 일대에 대한 통치권을 프랑크의 여덟 귀족에게 나누어서 분배하며, 이들의 통치권을 인정한다. 이들은 사르데냐 왕에게 어떠한 의무도 지지 않는다.

7. 이외에 합스부르크 제국이 전쟁 중에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사르데냐 왕국에 반환한다.

8. 바타비아 공화국, 카스티야 왕국, 칼마르 연맹국,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상인은 피에몬테 일대 및 베네치아에서 무관세 무역이 허용된다.

나는 조약문에 기분 좋게 도장을 찍은 다음 사르데냐의 외무대신을 쳐다보았다. 외무대신은 도장을 쥔 채 손을 떨고 있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무엇을 하십니까, 공작. 혹시 도장이 너무 무거워서 힘드신지요?”

“…….”

외무대신이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 조약문은 사르데냐에게 일방적인 출혈을, 아니 일방적일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다.

사르데냐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를 다섯 개 뽑으라면 그 안에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가 반드시 포함되었다. 이 세 개의 도시를 한꺼번에 타국에 할양하게 되었다. 10년이라든지 20년 단위로 잠깐 빌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영구히 통치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대도시인 피렌체마저 일시적이지만 외국의 황태후에게 넘어갔다.

북서부 지방은 아예 프랑크 남부의 귀족들에 의해서 갈갈이 찢어졌다.

반면에 우리 제국이 사르데냐 왕국에게 건네주는 보상은 딱 하나――전쟁을 그만두는 것밖에 없었다.

이처럼 굴욕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는 것은 귀족에게 있어 대대손손 불명예로 남았다. 외무대신이 머뭇거리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나는 외무대신을 부축해주는 척하면서 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희는 얼마든지 전쟁을 계속해도 좋습니다, 공작.”

“…….”

외무대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노귀족은 나를 노려보았다.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분노일까, 공포일까. 어느 쪽이든 간에 외무대신은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로디 후작보다 담력이나 인격이나 한참 뒤떨어지는 귀족이었다.

결국 외무대신이 꾸욱, 하고 도장을 찍었다.

내가 외무대신의 오른손을 잡고 신나게 흔들었다.

“이토록 기쁜 날이 또 있을까요. 양국에 절망과 피해만 안겨주었던 전쟁이 드디어 종막을 선언했습니다. 저 단탈리안 궁중백은 아국의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귀국에, 아울러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열국의 대표단 여러분께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주변에 몰려 있던 사신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그중 사르데냐 왕국을 배려하거나 존중해주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아, 물론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대표는 가만히 있었지만 쟤네가 제일 악질이니까 셈하지 않겠다.

이날 밤에 종전을 기념하는 무도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라우라는 군중에 남아서 잡무를 처리해야 했으므로, 나는 롱그위 성녀를 파트너로 삼아서 무도회에 참석했다. 물론 롱그위 성녀는 처음에 길길이 날뛰었다.

“왜 또 저인가요! 당신은 도대체가 무도회장에 데려갈 여자 한 명을 제대로 사귀지 못하나요!”

“제가 이런 자리에서 데려갈 만한 영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녀. 좀 봐주십시오. 제가 브르타뉴 왕국에 재기의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습니까, 지키지 않았습니까? 네? 제 신실함에 대한 선물로 무도회 정도는 같이 가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거고――이건 이거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곧이어, 롱그위 성녀도 마땅히 파트너로 삼을 남자가 전무하다는 사실이 발각.

이미 앙리에타 여왕이 “난 무도회는 질색이라네”라고 불참을 알려왔는데 여기서 롱그위 성녀까지 자리를 빼면 그야말로 외교적인 결례가 되어버리는지라,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랑 춤을 추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모를 거에요”, “앙리에타는 맨날 이런 식이라니까!” 등등, 무도회장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이 아가씨가 얼굴은 예쁘장한테 왜 애인 하나 없는지 알 만했다.

무도회장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범하게 화려한 무도회였다.

다만 엘리자베트도 참석해 있었다. 아예 파트너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지 혼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는 롱그위 성녀와 첫춤을 춘 다음, 엘리자베트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저와 춤을 추어주시겠습니까, 마드모아젤.”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또' 춤을 출 이유가 있겠는가?”

“없지요.”

내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또 추지 말라는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엘리자베트가 쿡쿡 웃으면서 내 오른손에 손을 가볍게 걸쳤다.

제2차 국화전쟁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 작품 후기 ============================

최종협상에 의해서 사르데냐 왕국 영토가 어찌되었는지, 설정란에 지도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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