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90화 (390/510)
  • 00390 죽은 귀족의 국가  =========================================================================

    “물러서지 마라! 뒤로 도망치지 마라!”

    왕국군의 하사관들이 할버드를 치켜세우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러나 병사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때는 맞서 싸울지라도, 자신과 왼쪽에 있는 동료, 오른쪽에 있는 동료까지 목숨이 위험해진 상황에 처한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법이었다.

    브르타뉴 기병에 용병대가 패주했다. 용병대가 아군인 왕국군을 향해서 도망쳤다. 안 그래도 왕국군은 사방이 포위되어 있었다. 패잔병이 정신없이 섞여들자, 대열이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었다.

    자그마치 4만 명이 한곳에 몰리고 있었다.

    우리 제국군이 휘두르는 창칼을 피해서 왕국군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으며, 눈치 채보니 어느새 뒷발을 치지도 못할 정도로 4만 명이 뭉쳐버렸다.

    공간이 너무 비좁았다. 적병은 제대로 팔을 뻗어서 창을 내지르지도 못했다. 그에 반해서 우리 제국군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무기를 휘둘렀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로군요. 라우라, 어쩌겠습니까?”

    “자비는 없다.”

    이제 울음을 그친 라우라가 평소처럼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어떤 지휘관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저들에게 평등한 죽음을 하사하라. 전투가 끝나고 나면 용병들에게 시체를 약탈하는 권리를 약속한다.”

    우리군은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적들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사방에서 “항복한다!”, “자비를, 제발 자비를!” 하고 애걸복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어재끼는 광경도 심심찮게 나왔다.

    헬베티카 용병들은 처참하게 그들의 목을 베었다. 샛붉은 핏물이 낭자했다. 창자와 간이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뇌수가 튀겼으며, 새빨개진 창날이 피로 쇠를 씻었다. 말레딕투스의 평야에는 비명밖에 울리지 않았다.

    적군은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마법사들이 모여서 일제히 불덩어리를 쏟아부은 것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의 숫자가 비슷한 상황에서 공격이란 무의미했다.

    우리는 손쉽게 마법을 방어하기만 했다. 적들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참, 반(反) 순간전이 마법을 펼쳐두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서 사르데냐의 수호 가문은 죽는다.

    아주 운이 좋게도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병사가 열댓 명씩 생기기도 했다. 그런 행운아들은 줄리아나 드 블랑의 기병대에 의해 칠면조처럼 사냥되는 경험을 맛보았다. 매우 색다른 체험이었을 게 분명했다.

    저항해도 죽었고, 항복해도 죽었고, 도망쳐도 죽었다. 아예 자포자기해서 바닥에 주저앉는 적병도 많았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죽이기 편해져서 좋다'라는 반응밖에 돌려줄 것이 없었다.

    대략 1시간이 지나자, 우리는 성공적으로 섬멸을 이루었다.

    사르데냐 왕국군 4만 명을 모조리 참살했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망원경으로 계속 살펴본 결과, 우리는 왕국군 병사가 도망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해주지 않았다.

    총사령관인 밀라노 공작조차 무명소졸의 창날에 목이 꿰뚫렸다. 공작, 후작, 백작까지, 무려 열한 명의 고위귀족이 목이 잘렸다. 서른 명의 마법사가 죽었다. 아흔 명의 남작이 효수되었다.

    이들을 전부 포로로 팔았다면 국가예산을 세 개는 마련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라우라는 자비가 없음을 명확하게 선언했고, 나는 막지 않았다.

    감히 외교적인 예의를 잊어버리고 제국에 반항할 경우,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서.

    강줄기의 이름을 따서 파두스 전투라고 명명한 이 싸움은 다음과 같이 종결되었다.

    제국군. 보병 19,400명과 기병 9,800명 참전. 사상자는 보병 4,900명에 기병 600명. 이중에서 사상자 3,000명은 내가 지휘한 민병대에서 발생했다.

    왕국군. 보병 약 41,000명과 기병 약 7,000명 참전.

    사망자는 보병 약 40,000명에 기병 약 3,500명.

    전투에 참여한 48,000명의 왕국군 중 살아서 도망친 병사는 겨우 4,500명 정도에 불과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이름은 바야흐로 사르데냐 왕국의 악몽으로 군림했다.

    *  *  *

    이제 대세는 명백하게 기울어졌다.

    회전이 일어날 때마다 삼만 명 이상의 병력이 죽어나갔다. 반 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사르데냐 왕국군은 정병 10만 명을 잃었다. 왕실은 더 이상 결전 따위를 바랄래야 바랄 수 없는 처지까지 전락했다.

    “파르마 공작 전하. 위대한 승리를 경하드리옵니다.”

    “공작 전하의 위명이 이미 대륙을 호명하고 있나이다.”

    며칠 뒤, 각국에서 축하 사신을 보내왔다. 우리가 압도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감하고 부랴부랴 사신들을 파견한 것이었다. 아나톨리아 제국과 사르데냐 왕국, 합스부르크 공화국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에서 사절이 왔다.

    자그마한 해프닝도 있었다. 사신들은 소소하게나마 선물을 준비했는데, 금은보화로는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 어렵겠다 싶었는지 특별한 물건을 준비했다. 그런데 아홉 개국의 사신 전원이 똑같은 종류의 선물, 즉 보검을 마련했다. ‘공작 = 장군 = 군인 =검’이라는 안이한 사고방식에서 생겨버린 참사였다.

    졸지에 똑같은 선물을 아홉 번이나 헌상하게 된 사신들은 멋쩍은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라우라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는 가운데, 내가 손뼉을 쳤다.

    “일찍이 열국의 국왕 전하들에게 모두 검을 하사받은 장수는 없었습니다. 공작 전하. 폴리투니아의 국왕 전하께서 선물하신 보검은 '폴리투니아의 검'이라 명명하고, 프랑크의 황후 폐하께서 선물하신 보검은 '프랑크의 검'이라 명명함으로써, 아홉 자루의 검을 하나의 진귀한 상징으로 만드심이 어떤지요?”

    내 재치있는 제안에 사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실로 멋진 생각이옵니다!”

    “공작 전하, 소인도 궁중백의 의견을 지지하겠나이다.”

    라우라 역시 웃으면서 제안을 승락했다.

    자칫 민망스러운 외교적 해프닝이 될 뻔한 사건은 그리하여 <열국(列國)의 검>이라는 미문으로 탈바꿈했다.

    소문이 퍼지자 엘리자베트 통령과 아나톨리아의 황제도 보검을 한 자루씩 선물해왔다. 이로써 라우라는 전무후무하게 열두 개국의 군주에게 명검을 하사받은 장군이 되었다. 뭐, 프로파간다란 이런 것이겠지.

    우리 제국군은 그대로 기수를 돌려 밀라노로 향했다.

    밀라노는 파두스 전투에서 시민병을 대다수 잃어버렸다. 밀라노 공작이 모범을 보이겠다며 자도시의 민병을 대거 이끌고 출병했기 때문이다.

    덕택에 밀라노의 전력은 농성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급하게 노인까지 징병해서 성벽 위로 내세우는 모습이 제법 안쓰러웠다.

    라우라가 성벽 코앞까지 말을 타고 가서 쓰윽 한 바퀴 둘러보았다. 라우라는 가볍게 코웃음을 한번 쳐주었다.

    “저들에게 소중한 가족을 돌려주어야겠군.”

    제노바에서 약탈한 투석기 다섯 기가 나아갔다. 아군은 투석구에 묵직한 것을 꾹꾹 눌러 담았다. 라우라가 발사를 명령했다. 다섯 개의 투사체가 동시다발적으로 도시에 쇄도했다.

    잠시 뒤, 밀라노의 성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우리가 던진 것은 돌덩어리가 아니었다. 사르데냐 왕국군의 머리통 수십 개였다. 그중에는 일찍이 밀라노 시민이었던 인간의 머리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차마 인간이 저질렀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잔인한 짓이었다. 밀라노의 급조된 수비병은 공포에 떨었다.

    “무엇들 하는가. 계속해서 가족들을 보내주지 않고.”

    “예, 전하!”

    우리군은 장장 두 시간에 걸쳐서 머리통 세례를 쏟아 부었다.

    성벽의 병사들은 완전히 전투의지를 상실했다. 개중에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덜덜 떨면서 쪼그라 앉은 병사까지 있었다. 두 시간이 지나자, 라우라는 확성마법을 통해서 간결하게 통첩했다.

    “싸그리 죽고 싶지 않다면 오 분 안에 성문을 열어라, 천치들.”

    예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최후통첩이었고, 그렇기에 효과적인 최후통첩이었다.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더니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성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군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느긋하게 밀라노에 입성하였다. 앙리에타 여왕이 내 옆에서 말을 몰면서 중얼거렸다.

    “별로 기분이 안 좋은걸. 남의 일 같지가 않아.”

    “…….”

    아아. 생각해보니 앙리에타 여왕도 르 아브르 요새에서 농성할 때 투석기로 시체 세례를 받았다. 전염병을 노린 수작이었는데 바로 내가 제안한 공격이기도 했다.

    왠지 앙리에타 여왕의 얼굴이 살벌했다. 그거 사실 제가 제안했지 말입니다, 하고 고백하면 당장 한 대 맞을 분위기였다.

    “밥을 먹고 있는데 머리 위로 시체가 떨어지면 어떤 기분인지 아는가?”

    “그, 글쎄요. 당해본 적이 없어서.”

    “단탈리안도 꼭 한번 당해보기를 바라네. 정말 개 같은 기분이거든. 어떤 마왕이 그딴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어도 과인에게 걸리면 그날로 죽은 목숨이야.”

    “하하, 하하하.”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사르데냐 북부에서 제일 강력한 성벽을 자랑하는 대도시,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부유한 상업도시인 밀라노는 너무도 간단하게 함락되었다. 밀라노가 떨어졌다는 것은 사르데냐가 북부를 통제할 힘을 상실해버렸음을 의미했다.

    사르데냐 왕실은 허겁지겁 엘리자베트를 다시 총사령관으로 올렸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프랑크 황실에 몰래 의뢰하여, 황태후로 하여금 메디치 가문의 승계를 요구하게 만들었다.

    피렌체 대공에게도 아들이 있었으므로 진짜 승계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아직 나이가 한참 어린 아들이 자라날 때까지 황태후가 '후견인'으로서 뒤를 돌봐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당연하지만, 말이 후견인이지 실상은 섭정이나 진배없었다.

    게다가 황태후는 이미 한번 섭정이라는 명목으로 프랑크 제국을 쥐락펴락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사르데냐 왕실과 피렌체의 메디치 본가에서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자마자, 프랑크 제국이 참전했다.

    프랑크의 남부 귀족들이 연합해서 사르데냐로 침공했다. 명분이 가관이었다.

    “시대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사르데냐인이 자꾸만 우리들 영지에 무단으로 침범해온다. 부랑자, 피난민, 패잔병을 근절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이곳의 치안을 담당하겠다.”

    이것을 하나의 근사한 개소리로 취급해도 좋으리라.

    참고로 내가 직접 써준 명목이었다.

    하하.

    나는 너그럽게 프랑크의 진출을 허용해주는 대신, 프랑크 귀족들로부터 상당량의 보급물자를 약속받았다. 우리 제국군에 식량과 무기가 대량으로 보급되었다. 이 막대한 보급품을 얻어내기 위해서 프랑크 귀족들이 사르데냐의 영토를 무자비하게 약탈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 다음에는 바타비아 공화국과 카스티야 왕국, 칼마르 연맹국이었다.

    나는 이번 전쟁 때문에 대륙의 무역이 중단된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이에 대한 '대가'로 제국군이 점령한 항구를 세금 없이 이용해도 좋다고 공언했다. 이들 국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바타비아, 카스티야, 칼마르는 자국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수의 함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 제국군이 필요할 때마다 함선을 빌려주었다.

    세 개국은 어디까지나 자국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이며 전쟁에 끼어들 의사는 전혀 없다고 밝혔는데, 이 또한 매우 고급스러운 개소리에 속했다. 우리 제국군이 포로로 잡은 노예들이 그들에게 팔려나간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모든 나라가 이리떼로 돌변해서 사르데냐라는 이름의 탐스러운 양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사르데냐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 작품 후기 ============================

    현재 전황을 지도로 올려둡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