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89화 (389/510)
  • 00389 죽은 귀족의 국가  =========================================================================

    기병대가 패퇴해버리니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까.

    사르데냐 왕국군이 본격적으로 거칠게 나왔다. 밀라노 공작이 스스로 전열에 나와서 군을 독려했다. 장담하건대 “동족이든 뭐든 깡그리 죽이도록 해!”라고 소리쳤다. 영감탱이가 목소리는 갓 태어난 사내놈보다 우렁찼다.

    “밀어붙여라!”

    “으아아아!”

    왕국군은 이제 우리의 보병을 꿰뚫지 못하면 패배하게 생겼다. 지금이야 우리 기병대가 왕국군의 기병대를 마저 섬멸하기 위해서 저 멀리까지 소풍하러 떠났다지만, 그 다음에는 더 탐스러운 먹잇감을 노리고 말머리를 돌릴 것이 분명했다.

    뒷구멍이 범해지기 전에 사태를 끝내고 싶겠지. 왕국군은 더더욱 치열하게 전진, 오로지 전진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내가 맡은 부대는 뒤로 물러섰고――자연스럽게 적군을 깊이 끌어들였다.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일어났다. 슬슬 시민병으로 이루어진 내 부대에는 한계가 들이닥쳤다. 이대로 무작정 버티기만 해서는 적군에게 수박이 깨지듯이 산산조각 나버릴 지경이었다.

    “적군이 중앙을 돌파하도록 내버려두고, 부대를 양편으로 나눈다.”

    “예, 각하!”

    부관이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부대 뒤쪽에는 예비대가 쌩쌩하게 4개 연대씩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바통을 넘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

    나의 부대가 좋게 말해서는 전술적으로 해산하고, 나쁘게 말해서는 전열이 붕괴되어 다른 부대로 도망치고 있을 무렵, 무언가 이상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곧이어 나는 왜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깨달았다.

    이거, 피렌체 대공을 궤멸시켰을 때랑 똑같았다.

    그때도 우리군은 지금처럼 사르데냐 왕국군을 포위해갔다. 완벽하게 포위가 완성되었을 찰나에 라우라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렸다. ‘적군이 중앙을 돌파하도록 내버려두어라’ 하고.

    궁지에 몰렸던 피렌체 대공은 덕분에 구사일생했다. 우리군의 정면을 뚫고 도망쳤다. 나는 대공을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며 아까워했다. 라우라가 나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완벽한 승리는 완벽한 패배만큼이나 해롭다.’

    그리고 어제 군사회의에서 라우라는 이렇게 말했다.

    ‘밀라노 공작은 똑똑한 인물이다.’

    ‘모름지기 현명한 인간은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려고 한다.’

    ‘밀라노 공작은 왜 왕국군이 그간 연전연패했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겠지.’

    나는 머릿속에서 번개가 내려치는 것 같았다.

    만약에 라우라가 말했던 대로 밀라노 공작이 현명한 인물이고, 과거의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워서 새로이 적용하고자 했다면.

    막바지에 이르러 피렌체 대공에게 돌파를 허용하고 만 과거의 전투를――라우라가 일부러 적군을 놓쳐주었다고 파악하지 못하고, 단지 '제국군의 중앙 보병이 허약해서 돌파를 허용한 사례'로 파악하지 않았을까.

    순식간에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하나는 보고 다른 하나는 보지 못한다.’

    ‘밀라노 공작은 스스로 사지(死地)에 걸어왔다.’

    그때 라우라는 일부러 피렌체 대공을 놓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적으로 하여금 우리군의 약점이 중앙 보병에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라우라는 피렌체 대공을 이미 적수로 취급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사전작업에 불과했다. 언젠가 다시 벌어질 전투,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전투를 대비하여.

    하지만 어떻게?

    라우라는 어떻게 적군이 과거의 실패에서 학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는가. 피렌체 대공이 물러난 다음에 누가 차기 총사령관으로 임명될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쩌면 실패에서 배울 줄도 모르는 머저리가 총사령관이 되었을지 어찌 아는가.

    “아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아, 내가 라우라한테 말했다!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언젠가 엘리자베트 통령과 전면대결을 펼칠 것이라고, 틀림없이 말했다!

    라우라는 내가 얼마나 엘리자베트를 높이 평가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라우라는 나의 평가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즉, 라우라는……주군이 높게 평가하는 적 지휘관이 과거의 실패를 되돌이켜볼 줄도 모르는 멍청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트레비아 전투에 피렌체 대공을 방치한 것은 훗날 엘리자베트와 싸우게 될 때를 대비하여 마련해둔 함정, 위장, 거짓이었다.

    도대체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차기 총사령관을 확실하게 잡아내기 위해서, 눈앞에 포위로 몰아넣은 현직 총사령관을 순순하게 놓쳐주었다고!

    그런 건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또 다른 군사적 천재라 불리는 앙리에타 여왕조차 불신할 게 분명했다. 헬베티카의 용병대장들도, 브르타뉴의 지휘관들도, 지나치게 어처구니없는 전략이라고 비난하겠지.

    ――따라서, 적군도 절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밀라노 공작은 물론이고 사르데냐 왕국 전역에서 꾸역꾸역 모여든 귀족들과 장군들도 알아차릴 수 없다. 상대방이 어리석지 않을수록, 현명하면 현명할수록, 라우라가 파둔 거미줄에 스스로 뛰어들게 된다.

    ‘사르데냐의 귀족은 유능하군.’

    언젠가 라우라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어쩌면 라우라는 거기에 이어서 ‘유능한 적군만큼 써먹기 쉬운 상대는 없지’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나는 이번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공언했다. 우리가 엘리자베트 통령과 싸울 일이 사라졌노라고. 그렇기에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고안해낸 필사의 전략은, 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가 아니라 루도비코 데 스포르차에게로 향했다…….

    “…….”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에 북받쳤다.

    기쁨과 회한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이것이 나의 연인이었다. 내가 타락시키고 영원히 함께하기로 맹세한 여자였다. 이 얼마나 눈부시는 재능인가. 얼마나 눈부신 인간을 나는 무책임하고 섣부르게 망가트렸는가……그러나 이것이 나의 연인이었다…….

    “부관. 나머지 지휘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각하?”

    “이미 우리 부대는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본인이 지휘하나 자네가 지휘하나 별반 다를 것도 없겠지. 수고하도록.”

    부관이 뒤에서 뭐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들리지 않았다. 망토를 휘날리며 뒤쪽으로 헐레벌떡 뛰어갔기 때문이다. 왼쪽 허벅지가 끔찍하게 아파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왕에게 고통이란 어차피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푸른 산수화. 내가 라우라한테 선물했던 군기가 저쪽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나는 절름발이처럼 우스꽝스럽게 절뚝거리며 달려갔다. 아직 한참이나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라우라는 정확하게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도 나한테로 달려왔다. 부관들도 그녀를 따라서 황망하게 따라붙었다.

    “주군, 무슨 일인가! 혹시 상처라도 덧났는가!”

    내가 무심코 웃어버렸다. 아직도 주군이라 부르고 있었다. 대화가 주변에 다 들리는 장소에서 저렇게나 조심성이 없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다. 내가 옆에서 평생 뒤치닥거리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곤란한 아가씨였다.

    “주군? 괜찮은가?”

    걱정스러운 얼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식으로 우울하게 표정을 짓고 있는 라우라를 향해서, 내가 숨에 차오른 채 말했다.

    “당신은 천재입니다, 라우라!”

    나는 라우라의 어깨를 꾸욱 껴안았다.

    “주, 주군?”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천재에요!”

    설명도 뭣도 없이 되는 대로 내뱉어진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그 이상의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걱정에 휩싸였던 라우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희로 물들었다.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곧바로 알았겠지.

    “응, 주군이라면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 아닙니까. 이런 건 아무도 알지 못해요.”

    부관들이 먼발치에 멈춰서서 우리를 당황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제1전열의 지휘관이 다가오나 싶더니, 갑자기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총사령관과 나누고, 갑자기 두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어리둥절한 것이 당연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번 전투가 '실제로' 무엇이었는가는,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영원히 단 두 사람만이 알 것이었다. 라우라는 사실상 엘리자베트를 죽였다! 원래 이 평야에서 쓰러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엘리자베트였다!

    라우라는 지금 한 순간이나마 대륙 최강의 전술가이자 전략가가 되었다. 그것이 이번 전투의 진짜 의미였다. 나는 이 사실을 오직 나 혼자만이 깨달았다는 것에서 분노와 자부심을 동시에 느꼈다.

    “라우라, 지금은 당신이 최고입니다. 당신은 엘리자베트 통령을 죽였어요……저는 그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아…….”

    내 말을 듣자, 라우라의 얼굴에서 완벽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저, 정말인가? 주군에게는, 소녀가 최고인 건가……?”

    “당연합니다. 뭘 새삼스럽게 묻는 겁니까. 저한테는 언제나 라우라가 최고였습니다.”

    “…….”

    라우라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째서인지 라우라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음이 섞여든 목소리로 라우라가 다소 두서없이 속삭였다.

    “으응, 나, 항상 주군에게 최고가 되도록 노력할 테니까……내가 노력했을 때 주군은 지금처럼 반드시 알아준다. 응. 소녀에게는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는 전쟁터의 고함과 비명을 자장가로 삼는 것처럼 서로를 부드럽게 안았다. 나의 라우라, 나의 죄……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주는 증거. 내가 결코 함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주는, 나의 증거였다.

    총사령관이 갑작스레 지휘부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미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아군은 사르데냐 왕국군을 완벽하게 3면에서 포위했다. 적들은 어떻게든 중앙을 돌파하려고 안간힘을 다 썼지만, 새로이 투입된 예비대는 완강하게 벼텨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마침내 아군의 기병대가 돌아왔다.

    밀라노 공작도 멍청이가 아니었다. 전황이 이렇게 부정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파악했다. 밀라노 공작이 후방에 정예병인 용병대를 배치시킨 까닭이 여기 있었다. 용병대들은 능숙하게 대(對) 기병전용 장창방진을 짰다.

    밀라노 공작은 조금 부주의했을 뿐이다. 브르타뉴의 기병대, 그것도 앙리에타 여왕이 이끄는 기병대는 단지 '부정적인' 전력이 아니었다.

    악몽이었다.

    생드니 평야에서 프랑크군은 브르타뉴군보다 세 배나 병력이 많았다. 목책으로 철저하게 방어진지까지 구축했다. 그런데도 브르타뉴군의 돌격을 이기지 못하고 전멸해버렸다. 고작 기껏해봐야 5,000명에 불과할 용병대로 앙리에타를 막겠다고?

    글쎄. 나라면 별로 현명하지 못한 대처라고 조언해주고 싶었다.

    앙리에타의 브르타뉴 기병대는 아군과 협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적 기병대를 박살내고 돌아온 다음, 쉬지 않고 곧바로 돌격을 감행했다. 아마 롱그위 성녀의 축복 덕분에 군마도 사람도 생생했겠지.

    단 한번의 날카로운 공격이 있었고, 그대로 승패가 결정되었다.

    왕국군에서 최고 정예병으로 취급되던 용병대는 앙리에타의 일격조차 막아내지 못했다. 장창방진은 형편없이 무너져내렸고, 적병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쳤다.

    그들의 도주로를 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똑같은 왕국군이었다.

    적군은 맞서싸우지도,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우리 제국군은 삼면에서 적을 에워쌌으며, 나머지 한면에서는 브르타뉴 왕국군이 끊임없이 돌격을 감행했다. 내가 지독하리 만치 당한 일제 사격-이후 돌격으로 이어지는 공격이었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아군과 적군에 둘러싸여 서서히 압사당했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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