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88 죽은 귀족의 국가 =========================================================================
브르타뉴가 제1라운드를 뺏어가는 가운데.
우익에서는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이끄는 기병대가 적군의 기병대와 충돌. 평야의 양 가장자리가 말발굽 소리로 치장되었다. 이 굉음을 귓가로 넘겨들으며 수만 명의 보병은 한 걸음씩 착실하게 나아갔다.
전투는 막힘없이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
“군가를 부르도록.”
내 명령을 부관들이 복창했다. 그러자 시민병 사천 명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사르데냐에서 태어나서 사르데냐에서 살아온 민병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은, 당연하게도 사르데냐인의 노래.
적군은 우리에게 다가올수록 당황했다. 그들은 외국인 침략자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도시를 박차고 위험천만한 전쟁터로 나온 것이었지, 동족을 살해하러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적군의 전열이 주춤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배신자는 밀라노 공작이다!”
“형제들이여, 같은 핏줄을 서로 죽이지 마라!”
“라스페치아는 버림받았다!”
아군의 민병들이 하사관을 중심으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건 아군과 적군의 전투의지를 동시에 떨어트리는 일이었다. 아군 역시 진심으로 형제와 싸우기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양측이 사기가 떨어진 와중에, 내가 이끄는 제1전열과 왕국군의 제1전열이 부딪쳤다.
“헛소리다! 놈들은 전부 배신자다!”
“동족을 배신한 놈들에게 응징하자!”
왕국군의 독전관들이 고함을 질렀다.
창칼이 요란하게 난무했다.
우리군이 진심으로 싸움을 회피하면서 천천히 뒤로 물러서자, '저건 거짓말이다!'라고 목청을 키운 독전관의 주장에도 설득력이 사라졌다.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살인하는 병사는 소수에 불과했다. 장창을 쥔 병사들의 손아귀에는 명백하게 힘이 부족했다.
이래서야 우리 제국군이든 왕국군이든, 최소한 이곳 제1전열의 접전지에서는 시간만 끌 뿐이었다. 상대편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키는 것은 한없이 연기되겠지.
그리고 라우라가 나에게 명령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지연전이었다.
“너무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지 마라! 천천히. 동료들과 확실하게 보조를 맞추면서, 하사관의 구호에 따라서 물러서는 것이다!”
나는 직접 대열 사이를 오가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지연전을 벌인다면서 한 걸음씩 물러서는 병사들이 사기를 잃어버릴 경우, 뒷걸음은 순식간에 걸음아 나 살려라 식의 후퇴로 바뀌어버렸다. '지휘관인 내가 그대들과 함께 있다'라는 사실을 강조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따금 나는 석궁을 들어서 적병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말뿐만이 아니다. 행동으로도 그대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 그렇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내 화살이 적병에 명중할 때마다 주위의 병사들이 “와아아아!” 하고 소리쳐서 호응했다.
“쏴라!”
내 모습을 발견했겠지. 왕국군 궁수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집중적으로 화살을 쐈다. 근위병들이 방패를 들고 내 몸을 가렸다.
“각하, 위험합니다! 잠시 뒤로 물러서주십시오!”
“제까짓 놈들이 날리는 것이 이쑤시개밖에 더 되겠는가. 내버려두어라.”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하여 전방에서 병사들과 함께했다. 물론 내가 대단히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 전쟁을 대비해서 투구와 갑옷에 거금을 투자하였다. 마법으로 도배된 갑주인지라 허구한 날 화살을 쏴봤자 뚫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기랄.
나는 역시 전쟁터에서는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하필이면 갑옷이 미처 보호하지 못한 왼발 허벅지 틈새로 화살이 날아들어 박혔다. 장창의 숲을 빠져나가고, 근위병의 방패를 지나서, 갑옷의 틈을 파고들어, 내 허벅지를 찌른 것이었다!
“크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굽혔다. 근위병들이 경악했다.
“각하! 젠장, 각하를 모셔라!”
“필요 없다!”
내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눈앞이 시뻘개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빌어먹을 화살이 허벅지를 꿰뚫은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마디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해라’였다. 여기서 지휘관인 내가 쓰러지면 시민병으로 구성된 제1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터.
“크읍, 크프흐흡!”
나는 화살을 잡아서 반바퀴 돌려 단숨에 빼냈다. 근육이 헤집어지는 감각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면 나는 거의 눈알이 빠질 뻔했다.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아마 내가 스스로 배를 두세 번 째본 놈이 아니었다면, 마왕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어도 두 번은 죽었다.
빌어먹을 화살! 나는 세상에서 화살이 제일 싫다!
“크아아아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무식한 방법으로 화살을 빼낸 다음 치켜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서 장검을 높이 빼들어 포효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병사들이 열광적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장군님 만세!”
“사르데냐 만세! 사르데냐 만만세!”
나는 네놈들의 장군님으로 불리기도 싫었거니와, 사르데냐 만세는 내게 어울리는 구호도 아니었다! 여하간 민병들은 자기네가 좋을 대로 함성을 쏟아냈다. 그대로 바닥에 수직낙하했을 뻔한 사기는 반등하여 하늘을 찔렀다.
내가 잠시 음성확대 마법을 꺼트리고 근위병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머저리 병신들, 아주 내가 시체가 될 때까지 넋 놓고 치켜볼 속셈이더냐!”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정말 개처럼 아프군. 빌어먹을!”
나는 품안에서 포션을 꺼내어 허벅지에 흘려보냈다. 화살촉이 살 안에 틀어박히는 사태를 막으려고 일부러 깊숙하게 반바퀴 돌려서 빼내는 짓거리까지 감행한 상태였다. 포션이 흘러갈 구멍은 충분히 넓었다.
“쓰읍. 푸흐으으……끄으읍!”
포션이 상처에 스며들어서 제2차 고통을 유발하는 가운데, 나는 허벅지에 화살이 스치거나 틀어박힌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며, 자그마치 세 번째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리프의 모험대한테 한 번. 로젠베르크 변경백의 궁기병한테 한 번. 이번이 세 번째였다!
평생 살면서 화살촉이 내 신체에 접촉한 것이 세 번인데 세 번 모두 허벅지와 딥키스를 나누었다. 전생에 화살촉과 허벅지 사이에 도저히 상상도 못할 로맨스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덕택에 고통은 내가 옴팡지게 독박을 쓰고 있으니 민폐가 따로 없었다. 죽일 것들.
내가 엘프 근위병들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보았다.
“너희는……되었다. 일단 전투가 끝나고 보겠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근위병들은 어찌나 당황했는지 군중에서 나를 전하가 아니라 각하라 불러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나를 떠받들어줌으로써 어떻게든 내가 내릴 처벌을 가볍게 만들려고 했던가.
나도 알고 있었다. 근위병들한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방금 화살은 지독한 우연을 뚫고 내 허벅지를 강간한 것이었다. 단지 고통에 눈이 뒤집히면 아무한테나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후우.”
내가 가볍게 숨을 쉬고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내가 위치한 제1전열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보병대가 접전에 돌입했다. 우리를 제외한 아군 보병대는 당연하지만 시민병이 아니었다. 고로 동족의식에 의해 주저하고 있는 이쪽과 달리, 매우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나갔다.
다음으로 나는 좌익과 우익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좌익. 그러니까 앙리에타 여왕이 담당한 구역은 이미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좌익에서 맞붙은 양군의 기병대 숫자가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르타뉴 기병대는 적군을 일격에 분쇄해버렸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좌익에 시체 이외에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이었다. 적군은 이미 저 후방 너머로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브르타뉴 기병대가 뒤를 바짝 쫓았다. 행여라도 적들이 재집결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짓밟으려는 심산이겠지.
“쯧, 화살 맞은 보람은 있구만.”
내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망원경을 정반대편으로 돌렸다.
우익.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담당한 구역에서는 아직 기병전이 한창이었다. 다만 척 보기에도 아군의 병력이 적에 비해 두 배는 많았다. 얼마 가지 않아서 정리될 듯싶었다. 이제부터 이변이 없는 이상, 기병전은 우리가 압승을 거두었다고 봐도 좋으리라.
“저, 전하!”
“공작 전하!”
내가 전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다시 지휘에 나서려고 했을 때, 뒤쪽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워졌다. 등을 돌아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총사령관으로서 중군에 있어야 할 라우라가 부관들을 데리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 아닌가.
“라우라!”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일입니까! 총사령관이 왜 여기 있습니까!”
“…….”
라우라는 말에서 내리더니 다짜고짜 나에게 안겨왔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라우라가 중얼거렸다.
“주, 주군……주군…….”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어조였다. 그날 밤, 라우라가 모든 것을 내게 떠맡겼을 때의 목소리와 울림이 똑같았다.
내가 고개를 돌려서 근위병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당장 우리 두 사람을 가려라, 하고 마왕의 능력을 사용해서 명령했다. 근위병들은 그래도 눈치가 있었는지 얼른 망토를 펼쳤다. 그리고 라우라와 나를 넓게 둘러싸서 바깥의 시선을 차단했다.
“주군……흐윽, 무사해서 다행이다…….”
“라우라. 진정하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내가 라우라의 등을 쓸어주면서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우리 두 사람은 땅바닥에 꿇어 앉아서 서로를 껴안은 자세가 되었다. 라우라는 내 흉갑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군이 화살에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나, 머리가 새하얘져서……그래서…….”
“괜찮습니다. 자아, 보세요. 저는 마왕이지 않습니까.”
내가 차분하게 속삭였다. 사실 아직도 허벅지가 격렬하게 욱씬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마치 라우라의 울음소리에 사고가 화악 각성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의 생각과 허벅지의 고통이 분리되었고, 나는 얼마든지 평소처럼 목소리를 꾸며낼 수가 있었다.
“웬만한 상처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습니다. 라우라. 당신의 주군은 생명이 질긴 남자입니다. 이 정도로 죽을 것 같았다면 이미 진즉에 세 번은 죽었습니다.”
“다행이다……주군이 마왕이라서 정말로 다행이다…….”
나는 손으로 라우라의 눈물을 닦았다. 내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라우라는 좀처럼 눈물을 멈추지 않았지만, 내가 계속해서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자, 간신히 진정하기 시작했다.
“아직 전투가 끝나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그렇지요?”
“……으응.”
“저를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정말로 절 위한다면 전투에서 이겨야 합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세요. 부관들이 많이 불안해 하고 있을 겁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두 사람은 입술을 맞추었다. 바로 옆에서 쇠가 쇠를 긁는 소리, 방패가 방패를 밀어내는 소리, 핏물에 잠긴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입술을 떼었다. 내가 빙그레 웃었다.
“믿고 있습니다. 라우라.”
그제야 라우라는 푸른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응. 주군.”
라우라가 다시 중군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이 순간 나에게 정말로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던 점은, 전쟁의 함성이 너무도 가까이서 들린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정말로 화가 났다. 모든 것이 시끄러웠다. 창, 방패, 말발굽, 병사, 각자가 최선을 다하여 최대한의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시끄러웠다…….
“…….”
어째서인지 근위병들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대들의 눈치가 목숨을 살릴 줄 알거라.”
어디 가서 너희가 본 광경을 발설하기라도 하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릴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적어도 내 진의를 알아들을 머리는 가지고 있었는지, 근위병들이 큰소리로 “예, 전하!”라고 소리쳤다.
나는 시선을 전장으로 돌렸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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