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87화 (387/510)

00387 죽은 귀족의 국가  =========================================================================

“자기 발로 사지에 걸어왔다?”

“하나는 보고 다른 하나는 보지 못한 것이지요. 사방이 막힌 데 없이 훤히 뚫린 평야라는 것은, 그만큼 기병을 운용하기에 제격이라는 얘기입니다.”

보병만 보자면 사르데냐 왕국군은 우리에 비해 두 배 많았다.

그러나 기병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우리군이 왕국군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밀라노 공작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평야를 전장으로 골랐다지만 실상은 약점을 강화해버린 꼴이었다.

“밀라노 공작도 기병이 취약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겁니다. 따라서, 공작이 내세울 작전의 주요 골자는 어떻게든 최대한 우리의 기병을 버텨내는 것. 그리고 만약에 대비해서 기병이 돌격해와도 방어할 수 있도록 배후에 정예 보병을 배치하는 것…….”

반면에 우리 제국군은 최대한 적군의 보병을 버텨내는 것이 목표였다.

왕국군이 제국군의 기병에 붕괴되는 것이 먼저인가. 제국군이 왕국군의 보병에 압살당하는 것이 먼저인가. 그 결말에 따라서 회전 전체가 결정되었다.

“허면.”

앙리에타 여왕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과인의 기병에 승패가 달린 게로군.”

“그렇습니다, 여왕이시여.”

“이렇게 말하는 것도 뭣하다마는, 명운을 과인에게 내맡겨도 괜찮겠는가. 결국은 타국의 군대에 불과하다. 만약 과인이 그대를 배신한다면 손 쓸 도리가 없이 패퇴할 터.”

여왕의 말에 오히려 주변 지휘관들이 더 당황했다. 전하! 하고 소리 내서 제지하는 장수도 있었다. 라우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라우라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여왕께서는 배신하시지 않습니다.”

“호오. 어째서?”

“여왕께서 배신하신다고, 단탈리안 궁중백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아?”

어떤 대답이 나올까 기대하던 앙리에타의 눈빛이 순식간에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러건 말건 라우라가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본관은 정치에 무지합니다. 하지만 궁중백은 아닙니다. 만약 여왕께서 배신하실 마음이 있었다면 궁중백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궁중백은 저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고, 따라서 저는 여왕님을 완전하게 신뢰합니다.”

“뭐…….”

“배신할 리 없다는 사실이 분명한 이상, 브르타뉴의 기병은 저에게 있어 단지 매우 믿음직스러운 전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투의 명운을 가장 강력한 전력에 맡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라우라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질문할 것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 시선이었다. 총사령관의 발언에 막사 안에서는 누구나 말문이 틀어막혀 있었다. 라우라는 몇 가지를 더 설명하고 “그럼 회의는 여기서 끝내겠다” 하고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단탈리안.”

앙리에타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참고로 앙리에타는 나를 궁중백이라고 부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은 마왕에게 패배한 것이지, 제국의 궁중백 따위에게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말씀하시지요.”

“그대는, 무어라 해야 할까. 정말이지 죄가 깊은 남자로군.”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칭찬입니까, 전하?”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소리다.”

라우라. 큰일났습니다. 방금 발언으로 여왕이 배신할 확률이 1% 늘었어요.

*  *  *

다음날 아침, 왕국군 진영에서 아침부터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본래 이길 자신이 강할수록 전투를 빨리 시작했다. 빨리 해치우고 빨리 집에 가자, 라는 마인드는 아니었다. 단지 승리하고 난 이후에 적군을 보다 쉽게 추격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전투가 밤늦게 가서야 끝난다면 추격전 역시 밤새도록 이어지게 되었다. 밤은 추격하기 썩 좋은 시간대가 아니었으며, 패잔병이 야음을 틈타서 도망치기에도 편했다. 밀라노 공작은 우리보다 먼저 나팔을 불었다. 승리할 자신이 충만하다는 소리였다.

아침 여덟 시. 가을 공기가 선선하게 내려앉은 가운데, 양군은 군사를 정렬시켰다.

나는 이번 전쟁에서 제일 위험한 장소에 말을 타고 있었다. 바로 제국군의 제1전열이었다. 아군의 목표가 적군 보병을 막아내는 것인 이상, 그 보병을 제일 처음으로 맞이해야 하는 이곳은 최대 격전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저한테는 너무 무거운 짐입니다, 라우라.”

내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간이 망원경으로 평원 저편을 내다보았다. 인간, 인간, 그리고 또 다시 많은 인간. 어디를 어떻게 봐도 인간이 득실거렸다.

월맹군 전쟁 이후로 이렇게 많은 적군을 대하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전투 직전에는 가슴이 뒤숭숭했다. 나는 언제나 전투를 앞두었을 때 마음이 불안해졌다. 전쟁은 정치와 달랐다. 변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글쎄, 라우라는 정반대로 말하려나…….

─ 사르데냐여, 외국의 압제에 대항하여 일어서라!

대규모 전투라서 그런지 연설전이 이루어졌다.

멋들어지게 늙었다 싶은 신사가 대형으로 투영되어서 연설을 펼쳤다. 투영마법에 번역마법이 동반되는 연설전은 마법사가 일정 이상 확보되어야만 부릴 수 있는 사치였다.

밀라노 공작은 목소리가 중저음에다 기본 바탕에 힘이 있었다. 좋은 정치인이 될 인상이었다. 내 말은, 거짓말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순둥이처럼 '아, 저 사람은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거짓말했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여줄 만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공작은 꽤나 멋진 말을 아주 멋진 말로 꾸며낼 줄 알았다. 격조가 있었고, 적절한 울림이 있었으며, 애국심과 애향심을 교묘하게 부추겼다.

“오오오.”

모처럼 멋진 연설을 들었다. 다 끝나고 났을 때는 내가 손뼉을 쳤을 정도였다. 주변에서 병사들이 ‘각하……? 진짜로……? 지금 진짜 진심으로 박수 치고 계신 건가요?’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차마 지휘관이라서 병신이라 욕하지는 못하겠다 싶은 얼굴들이었다. 왜. 자고로 예술작품에는 적아가 없는 법이거늘.

─ 제군들.

우리측 연설자로는 내가 아니라 앙리에타 여왕이 나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총사령관을 라우라가 가져간 만큼, 얼굴 마담 정도는 여왕한테 양보해줄 필요가 있었다. 앙리에타도 브르타뉴로 돌아가서 대외적으로 자랑할 거리가 있어야지 않겠는가.

앙리에타도 목소리가 제법 고왔다. 엘리자베트에 비하면 약간 거칠지만 충분히 멋진 연설을 해내리라. 나는 느긋하게 앙리에타 여왕의 연설을 기다렸다.

─ 지금 저기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문둥병 환자에 창녀가 뒷간에서 낳은 자식, 뼈마디란 뼈마디는 죄다 쉬어빠진 시금치마냥 구부러진 노친네보다 역겨운 놈은 없다.

“푸우웁!”

그리고 첫 마디를 듣자마자 성대하게 침을 뿜어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나도 모르게 뒤쪽을 바라보았다. 큼직하게 투영된 앙리에타가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는가.

─ 저 노친네는 치매에 걸린 나머지 자기가 어디에 왔는지도 모르고 푸짐하게 똥을 싸갈기고 있다.

잘못 듣지 않았다! 정말로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똥이니 뭐니 말하고 있었다!

─ 아마도 우리가 친히 이곳이 노인을 위해 지어진 화장실이 아니라 전쟁터임을 알려줘야만 정신머리를 차릴 텐데, 안타깝게도 그때 가서는 또 공포와 두려움에 떨어대며 오줌을 질질 흘리고 말 것이므로, 저 노인은 기어코 이곳 말레딕투스 평원을 자기 전용 화장실로 만들어버릴 운명이다. 오, 여신들이시여! 벌써부터 똥냄새가 내 콧구멍까지 퍼져오는구나.

병사들이 깔깔 웃었다.

특히나 브르타뉴 군사의 웃음소리가 컸다. 그들에게는 여왕의 저런 말투가 익숙한 듯싶었다. 다른 병사들도 서서히 웃음에 전염되었는데, 대체로 투박하게 살아온 그들에게는 오히려 여왕의 연설이 성격에 맞았는지 “우오오오오!”라고 환호성을 질러 화답했다.

─ 적군은 아침에 발기도 제대로 안 될 것이 분명한 노친네를 우두머리 대표랍시고 내보냈다. 말인즉슨 저기 옹기종기 모여든 놈들은 죄다 발기부전에 걸린 머저리 병신 집단이라는 이야기다. 제군들, 솔직히 과인은 여태까지 수없이 많은 수컷을 만나보았지만 저것들처럼 불알이 볼품없이 쪼그라든 개들은 만나본 적이 없음을 고백하노라.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대놓고 휘파람을 부는 병사도 있었고, 여왕에 호응하여 적군을 향해서 온갖 음담패설과 쌍욕을 내뱉는 병사도 있었다.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 저들은 밤기술이 너무 형편없는 나머지 부인들한테 두들겨 맞아 여기까지 도망쳐온 것이 분명하다. 제군들! 적어도 우리는 자기 아내한테 처맞고 사는 병신들에게 패배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다!

우아아아, 하고 군사들이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 확실히 저들은 우리보다 머릿수가 많다! 그보다 확실한 것은 저들 하나하나가 제군의 불알 한짝보다 덜 떨어지는 머저리라는 사실이다!

앙리에타가 허리춤에서 장검을 꺼내들어 정면으로 겨누었다.

─ 반면에 제군들은 진정한 사나이며, 저쪽에 바글거리는 내시 새끼들과 다르게 훌륭한 불알을 두 개씩 가지고 있다! 가서 놈들에게 진짜 남자가 무엇인지 보여주도록 하라! 전군! 전진하라!

함성이 절정에 달했다.

각 부대들이 전통적으로 내려가진 뿔나팔을 무질서하게 불어댔다. 북소리가 무박자의 박자로 신나게 울렸고, 악기가 없는 병사들은 발을 굴러서 온 신체를 대신 악기로 만들었다.

“……아니. 뭐. 일국의 여왕이.”

나는 반쯤 헛웃음을 지었다. 밀라노 공작이 기껏 신사적이고 낭만적으로 깔아두었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 엘리자베트가 브루노 평원에서 보여준 명연설에 비하면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효과적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격이 불꽃처럼 종잡을 수 없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왕 전하인가. 왜 군사들에게 인기가 그리 많은지 이해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야…….

초반 기선 제압을 이쪽이 가져간 상황에서, 양군이 서로 점점 가까워졌다.

먼저 좌익에서 기병들끼리 맞붙었다.

어제 라우라가 설명한 것이 떠올랐다.

‘아마도 적군은 좌익에 가장 정예인 기병들을 배치할 것이다.’

‘좌익은 강줄기에 접해 있다. 그만큼 전장이 제한되어 있고, 지반이 비교적 물렁하지.’

‘밀라노 공작의 목적은 기병전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패배하지 않는 것이다. 우익과 좌익, 어느 한 쪽이라도 오랫동안 버텨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터.’

그렇기에 왕국군은 기병전에 불리한 지형에다 오히려 정예병을 배치시킨다. 라우라는 그렇게 예측했다.

‘고로, 아군 역시 좌익에 최정예 기병을 투입한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단 한방에 싹 쓸어버려라.’

좌익의 기병대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롱그위 성녀가 축복을 내린 것이었다.

그렇다. 현재 아군의 좌익을 담당한 기병대는 다름 아니라 브르타뉴군. 여왕 앙리에타가 직접 이끄는 기병 오천 명이었다.

이에 대항해서 요격하러 나온 왕국군의 기병대는, 군기를 보아 짐작하건대 소수의 기사단과 대다수의 다국적 용병. 시민병이 주력인 왕국군에 있어 틀림없이 가장 듬직한 전력이겠지.

브르타뉴군과 왕국군이 강가에서 충돌했다. 나는 망원경으로 슬쩍 기병전을 구경해보았다. 창과 창이 엇갈리면서 병사의 가슴팍을 꿰뚫어버렸고, 휘어진 칼에 몸이 찢긴 병사가 말에서 떨어져 사정없이 굴렀다.

“흐음.”

나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었다. 더 살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상대가 안 되는군.”

브르타뉴군의 압승이었다.

왕국군은 단 한 차례의 충돌에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NineBreaker// 이제 와서 평범하신 척하셔도...(어깨 으쓱)

asd메이지// 스포르차 가문의 상징이 레비아탄입니다. 불쌍하게도...

벌레// 비너스 안 나옵니다. 진히로인 아닙니다.(...)

프롤마룬// 착각입니다! 그거 착각입니다!

수천천사// 얍얍.

xusaku// 헉헉.

TheDaybreak// 감사합니다.

물고기인간// 사람머리, 라고 하니까 말씀드리자면 라우라는 요새 수집품이 많아져서 좋아하고 있습니다.

kodks// 감사합니다.

누구셧더람// 야호?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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