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86화 (386/510)

00386 죽은 귀족의 국가  =========================================================================

밀라노 공작도 이런 시점에서 총사령관이 되기 싫었겠지.

본의가 아니게 떠맡았다. 그런 분위기였다. 피렌체 대공이 패사하고 엘리자베트 통령이 퇴진한 지금, 사르데냐의 모든 도시가 기꺼이 복종할 만한 가문은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밖에 남지 않았다.

실력이 있지만 격이 낮은 가문. 격은 높지만 실력이 낮은 가문. 어느 쪽도 문제를 일으킬 공산이 높았다. 당연했다.

총사령관이란 “전쟁터를 향해 몸을 던져라” 하고 명령을 내리는 지위다. 전쟁터는 언제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이 병사이거나 장군이라고 해보자. 고작 무능력한 총사령관 때문에 자신이 개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과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납득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격도 마찬가지다. 자신보다 역사도 짧고 명성도 없는 가문 출신의 총사령관 때문에 나 자신의 인생이 종결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실력주의라든지 혈연주의라든지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고 싶지 않고,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스포르차 가문. 그렇기에 밀라노 공작이다.

한 인간이 50년, 아니 20년이라도 명망을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유혹에 기꺼이 넘어갈 수도 있다. 상대방의 모략에 걸려 좌절할 수도 있다. 그걸 스포르차 가문은 300년이 넘도록 견뎌냈다.

명예.

오로지 극소수의 가문만이 이 두 글자를 가문기(旗)에 새겨넣을 수 있었고,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더불어서 그러한 극소수에 해당했다. 귀족들은 기꺼이 그들의 위엄에 복종했다. 그들이 전쟁터에서 죽으라고 명령하면 진지하게 '고려'해볼 수가 있었다.

사르데냐 왕국을 지키는 두 마리의 수호신, 검독수리와 레비아탄. 그중 검독수리는 라프페치아의 앞바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레비아탄이 똬리를 풀고 포효해야만 했다…….

밀라노 공작은 비록 단기결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또한 '그까짓 개인적인 이유'로 자신의 책임감에서 눈을 돌릴 인물이 아니었다.

─ 왕국 전토에 총동원령을 내린다!

─ 모든 도시 의회는 즉각 시민병에 대한 지휘권을 본인에게 양도하라.

─ 사르데냐인이여. 집결하라!

비상령이 왕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밀라노 공작은 더 이상 빠른 시일 안에 용병을 모으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는 각 도시를 수비하는 시민병을 끌어모았다. 비록 시민병이 용병에 비해서 사기가 낮고 실력도 뒤떨어진다지만, 질은 양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트 통령의 진퇴를 두고 갑론을박한 것이 언제였냐는 듯, 사르데냐 왕국은 밀라노 공작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시민병들도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우리 제국군이 무자비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당할 뿐, 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아마 밀라노 공작이 뒤에서 획책했겠지. 제국은 갓난아기의 내장을 즐겨 먹는다든지,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횡행했다.

하지만 효과적이었다.

약탈로 인해 주전파의 목청이 한껏 커진 상황. 귀족이고 시민이고 가리지 않고 어서 전쟁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사정. 여기에 밀라노 공작의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술책이 더해졌다.

총동원령에 의해 모집된 병력은 자그마치 4만 명.

여기에 다국적 용병으로 구성된 정예병 1만을 더하여, 밀라노 공작은 이례적인 속도로 5만 대군을 조직해냈다.

허겁지겁 숫자만 불린 오합잡졸이 아니었다. 제대로 지휘관과 지역에 따라 편성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군대였다. 사르데냐 전역에서 영주귀족들이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 하는 각오였다.

그동안 우리 제국군은 뭘 했느냐면――.

“공작 전하. 산마리노는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어렵게 생각할 게 어디 있나. 불태워버려라.”

열심히 약탈했다.

아아, 말 그대로 꾸준하고도 집요하게 약탈했다.

사냥도 그렇거니와 약탈은 부대들 간에 협동을 길러준다. 우리 제국군에는 이번에 브르타뉴 왕국군이 새로이 들어왔다. 대대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부터 브르타뉴군과 박자를 맞춰야 했다.

브르타뉴군뿐만이 아니다. 라우라는 적군이 무서운 기세로 민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 보험을 들어두어야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즉시 피아센차-파르마-라스페치아 일대에서 시민병을 뽑았다. 그중에는 약탈과 살인이 두려워서 우리에게 투항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이리하여 3,900여 명의 시민병을 마련했다.

“제국이 패배하면 왕국이 배신자인 그대들을 얌전히 놔둘 리 없다”, “로디 후작의 최후를 보아라. 배신자의 말로란 저런 것이다”, “얌전히 기다려서 죽든지 싸워서 살아남든지 선택하도록”, 등등. 시민병들에게 동기를 불어넣은 몫은 나에게 떨어졌다.

이래 봬도 나는 시민병 전문 지휘관이었다. 프랑크의 백합 전쟁에서 유일하게 패퇴하지 않은 부대가 바로 내 지휘 아래 분투한 농민병이지 않았는가. 내 선동과 통솔에 시민병은 금세 단련되었다.

우리군은 사르데냐 왕국을 불사르고 돌아다녔다.

밀라노 공작은 현명하게 대처했다. 제아무리 우리가 심각하게 약탈을 행하여도 절대 응전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다만 우리군이 노리려 하는 도시마다 마법대만 급파했다. 우리에게는 공성장비가 전무했고, 마법전력에서 압도하지 못하는 이상 공성전을 치르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었다. 밀라노 공작의 기민한 대응 때문에 우리군은 도시 일대를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릴 수 있었어도, 도시 자체를 함락하지는 못했다.

3주일이 지났다.

마침내 밀라노 공작이 움직였다.

공작은 해군을 이용해서 5만 대군을 성공리에 집결시켰다. 5만 명 이상의 대군이 평원에 집결한 광경을 한번이라도 구경했다면 알 것이다. 그건 세상에서 제일 겁쟁이인 인간도 일당백의 용사가 되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왕국군이 용기백배해서 진군했다. 이에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회전은 우리야말로 바라는 바다. 지옥을 보여주겠다.”

라우라의 명령에 아군 3만이 일제히 전진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몇 번이나 거두어온 라우라는 헬베티카 용병들에게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앙리에타 여왕과 브르타뉴 왕국군도 얌전히 명령에 따랐다. 이들은 천성이 전사에 가까웠고, 전사는 자신을 패배시킨 적수를 누구보다도 존중했다.

대륙력 10월 10일.

현자-말레딕투스 평원에서 양군이 마주했다.

평원에는 파두스 강이 흘렀다. 나는 지명을 일일이 기억함으로써 내 뇌수를 스트레스에 휩싸이도록 만들 생각이 없었으므로, 단지 '큰 강'이라고 개인적으로 명명했다. '큰 강'은 여러모로 훌륭한 이름이었다. 일단 외우기 쉬웠다.

거기에 우리군이 전투를 치른 티키누스 강과 트레비아 강, 그러니까 파비아 백작이 야습에 사망해버린 곳과 피렌체 대공이 군대를 말아버린 곳, 두 강줄기가 모두 이 '큰 강'의 지류에 속했다.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앞으로 수천 년 동안 '큰 강'은 파두스 강 따위로 불리지 않을 것이다.

저주받은 강줄기, 피로 물든 강, 절망과 한탄의 강, 그런 이름으로 회자되리라. 사르데냐 왕국의 멸망이 이 강물과 함께하리니. 적군이 두 배에 가까운 현재 상황에서도 나는 확신했다.

양군이 대치한 가운데, 라우라가 최종회의를 열었다.

“…….”

“…….”

막사에 헬베티카 용병대장들과 브르타뉴측 지휘관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일국의 여왕인 앙리에타가 자리하자 다들 조금씩 삼가는 분위기였다.

놀랍게도 라우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앙리에타를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총사령관이 제일 늦게 들어오는 것이 관례라고 해도 '감히 여왕 전하를……' 하는 공기가 브르타뉴측에서 감돌았다. 뭐, 정작 앙리에타 본인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데 파르네세 공작께서 드십니다!”

경비병이 우렁차게 말했다. 자리에서 전원이 기립했다.

라우라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한 발걸음으로 걸어왔다. 몇몇 지휘관들은 얼굴이 묘해졌다. 스물두 살의 여공작. 아직 애송이 티가 벗겨지지 않을 나이. 하지만 전 대륙에 군사적 명성을 휘날리고 있었다. 40대, 50대의 지휘관이 보기에는 어떤 느낌일까…….

“모두 자리에 앉도록. 아군은 다음과 같이 진형을 짠다.”

라우라가 군례를 올리자마자 본론에 들어갔다. 용병대장들이 익숙하다는 듯 의자에 앉았다. 브르타뉴의 지휘관들도 약간 당황했지만 군말 없이 착석했다. 우두머리인 앙리에타 여왕이 한결같이 차분한 덕택이었다.

“보통 일렬로 보병을 배치하는 것이 정석이겠으나.”

라우라가 탁상의 지도에서 점토를 옮겼다.

잠시 뒤, 아군의 보병을 가리키는 점토들이 고르게 배열되었다. 일렬이 아니었다. 마치 반달처럼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아니, 세모꼴 ▷ 모양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전투에 한해서 다소 변칙적인 진용을 꾸린다.”

“…….”

장수들이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총사령관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앙리에타 여왕이 입술을 열었다.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인가?”

“그렇습니다. 적군의 보병은 아군에 비하여 두 배 이상 많습니다. 단기전이 되면 적군이 유리합니다.”

“조금 도박성이 짙군…….”

앙리에타가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머릿속으로 전투를 그려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진영을 배치하면, 잠시나마 가장 앞에 선 제1열이 적군의 공격을 전부 받아내야 된다. 자칫 잘못해서 제1전열이 녹아버리면 삽시간에 중앙이 뚫려버려지. 상당한 정예병을 배치해야 할 것이다.”

“아니요.”

라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제1전열은 시민병이 담당합니다.”

“하아? 징집병이?”

앙리에타 여왕이 미간을 좁혔다.

“순식간에 패퇴할 터인데.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간단합니다. 적군의 주력 또한 시민병입니다. 동족인 사르데냐인과 싸우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격하되, 적극적으로 공격하려 들지 않겠지요.”

“……과연. 동족상잔을 일으키는 것인가.”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군에는 사르데냐인 민병뿐만이 아니라 외국 출신의 용병도 있다. 그들이 적군의 제1전열로 나오면, 작전은 통용되지 않아.”

“밀라노 공작은 용병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하지?”

그때 라우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저거다. 라우라가 전쟁터에서 무척 안 좋은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항상 저런 미소가 튀어나왔다. 아마도 나를 보고 배운 습관인 것 같았는데, 개인적으로 약간의 책임감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라우라를 잘못 교육했다니까.

“왜냐하면, 여왕 전하. 밀라노 공작이 '똑똑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앙리에타를 비롯해서 지휘관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무릇 현명한 인간은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는 법입니다. 밀라노 공작은 어째서 왕국군이 연전연패했는가 철저하게 분석하겠지요. 그건 공작이 전쟁터로 이곳, 현자-말레딕투스 평원을 선택했다는 것에서 이미 엿보입니다.”

라우라가 손으로 원을 그리면서 지도를 쓰윽 훑었다.

“보십시오. 여기 근처에는 산자락이나 둔턱, 하다못해 어느 정도 큰 숲도 없습니다. 사방이 훤하게 뚫린 평야입니다. 적군은 티키누스, 트레비아, 양 전투에서 모두 우리 제국군의 매복에 걸려서 패배했습니다.”

“…….”

“밀라노 공작은 이렇게 판단했겠지요. 제국의 특기, 아니 파르네세 공작의 특기는 복병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아예 매복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

“음.”

앙리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노 공작이 의도적으로 현자-말레딕투스 평야를 전장으로 선택했다. 그 추측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상대의 강점을 봉인한다. 확실히 병법의 기본입니다만…….”

라우라가 재차 짙게 웃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기본이라는 것이지요. 밀라노 공작은 제 발로 사지(死地)에 걸어 나왔습니다.”

============================ 작품 후기 ============================

설정란에 지도를 올립니다.

[리리플]

NineBreaker// 예, 전쟁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단탈리안한테 좋지요. 단탈리안이 세계에 출현한 이후, 대륙에서 벌어진 모든 국가전은 단탈리안이 조장했습니다.(...)

클리너63// 엄청 많이 보내시잖아요. 제가 늦게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asd메이지// 옙, 엘리자베트와 단탈리안의 무도를 장식해줄 거대 케이크 맞습니다.

프롤마룬// 엘리자베트는 괴롭혀지기 위한 인물이 아닙니다...!

물고기인간// 글쎄요. 단탈리안의 목 정도 아닐까요. ^o^

TheDaybreak// 감사합니다.

아침새// 적군을 이기기 힘들다면 함께 갈라 먹으면 된다, 라는 매우 심플한 결론입니다.

T검은 날개T// 캬캬.

메이사이// 아뇨, 간당간당하게 세이프이십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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