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85화 (385/510)
  • 00385 양웅(兩雄)의 조우  =========================================================================

    “적군을 제대로 포위하지도 못하다니!”

    “언제까지 외국인 용병에게 왕국의 안위를 맡길 셈인가!”

    엘리자베트 전략에 피해를 입은 신민을 중심으로 비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새화된 도시들도 공식적으로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약탈과 방화에 살 곳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대거 도시에 피난을 왔고, 이들을 껴안느라 도시의 치안과 환경이 빠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왜 비(非) 시민을 부양하는 데 도시의 자금이 소모되어야 하는가. 실향민이 부랑자가 되어 도시의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는데 왕국 중앙은 언제까지 지구전을 고집할 속셈인가. 애당초, 외국인에게 통솔권이 넘어가 있는 현재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이런저런 불만이 폭발해서 엘리자베트의 입지를 공격했다.

    사르데냐 왕실은 입장이 곤란해졌다. 딱히 왕실이 좋아서 지구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다. 파비아 함락, 피아센차-파르마 항복, 라스페치아 항복, 제노바 함락, 연달아서 불행이 일어나는 가운데, 왕실은 또 다시 회전을 벌일 능력이 부족했다.

    외국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지구전은 최악의 상황을 넘어가기 위한 차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거점들을 제외하고 아국의 영토를 일시 포기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구전을 입안하는 자는 누가 되었든지 어마어마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여기서 엘리자베트가 나섰겠지. ‘본인은 어차피 외국인. 비난을 짊어져도 잃을 정치적 지위도 없다. 백성의 불평은 본인이 동맹국을 대신해서 짊어지겠다…….’

    다만, 불평의 수준이 너무도 심각했다.

    대륙력 1512년 9월 17일. 엘리자베트를 총사령관 지위에서 끌어내리느냐 마느냐를 두고 사르데냐 전체가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을 때, 제노바에는 일단의 병력이 상륙했다.

    “사르데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여왕 전하.”

    “그대에게 받는 환영 인사만큼 불안한 것도 없는걸.”

    브르타뉴 왕국의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가 이끄는 병력이 닻을 내렸다. 그 숫자는 오천. 대국을 결정하기에는 부족하다 싶은 규모이겠으나, 나는 진심으로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왜냐하면 오천이 전원 기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브르타뉴 왕국의 기병이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전력인지는 내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브르타뉴의 기병은 보병이 지원해주지 않아도 단독으로 적군을 깨부수는 것이 가능했으며, 무척 고상한 단어로는 '깡패'라고 불렸다.

    “전하께서 왕림하시니 이미 전쟁이 끝난 기분이 듭니다. 야아,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니까 이토록 든든하군요.”

    “낯짝이 두껍기는 여전하네. 다른 의미로 안심이야.”

    앙리에타 여왕이 어이가 없는 듯 피식거렸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지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에 생기가 조금 부족했다.

    의외로 화기애애한 우리 두 사람과 다르게, 여왕 뒤쪽에 서 있는 장수들은 날 악마라도 보는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모두 브르타뉴 왕국군의 지휘관이었다. 저들에게 나는 자국을 쇠퇴시킨 장본인이요, 당장 처죽이고 싶은 인물 제1순위에 해당하겠지.

    “허허. 다들 뭐 그렇게 얼굴이 심각하십니까. 앞으로 같은 동료로서 무수한 난관을 거쳐갈 사이인데 서로 웃고 삽시다. 자아, 미소. 활짝 미소.”

    “…….”

    내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지휘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지휘관들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항해한 나머지 오줌이 심하게 마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불쌍하군.

    참고로 나는 이렇게 패배한 개들이 쳐다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사랑한다고 해도 좋았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을 가지는 보람이 아니겠는가?

    내 뒤쪽에서 롱그위 성녀가 한숨을 쉬었다.

    “여러분. 궁중백의 말이 옳아요. 아군끼리 분열해봤자 좋아할 사람은 적뿐입니다. 여기서는 잠깐이라도 과거의 원한을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 왕국에 이익이 된다고, 이 천녀는 생각합니다.”

    “성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과연 아테나 여신의 독실한 신자들이라고 할까. 성녀가 한 마디 거드니까 마지못해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나는 여왕이나 성녀처럼 사령관급의 인물이랑 소통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없었다.

    하루 동안 여독을 풀고 난 다음, 앙리에타 여왕은 나와 독대했다.

    “전황은 보고받았어. 엘리제가 꽤 난감한 상황에 놓인 모양이던데.”

    “간교하고 또 악랄한 수법이지요.”

    “음?”

    앙리에타가 포도주잔을 들고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뜻이야?”

    “엘리자베트 통령은 일부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일부러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킨다니…….”

    여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단탈리안이여.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구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엘리자베트가 정말로 사르데냐를 구원할 생각이라면 아나톨리아 제국을 노골적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향후, 사르데냐는 설령 전쟁에 승리할지라도 아나톨리아의 그림자에서 살게 됩니다.”

    유일한 동맹국이 괴뢰로 전락해버린다. 엘리자베트는 어째서 그런 악수를 두었는가.

    “엘리자베트는 외교 파트너를 갈아치운 것입니다, 여왕 전하.”

    “사르데냐에서 아나톨리아로……과연, 그런 것이었나.”

    “그렇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톨리아가 맨입으로 엘리자베트를 도와줄 리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조건은 베네치아를 할양받는 것, 최대한의 조건은……아마도 사르데냐의 분열 및 패망. 그리하여 사르데냐 전체가 아나톨리아 제국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

    앙리에타가 낮게 신음했다.

    “악마의 수법이다. 동맹국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나락으로 이끌다니.”

    “대신에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훨씬 더 든든한 맹방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아나톨리아라는 대국을. 최고의 한수 아닙니까?”

    “…….”

    앙리에타는 점점 더 안색이 어두워졌다. 얼마나 더러운 전쟁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다. 지금 이 땅에는 동맹에 대한 의리도, 타국에 대한 예의도, 민중에 대한 배려도 없다. 기만과 거짓이 횡행할 뿐이다. 엘리자베트도 나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여왕. 당신도 다르지 않습니다. 브르타뉴를 위해서 여기까지 오신 것이지요? 사르데냐의 시체를 양분으로 삼아 브르타뉴에 공급하는 것입니다.”

    “…….”

    “아니, 정확하게는 브르타뉴도 아니죠. 당신의 왕권입니다. 이번 원정에서 성공함으로써 아직 전하의 군사적 역량이 건재함을 알리고, 브르타뉴 국내의 불만을 잠재운다.”

    내가 웃었다.

    “훌륭한 외도입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하는 군주의 표본이군요. 아, 비웃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친구와 친구는 서로 닮은 꼴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대의 말이 맞아.”

    앙리에타가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킨 다음 말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오직 국가일 뿐.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국가는 필요없어. 브르타뉴는 나의 것이고, 그렇기에 브르타뉴의 영광은 나의 영광이지.”

    “솔직해서 좋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무엇을 위하고 있는 거지?”

    앙리에타가 내 눈을 노려보았다.

    “합스부르크는 제국과 공화국으로 분열되었다. 프랑크 제국은 중앙과 지방으로 분열되었어. 이제 그대는 사르데냐를 산산조각내려 하고 있지. 단탈리안. 그대는 발을 밟는 곳마다 분열을 흩뿌리고 다닌다. ……무엇을 어디까지 노리는 것이냐.”

    내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 모든 인류의 분열이다.

    프랑크가 브르타뉴를 증오한다. 브르타뉴가 바타비아를 증오한다. 사르데냐는 브르타뉴를 증오한다. 각자의 사정이 뒤엉키고 충돌하여,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서로를 격렬하게 증오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때.

    우리 마왕군은 대륙을 점령할 것이다.

    더 이상 예전의 마왕군이 아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미명 아래 내가 배후에서 지배하는 마왕군이다. 그리고…….

    “제가 이번 전쟁을 일으킨 이유.”

    “음?”

    “당초 목적은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대한 사르데냐 왕국의 지원을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라도 엘리자베트를 말려 죽이고 싶어서 말입니다. 사르데냐의 지원은 정말 눈엣가시였지요.”

    나는 작은 원을 그리면서 포도주잔을 흔들었다.

    “엘리자베트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다짜고짜 아나톨리아부터 끌어들인 것을 보십시오. 저런 외교적인 합의가 하루이틀 만에 되겠습니까? 전쟁이 시작하기 몇 달 전부터 준비한 겁니다.”

    저절로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엘리자베트는 제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자신임을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협상할 수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도 알겠지요. 엘리자베트는 지금 저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유혹?”

    “예. '어차피 그대가 사르데냐를 짓밟아도 나에겐 아나톨리아가 있다. 쓸데없이 나와 싸우는 대신, 서로 사르데냐를 사이좋게 갈라먹는 것은 어떤가?' 하고.”

    비유하자면 무도회의 장대한 프러포즈.

    사르데냐를 무대로 삼아 엘리자베트와 내가 춤을 춘다. 누가 더 외세를 많이 끌어모을 수 있을까, 이것이 솜씨를 겨루는 기준이다. 나는 헬베티카 연방과 브르타뉴 왕국을 회유했다. 엘리자베트는 아나톨리아 제국을 끌어들였다.

    관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사르데냐 왕국은 사분오열되어 주변국을 배부르게 만족시켜주겠지. 피가 철철 흐르는 레어 스테이크를 테이블에 둘러앉아 끼리끼리 나누어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디 후작이 버림받았고, 피렌체 대공은 죽었다. 충신도 능신도 사라져 가고 있다. 그들이 없어지고 자리를 차지한 것은 외국에서 온 여우 한 마리다. 사르데냐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한 명을 달래겠다고 왕국 하나를 선물한 것이지 않습니까? 뭐, 약간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만 성의를 봐서라도 용서해야지요. 저는 관대한 사람입니다.”

    “…….”

    “이번에 엘리자베트가 실각하면 다음 총사령관은 싫어도 회전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글쎄, 그 마지막 총사령관까지 죽어버리면 사르데냐 왕실도 엘리자베트를 다시 기용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때가 기대됩니다…….”

    내가 웃는 모습을 앙리에타가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회의는 그쯤에서 끝났다. 엘리자베트가 이끄는 부대와는 싸우지 않고, 다른 장수가 지휘하는 부대와만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것이 작전이었다.

    당연하지만, 제노바라는 대도시가 아테나 대신전에 통째로 넘어가는 사태를 사르데냐 왕실은 인정하지 못했다. 왕실은 아테나 대신전과 더불어서 브르타뉴 왕국을 비난했다. 타국의 전쟁에 제3자가 함부로 개입했다는 것이다.

    물론 주변국들에선 이런 헛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았다.

    ─ 먼저 공화국을 개입시킨 쪽은 사르데냐가 아닌가.

    ─ 게다가 아나톨리아 제국까지. 눈 가리고 아웅에도 정도가 있다.

    오히려 싸늘한 반응으로 사르데냐를 고립시킬 따름이었다. 내가 그토록 명분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아둥바둥 뛰어다닌 것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르데냐 왕실은 대내외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엘리자베트 통령이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나도록 종용했다.

    세간의 예상과 달리 엘리자베트는 깔끔하게 퇴진했다. 왕실의 돈으로 고용한 용병대까지 순순하게 내놓아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단, 아나톨리아의 용병만큼은 계속해서 지휘권을 자신이 가졌는데, 이걸 두고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자베트가 물러서자 전권을 휘어잡은 사람은 루도비코 데 스포르차.

    속칭 밀라노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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