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84화 (384/510)
  • 00384 양웅(兩雄)의 조우  =========================================================================

    *  *  *

    “제노바 시의 열쇠를 성녀께 전달합니다.”

    “도시의 열쇠,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대륙력 1512년 9월.

    자클린 롱그위 성녀는 제노바에 행차하여 할양식을 주관하였다. 제노바는 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아테나 대신전에 넘어갔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노바 시민들은 열광적으로 만세를 외쳤다.

    “만세! 성녀님 만세!”

    “아테나 여신께 영광을!”

    성녀 덕분에 노예가 될 뻔한 신세를 벗어났다. 아마 저들은 롱그위 성녀가 탁자를 갈아서 멜론 주스를 만들겠다고 말해도 '성녀님이라면 가능합니다!'라고 소리치겠지. 성녀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주변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만세 소리가 더더욱 격렬해졌다. 정치를 아는구만.

    할양식이 끝나고 우리는 관저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성녀 그리고 데이지, 딱 세 명만이 방안에 들어갔다.

    “저 우습지도 않은 행사는 또 뭐에요? 저런 걸 준비했으면 준비했다고 말해야죠.”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성녀는 아까까지 지었던 미소가 거짓말이라는 듯이 표정이 180도로 변했다. 멜론 주스는커녕 바퀴벌레라도 씹어먹은 얼굴이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성녀에겐 예외적으로 유죄 판결을 내려도 좋지 않을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 여자는 마녀입니다.

    “그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계약서를 만들어서 도장 찍고 끝내버립니까? 이건 애시당초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뭐,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치고는 잘했습니다.”

    “보름 내내 달려와서 겨우 도착했나 싶었는데, 냉큼 연설문을 쥐어주지 않나! 궁중백, 당신은 사람을 다루는 게 엉망진창이에요!”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 연설문도 내가 몸소 써주었지 않은가. 감동적인 연설 덕택에 제노바 시민들의 심장은 그대로 성녀의 손아귀에 들어가 두근두근거리게 되었다. 오히려 감사 인사를 듣고 싶을 정도였다.

    “예에, 예에.”

    “사람이랑 얘기할 때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세요! 어깨 으쓱거리지 마세요! 비웃지도 마세요! 당신, 얼마나 몸짓으로 상대방을 화내게 하는지 아세요!?”

    “저도 성녀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건사합니다. 특별취급입니다. 기뻐하셔도 괜찮습니다만.”

    “당장 죽어버렸으면……!”

    이빨을 바득바득 갈면서 이쪽을 노려보는, 자칭 타칭 대륙과 종족의 평화를 위해 세상 누구보다도 열심히 발품을 팔고 계신 자클린 롱그위 성녀 28세였다.

    나는 시선을 돌려서 데이지를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여느 때처럼 단정하게 시녀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데이지.”

    “예, 아버님.”

    “성녀님한테 들었다. 용병을 모집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그래도 한 사람 몫은 해낼 정도로 머리가 자란 모양이구나.”

    나는 데이지의 앞머리에 손을 올려서 가볍게 토닥거렸다.

    “수고했다.”

    “…….”

    “당분간은 이대로 성녀님의 시중을 들도록. 나는 지금 군무상서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네가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겠지.”

    “예. 알겠습니다……아버님.”

    라우라와 데이지는 견원지간이었다. 의외로 피해자인 데이지는 라우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라우라는 데이지를 볼 때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되도록 두 사람을 같은 공간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되돌렸다.

    “자아. 앞으로의 작전을 논의해볼까요.”

    “……어? 아. 네에.”

    어째서인지 성녀가 약간 멍하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 멍청한 표정은 뭐냐는 눈짓이었다. 그러자 성녀가 미간을 좁히면서 말했다.

    “의외로……딸아이한테 상냥하시네요?”

    “푸웁!”

    예상치 못한 발언에 내 입에서 육성으로 웃음이 튀어나갔다.

    “상냥? 제가 데이지한테? 농담이 지나치군요, 롱그위 성녀.”

    “조금 전에는 어딜 봐도 약간 무뚝뚝한 아버지에 착실한 딸이었는걸요.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뭘 단단하게 착각했는지 눈앞의 성녀께선 우쭐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꼭 새끼고양이 같은 표정이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다 알고 있다, 하는 그 표정 말이다. 새끼고양이가 그러하듯이 안타깝게도 롱그위 성녀 또한 지능이 상당히 떨어졌다.

    “데이지 양이 어리면서 왜 그리 열심히 일하나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네요. 데이지 양. 단탈리안 궁중백은 상냥한 아버지인가요?”

    성녀가 싱글벙글거리며 허리를 굽혀 데이지에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완전히 어린애 취급이었다. 알다시피 데이지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것이 꼬맹이로 취급받는 일이었다.

    “예. 아버님께선 언제나 무척 상냥하십니다.”

    “어머어머. 어쩜. 설마 궁중백이 세상에는 이래도 악마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말할 테냐, 하는 기세로 온갖 질병과 저주를 흩뿌리고 다니는 주제에 가정에서는 부드럽게…….”

    “제가 잘못할 때마다 밤새도록 고문을 가하지만, 충분히 상냥하십니다.”

    롱그위 성녀가 웃는 모습 그대로 표정이 멈추었다.

    “네?”

    “가장 최근에 고문받은 건 벌써 사 개월 전이군요. 커스토스 영지의 마을들 사이에서 분쟁을 조율하는 데 그만 한 마을의 이권을 무시해버렸습니다. 서류를 잘못 작성했지요. 그날은 초저녁부터 아침까지 삼각목마에 앉아서 촛물로 온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 이러면 나도 데이지를 말리지 못했다. 사실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성녀는 데이지를 모욕했다. 그럼 대가를 치러야지.

    “어라……? 네……?”

    성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정말? 아니면 농담? 하고 성녀의 눈동자가 당황한 채로 질문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데이지가 글자를 세 개 잘못 적는 바람에 칠백오십 명의 마을주민이 피해를 볼 뻔했습니다. 무수한 인명을 책임지게 될 사람한테 실수 따위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합당한 처벌일뿐더러, 사실 조금 가벼운 처벌이기도 하지요.”

    “…….”

    성녀의 어안이 벙벙해진 와중에 데이지가 말을 이어나갔다.

    “반 년 전, 3월 16일에는 그만 용의자를 고문하는 데 실수했습니다. 간을 도려내야 했는데 폐를 도려내고 말았습니다. 폐가 재생되기까지 용의자는 숫기 빠진 소리만 내뱉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에 심문 작업에 차질이 생길 뻔했습니다.”

    “고, 고문?”

    “예. 그날 아버님께서는 감각이 수백 배 증폭되는 약물을 투입하신 다음, 저를 인적이 드문 성벽에 매달아두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이었지요. 바람이 살결에 닿을 때마다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껴야만 했습니다.”

    내가 눈썹을 찡그렸다. 방금 데이지가 한 말에는 중대하게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 나는 오류를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멍청하기는. 그건 3월 17일이다.”

    “아니요. 16일이 확실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발레포르를 고문한 날 아니더냐? 3월 17일이 맞다.”

    “아버님께서 피습을 당하신 게 3월 15일이고 바로 그날부터 고문을 시작했으니 15일, 16일, 그러니까 16일입니다. 15일은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고, 17일에서는 전부 밝혔습니다. 그 정도는 기억하실 수 있겠지요?”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으음. 16일이 맞는 것 같군.”

    “보십시오. 아버님은 기억력이 지나치게 나쁩니다.”

    훗, 하는 느낌으로 데이지가 콧방귀를 뀌었다.

    “가끔씩 노인성 치매가 의심됩니다. 정말로 제가 화장실까지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시끄럽다. 네가 비정상적으로 기억력이 좋은 것이다. 나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다.”

    우리가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롱그위 성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두 사람은……양부와 양녀,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롱그위 성녀.”

    성녀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서로를 아끼는 건가요……아니면 싫어하는 건가요……?”

    “증오합니다.”

    “증오하는데요.”

    “……? ……?”

    성녀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마주한 18세기 수학자처럼 난해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서로를 아끼거나 하지 않는다는 얘기죠?”

    “아니요.”

    “그건 조금 다르군요.”

    데이지를 함부로 건드리는 녀석이 있으면 아가리를 찢어버린 다음에 항문에 쑤셔 박아버리고 남대문에 네 조각으로 갈라서 전시해버릴 것이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었다. 지난 번에는 건드린 사람이 라우라였으니까 채찍질로 끝났을 뿐이다.

    “혹시 롱그위 성녀. 사람이 상대방을 아끼려면 반드시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나요……?”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옆에서는 데이지가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이래서 세상 물정 모른 채로 신전에서만 자라난 아가씨는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의 관계와 심리라는 것이 딱 잘라서 호오로 갈리는 줄 아십니까? 세상에. '미지근한 우정보다 차라리 적나라한 적의가 낫다'라는 명언도 있습니다만, 아마 롱그위 성녀는 평생이 걸려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왜 굳이 무겁게 목에다가 머리를 달고 살아가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정말입니다. 얼굴은 예쁘면서 30살이 다 되도록 뭘 배우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

    나와 데이지의 연타 펀치에 롱그위 성녀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성녀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무척이나 단호하게 각오한 기색이 느껴졌다.

    “죄송한데요, 궁중백.”

    “말씀하시지요.”

    “제 전담 시녀를 당장 바꿔주세요.”

    그날 밤. 나는 라우라와 데이지의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시간표를 짜느라 무진 애를 썼다.

    *  *  *

    피렌체 대공이 처참하게 죽어버린 이후, 사르데냐 왕국은 극히 수동적으로 나왔다.

    왕국군은 절대로 우리와 회전에서 맞붙으려 들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가 약점을 보이면 언제든지 물어뜯을 수 있도록 아군의 보급로를 철저하게 노렸다. 전형적인 지구전이었다.

    풍문에 의하면 이런 지구전은 엘리자베트 통령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라고 들었다. '현재 제국군과 정면에서 부닥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했다던가. 안 그래도 지구전을 주장하던 밀라노 공작과 더불어서, 사르데냐 왕국군은 고슴도치처럼 움츠러들었다.

    덕분에 우리군은 마음대로 왕국을 약탈하고 돌아다녔다.

    “깡그리 불태우십시오.”

    민병들이 요새에 틀어박혀서 우주 방어를 펼치든 말든, 그들의 집과 재산까지 요새로 끌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돈이 나갈 만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뺏어갔다. 가져가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것은 불태워버렸다.

    요새가 마련되지 않은 지역, 가령 딱히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도 않고 개발도 덜 된 지역은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았다. 그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엘리자베트 전략'은 알토란과 같은 도시들을 제외하고 남은 모든 지방에 희생을 강요했다.

    엘리자베트의 전략은 효율적이었지만 동시에 무서운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희생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농민들, 거기에 농민들의 대표자들은 거세게 왕국군을 비난했다. 결국 엘리자베트는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엘리자베트는 2만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우리를 견제했다. 공격이 아니라 견제였다. 우리가 마음대로 약탈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찔끔찔끔 위협 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군의 분견대가 운 나쁘게 엘리자베트의 포위에 걸려들고 말았다. 엘리자베트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겠지.

    그러나.

    “피해자는 전무합니다, 공작 전하!”

    어찌된 일인지 엘리자베트는 우리 분견대가 그대로 탈출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엘리자베트 본인은 '실수'로 놓쳐버렸다고 말했다던가.

    이 한심한 작태에 사르데냐인들은 격분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