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83화 (383/510)
  • 00383 양웅(兩雄)의 조우  =========================================================================

    *  *  *

    아나톨리아 제국에서 대규모 파병이 결정된 것은 겨우 며칠 뒤였다.

    정확하게 말해서 파병은 아니었다. 엘리자베트라는 군주(軍主) 아래 용병이 대거 고용되었을 따름이다. 문제는 용병의 규모였다. 일만오천 명의 용병이 아나톨리아 제국에서 배를 타고 현재 사르데냐로 향하고 있었다.

    그것조차 제1차 파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경우에 따라 제2차, 제3차 파병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언급이 아나톨리아 외무대신의 발언에서 암시되었다.

    “…….”

    나는 집무실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무엇인가가 이상했다.

    난 적어도 엘리자베트가 사르데냐를 도와주기 위해서 참전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외세에 기대어버리다니?

    이래서야 설령 사르데냐 왕국이 승리를 거둘지라도 아나톨리아 제국에 직간접적으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도시 하나를 넘겨주든가, 적어도 정치적으로 상당히 속박되는 상황에 놓이겠지.

    지금 사르데냐 왕국은 국제외교에서 완전히 신뢰를 잃어버렸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한 것까지는 동맹국이니 어찌저찌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는 빼도 박도 못하게 제3자를 개입시킨 것. 국제사회의 여론은 명백하게 사르데냐에 등을 돌렸다.

    ……엘리자베트다. 역시 엘리자베트가 설득했겠지.

    피렌체 대공의 죽음에 사르데냐 왕실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는 꼼짝도 못하고 우리한테 패배해버릴 것이라고 절망하는 가운데, 엘리자베트가 왕실을 유혹했다. 아나톨리아 제국을 끌어들이면 확실히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다고…….

    이미 사르데냐와 아나톨리아는 거래를 끝마쳤다. 아나톨리아가 제공하는 것은 병력. 사르데냐가 대신 건네주는 것은, 피아센차-파르마-밀라노 일대보다는 값어치가 덜 나가는 무언가……. 즉, '우리한테 패배하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생각되는 무언가다.

    그것이 무엇인가?

    이 부분을 파악하지 못하면 엘리자베트의 의도도, 아나톨리아의 목적도 분명하지 않았다. 나는 불분명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

    거래의 중개를 맡은 것이 다름 아니라 엘리자베트였지.

    달리 말해, 이 거래가 엘리자베트에게 있어 꽤나 이득이 된다는 얘기다. 안 그러면 굳이 번거롭게 아나톨리아를 끌어들이고 사르데냐를 설득할 이유가 없다. 무엇이 엘리자베트의 이득인가. 그게 핵심이리라.

    한참이 지나고 내가 중얼거렸다.

    “……그렇군. 베네치아를 할양하는 것인가.”

    사르데냐는 아나톨리아에 베네치아를 임대, 혹은 할양해준다. 그것이 계약조건이다. 틀림없다.

    첫 번째, 사르데냐 입장에서는 베네치아를 하나 넘겨주는 것이 밀라노-피아센차-파르마를 통째로 빼앗기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아나톨리아 입장에선 대도시이자 무역거점을 얻게 되는 셈이니 이득이다.

    세 번째, 엘리자베트는……베네치아가 아나톨리아의 영토가 되면, 공화국은 고립에서 벗어난다. 베네치아를 통해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다. 자국에 우호적인 항구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왜 하필 1만 5천 명의 용병인가?

    확실하게 전쟁을 이기고 싶다면 5만 대군 정도를 파병해야 옳다. 5만 명을 빌려주는 대가로 베네치아를 얻을 수 있다면 결코 불리한 거래가 아니다. 1만 5천 명은 너무 어중지간하다. 우리를 압도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병력이라는 말이다.

    혹시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가진 일만오천에 아나톨리아의 일만오천을 합쳐서, 총합 3만 명이면 여유롭게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설마. 엘리자베트는 희대의 용병가다. 그녀가 라우라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라우라를 전쟁에서 압도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이 없군. 엘리자베트.”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녀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기대 이상이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예상외라고 표현해야 할까. 좋다, 엘리자베트. 네 의도에 한번 맞춰보겠다. 어디까지 쫓아올 수 있는지 봐볼까.

    나는 책상에 올려진 수정구를 가동했다. 잠시 뒤, 투명한 막이 새어나오면서 한 인물을 비추었다. 롱그위 성녀였다.

    “오랜만입니다. 병력은 잘 모집되고 있습니까? 우리 양녀가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만.”

    ─ 예, 오랜만이에요. 데이지 양은 충분히 유능해요. 덕분에 쉽게 용병을 모집할 수 있었어요. 당신의 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심성이 고운 아이더군요.

    내가 무심코 실소했다. 심성이 곱다고? 누가? 데이지가? 농담이겠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데이지처럼 악독한 인간을 달리 본 적이 없었다.

    ─ 딱히 용건이 없으면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렇습니까? 저는 용건이 없어도 성녀님이랑 대화하는 게 각별히 즐겁습니다만. 저녁은 드셨습니까? 사르데냐는 하늘이 맑아서 좋더군요.”

    ─ 끊겠습니다. 끊어버리겠습니다.

    정말로 끊을 기세로 말했기에 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롱그위 성녀.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습니다.”

    ─ ……괜찮겠어요? 원래 계획보다 한 달은 빠른걸요?

    주홍색 머리카락의 성녀는 표정이 진지해졌다.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아나톨리아 제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덕분에 우리의 예정도 앞당겨졌지요. 이제 우리가 움직여도 비난할 주변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하지만 아직 여왕 전하께 연락을…….

    “오. 제가 장담하건대 브르타뉴의 여왕 전하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움직일 수 있다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국내에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 태세라고 곤란하다지요?”

    ─ …….

    “야심차게 준비했던 프랑크 정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굴욕적인 협정을 맺어서 아예 대륙으로 진출할 길까지 막혀버렸으니 귀족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후우. 안타깝군요.”

    ─ 말씀하고 싶은 게 뭔가요?

    “귀족들의 인기를 끌어모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물을 던져줘야지요. 롱그위 성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여왕 전하는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어서 연락하세요.”

    성녀가 침묵했다.

    이제 와서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성녀에게도 각오가 필요했다. 이건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끝까지 밀고 나아가야 하는 산사태와 같았다. 1분 정도가 흐르고, 성녀는 새삼 각오를 다시 정했는지 이쪽을 뚜렷하게 노려보았다.

    ─ 아뇨. 여왕 전하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보고를 드리지요.

    “호오. 자신이 책임을 전부 지겠다는 말씀입니까.”

    ─ 예. 다른 사람한테 책임을 넘기는 것은 비겁한 일이니까요.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제가 이걸 시작하겠습니다.

    성녀가 단호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 오늘부로, 우리 브르타뉴 왕국은 귀국의 전쟁에 참전합니다.

    *  *  *

    “통령 각하! 큰일입니다!”

    피렌체에 마련된 집무실로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뛰어들었다. 반면에 엘리자베트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두 발을 아예 탁자에 올려두고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호들갑은. 자네에게 큰일이 아닌 것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

    “아니, 장난치실 때가 아닙니다. 제국이 제노바를 타국에 양도했습니다!”

    “…….”

    엘리자베트가 다리를 내리고 의자를 바로 세웠다.

    “그건 확실히 '큰일'이로군. 보고하라.”

    “브르타뉴입니다! 제기랄. 각하, 브르타뉴였습니다. 웃기지도 않는 짓을!”

    쿠르츠가 전속력으로 뛰어오느라 놀란 가슴을 쓰다듬으며 이빨을 바득 갈았다. 엘리자베트는 다소 의외였다. 쿠르츠가 이렇게까지 분해하는 모습은 드물었다.

    “브르타뉴가 직접 참전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할 터이다. 어찌된 일이냐?”

    “……정확하게 말하면 브르타뉴가 아닙니다. 롱그위 자클린 성녀. 아테나 대신전의 공식 제1좌 성녀입니다. 제국은 성녀에게 제노바를 인도적인 차원에서 할양했습니다.”

    쿠르츠가 간신히 목소리를 진정시키고 보고했다.

    “아시다시피 제국은 포로에 가차없지 않습니까. 파비아 때처럼 이번에도 제노바의 시민들을 죄다 노예로 팔아버릴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프랑크의 남부도시들에서 구입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는데…….”

    “도중에 성녀가 끼어들었군.”

    엘리자베트는 즉각 상황 전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대거 노예로 팔리게 생긴 시민들. 그걸 사겠다고 나선 프랑크측 도시들. 절체절명의 순간, 평화주의자이자 화합의 상징인 자클린 롱그위 성녀가 '안 됩니다!'라고 나선다……. 훌륭한 시나리오였다.

    “안 그런가, 쿠르츠.”

    “맞습니다. 프랑크의 남부도시들은 성녀한테 빚이 있지요. 얌전히 물러났습니다. 제국은 왜 국가 간의 전쟁에 성녀가 함부로 끼어드냐고 격렬하게 항의했고…….”

    “그리고 아테나 대신전에서 노예값을 대신 지불했겠지.”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쿠르츠가 한숨을 쉬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훌륭한 짜고 치기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단탈리안이 써먹을 법한 술책이야. 어느 한쪽을 끌어들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브르타뉴였군. 그래서 제노바는 어떻게 됐는가?”

    “뭐. 뻔하지요.”

    쿠르츠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성녀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셨다, 성녀님이 아니었다면 전원 노예로 팔릴 뻔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봐주기 힘든 눈물의 무대를 연출하더니……. 제국에선 아테네 대신전에 그럴 거면 도시를 통째로 구입하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대신전에서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제노바는 도시의 주인이 왕국에서 대신전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시민들의 모든 권리와 재산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 업적을 이루어낸 롱그위 성녀의 명성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라고,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덧붙여서 설명했다.

    최근 롱그위 성녀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대륙의 평화, 종족의 평화를 울부짖으며 성녀는 실제로 몇 번의 협상을 타결시켰다. 지난 공화주의 대표회의에서는 자살 폭탄에 휘말리기도 했다. 몸을 가리지 않고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성녀……그것이 사람들이 가진 인상이었다.

    그 실상은 브르타뉴 왕국의 앞잡이.

    종교계를 이용하고자 했던 단탈리안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해낸, 왜곡의 이미지였다. 성녀는 기꺼이 단탈리안에게 이용당했다. 그 대신에 브르타뉴 왕국에 일정한 이익을 줄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는 대신전과 성녀에게 병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통령 각하. 롱그위 성녀가 누구한테 지원군을 요청했는지 아십니까?”

    쿠르츠의 질문에 엘리자베트는 무척 간단하게 정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앙리에타이겠지.”

    브르타뉴의 여왕 앙리에타 드 브르타뉴.

    아테네 여신을 국교로 지정하고 있으며 성녀와 개인적인 친분 또한 깊다고 알려진 군주. 롱그위 성녀가 진심으로 충성심을 바치고 있는, 유일무이한 여걸.

    “단탈리안은 이걸 노렸군.”

    엘리자베트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새어나왔다.

    “그가 전쟁을 벌이리라는 사실을 내가 알았듯이, 내가 참전하리라는 사실을 단탈리안 역시 알았다. 우리 공화국이 전쟁에 참여한 이상, 제국 역시 또 다른 제3국을 끌어들일 명분이 생겨버리지.”

    “빌어먹을 일이지만 통령 각하의 예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쿠르츠가 쿵, 하고 탁자에 서류를 올렸다.

    “롱그위 성녀가 개인적으로 끌어모은 병력의 목록입니다. 협상이 이루어진 것은 겨우 어제인데, 어찌된 일인지 성녀는 벌써 사천 명 이상의 용병을 모집했습니다. 그것도 전부 기병으로요.”

    “시기가 지나치게 절묘하군.”

    “공식적인 발표에서는 폴리투니아 방면에 치안유지군으로 보낼 작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개소리입니다. 통령 각하. 제국은 처음부터 브르타뉴를 끌어들일 생각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르데냐에는 전 대륙에서 군세가 집결하기에 이르렀다. 합스부르크 제국군, 사르데냐 왕국군, 아나톨리아 제국군, 브르타뉴 왕국군…….

    엘리자베트는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좋다. 단탈리안. 끝까지 쫓아가주지.’

    ――앙리에타와 자신이 각자 반대진영에 서게 되었다.

    이런 대본을 만들어낸 어느 남자를 향해서, 엘리자베트는 깊은 감명을 느끼면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2차 국화전쟁은, 어느 국가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빠르게 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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