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81화 (381/510)
  • 00381 양웅(兩雄)의 조우  =========================================================================

    *  *  *

    라스페치아 앞바다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상대편은 마물들을 상대하느라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사르데냐 왕국 해군. 이쪽은 이제 막 전투에 돌입해서 갓 잡아올린 청어처럼 싱싱한 라스페치아-제국 연합 함대였다.

    라스페치아가 배신 의사를 알려온 것은 로디 후작이 죽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후작의 가신단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배신했다. 유일하게 왕실에 대한 충성을 지킨 사람이 라스페치아 기사단장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기사단장은 동료들의 손에 죽었다.

    후작은 분명히 좋은 영주였겠지. 후작의 죽음에 가신단, 시민 의회, 농부를 가리지 않고 분노했다. 살짝 등을 떠밀어주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협력해주었다.

    “우웨에엑, 우에엑!”

    그리고 현재, 나는 절찬리에 배멀미를 겪고 있었다.

    “……궁중백의 위엄이 죄다 갑판에 쏟아지는군. 그렇게 힘든가?”

    “으으으. 생각해보니 저, 바다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서……우으읍!”

    “파도도 괜찮은데다 이건 5단 갤리선이다. 궁중백처럼 야단법석인 사람은 드물 텐데.”

    라우라가 한심한 녀석 쳐다보는 느낌으로 쯧쯧 혀를 찼다.

    나도 오늘 와서야 새삼스럽게 깨달았지만,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바닷배에 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요컨대 내 신체는 일찍이 바다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위장이랑 내장이 뒤집혀서 잡탕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뭣하면 마법사한테 부탁해서 속을 진정시키는 마법을…….”

    “안 됩니다.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에 마력을 소모시키면 절대 안 됩니다!”

    지금 아군의 전력은 마법전력이 전부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헬베티카 용병은 지상에서 날아다니는 베테랑이었지만, 해상전에 대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배멀미를 치르는 병사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배의 숫자 자체도 적군에 비해 적었다. 저쪽은 한 차례 전투를 끝냈음에도 육십 척 가량이 잔존했다. 반면, 이쪽은 처음부터 서른다섯 척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라스페치아에 비해서 제노바가 훨씬 더 거대한 해상기지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아군은 대부분이 2단 갤리선 혹은 3단 갤리선……5단 갤리선이 주력인 적군에 대비해서 아무래도 불안했다. 만약 지금이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이런 전력으로 맞부닥치는 것은 도박에 가까웠다.

    변수가 되는 지점은 두 곳.

    첫 번째, 적군이 탈진했다는 것. 왕국군은 해상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혈투를 벌였다. 제대로 칼을 휘두를 힘조차 남지 않았을 거다.

    두 번째, 적군의 마법전력이 완전히 소모되었다는 것. 크라켄이나 레비아탄과 같은 대형 마물을 움직인 까닭이 여기 있다. 왕국군에게 마음껏 마법을 쏟아붓도록 유도했다.

    왕국군이 더 이상 마법을 운용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발레포르의 잔당들은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주었다. 이로써 반역자의 부하였던 그들은 내 보증 아래 무죄로 인정받게 된다.

    “그런 시시한 마법을 쓸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왕국군에 공격을……우웨에엑!”

    “승리에 대한 주군의 집념은 정말 보기만 해도 질리는군.”

    라우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가 만담 아닌 만담을 나누고 있는 동안, 양군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왕국 해군은 우리에게 측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부분의 배가 노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저들은 돛을 제외하고 방향과 속도를 조종할 수단을 잃어버렸다.

    “마법대에 명령한다.”

    라우라가 가볍게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가라앉혀라.”

    서른여섯 명의 마법사가 일제히 영창주문을 외웠다.

    불꽃 덩어리가 바다바람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묘하게 느릿느릿하게 비추는 광경이었다.

    도중에 푸르른 막이 펼쳐져서 불꽃을 튕겨보냈다. 그러나 방어막은 기껏해봤자 열 개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스물다섯여 개의 불꽃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적 함선의 측면을 후려갈겼다.

    결과는 명확했다.

    퇴함! 퇴함! 하고 정신없이 울부짖는 함장. 배가 정확히 양단되어서 원치 않아도 저절로 퇴함을 강요받는 선원들. 운 나쁘게 마법에 적중되어서 몸째로 불에 그슬린 병사. 라스페치아 앞바다에선 불지옥이 그려졌다.

    “일방적이군.”

    라우라가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녀 말대로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첫 번째 일제사격에는 그래도 방어막이 열 개 정도 생겨났지만, 세 번째 이후로는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어서 두 개의 방어막만이 펼쳐졌다. 그것조차 여섯 번째 사격부터는 실종되었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우리의 마법에 얻어맞기만 했다.

    “항복한다! 항복하겠다!”

    포화를 버티지 못한 것일까. 함선들에서 흰색 천을 펄럭거렸다.

    라우라가 시선을 슬쩍 돌려서 날 쳐다보았다.

    “어쩌겠는가, 주군.”

    “이번에 마물들이 많이 수고해주었습니다. 배가 고플 텐데 식비라도 우리가 대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전투에 마물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왕국이 알아차리면 난감했다. 정보 자체가 새어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을지 몰라도, 증인은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두고 싶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란 없다.”

    라우라의 명령에 마법사들이 사격을 재개했다. 항복하든 항복하지 않든 무차별적으로 마법이 날아갔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 항복했는데 어째서 공격하는 거야!”

    “으아악! 개새끼들아! 항복한다! 항복한다고!”

    아군의 반응은 덤덤했다. 잔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용병들이야 이미 총사령관 공작 전하의 무자비함에 익숙해졌다. 노잡이를 맡은 라스페치아 시민들을 거론하자면, 아예 꼴 좋다는 듯이 대소하고 있었다.

    사르데냐 왕실은 실수를 했다. 후작을 너무 잔인하게 죽여버렸다.

    살가죽을 전부 벗겨버린 이후 핏줄과 근육을 잘게 썰어버리고, 거기에 뼈까지 빻아서 개먹이로 던져주었다던가. 영주 귀족이자 전권대사였던 사람에게 가하기엔 지나치게 잔혹했다. 라스페치아의 시민들이 격노한 것도 당연하겠지.

    항복조차 먹혀들지 않자 왕국 해군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돌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저쪽은 돛밖에 활용하지 못했고, 이쪽은 노잡이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충각술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살돌격을 감행하든, 절망에 사로잡혀 가만히 나앉든, 도망을 치든, 사르데냐 왕국군 갤리선 60척의 운명은 한결같이 결정되어 있었다. 바로 침몰이었다.

    “음. 비명 소리를 들으니까 속이 좀 진정되는군요.”

    “궁중백은 대체 위장이 어떻게 생겨먹은 겐가?”

    라우라가 짜게 식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인데 어쩌겠는가.

    한 시간 뒤, 바다에 떠 있는 왕국 해군은 단 한 척밖에 남지 않았다. 피렌체 대공이 지휘하는 기함이었다. 유독 화려하게 장식된 5단 갤리선.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검독수리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궁중백. 저건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

    “포로로 잡으면 오히려 귀찮으니까 평등하게 침몰시키죠……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내가 턱을 쓰다듬었다.

    “메디치 가문의 군기(軍旗)라니, 너무 탐나는 보물이군요. 금전적인 가치를 뛰어넘어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이대로 포세이돈께 헌상하기엔 조금 아까운걸요.”

    “음. 본인도 동의한다마는, 그렇다고 백병전을 벌이는 건 득책이 아니다. 저 기함에는 틀림없이 일당백의 전사들이 탑승하고 있겠지.”

    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하지만 저건 천 명의 목숨보다 더 소중합니다. 파르네세 공작. 현 프랑크의 황후가 메디치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요?”

    “물론이다. 방계 출신이라고 들었다만.”

    “글쎄요. 직계가 죽어버리면 방계가 직계가 되는 법이지요.”

    라우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곧,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피렌체 공작령을 프랑크의 괴뢰로 만들어버릴 속셈인가.”

    “우리 제국이 피렌체 공작령까지 집어삼키면 여러모로 주변국의 심기가 불편해집니다. 그렇다고 눈앞에 떨어진 요리를 모른 체하고 지나가기도 아깝습니다. 아마 좋은 협상거리가 되겠지요.”

    “궁중백은 역시 악마다.”

    라우라가 쿡쿡 웃었다.

    “반드시 저 군기를 탈취해야겠군.”

    “웬만하면 가지고 싶다는 게 저의 솔직한 욕망입니다.”

    “본관의 임무는 궁중백의 욕망을 충실히 만족시켜주는 것이지. 허나 구태여 백병전을 벌일 필요까지는 없다. 전군, 화살의 사정거리가 닿는 곳까지 전진하라.”

    이런. 나보고 악마라고 말했지만 진짜 악마는 여기 따로 있었다.

    서른다섯 척의 아군 선단이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적 기함을 향해서 화살을 발사했다. 천 개에 이르는 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끄아아악! 흐아악!”

    “사, 살려줘! 제발 목숨만은!”

    적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한 명씩 쓰러졌다.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그중에는 일부, 일찌감치 승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바다에 뛰어든 현자들이 있었다. 어쩌면 열댓 명쯤은 엄청나게 운이 좋아서 해안까지 헤엄치는 데 성공할지 몰랐다.

    ――바닷물 속에서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는 마물들만 없었더라면.

    미리 말했다시피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적군이 생기면 꽤 성가시게 된다. 한 명도 남김 없이 헤치우는 것이 중요하다. 피렌체 대공 본인을 포함해서 만오천 명 가량의 왕국군은 오늘 이곳에서 수장된다.

    잠시 뒤, 적 기함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배를 몰아서 적 기함에 접현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기함으로 넘어갔다. 내가 군기를 가리키면서 명령했다.

    “가장 중요한 노획품이다. 소중하게 다루도록.”

    “예, 각하.”

    병사들이 재빠르게 다가가서 군기를 내렸다. 혹시라도 값나가는 물건이 있을까 해서 수색을 명령했다. 그래도 기함이니까 금화상자 정도는 있겠지. 적어도 병사들에게 화살값을 물어줄 만한 돈은 가지고 싶었다.

    “각하. 데 메디치 대공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부관이 낭보를 가져왔다.

    “좋습니다. 어디 가서 표정이라도 구경할까요!”

    “……궁중백은 정말로 배멀미를 겪은 것이 맞기는 한가?”

    뭘 모르는 소리.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죽기 직전의 인간 표정을 구경하는 것이요,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죽은 직후의 인간 표정을 관람하는 것이다. 거기에 많은 것이 담겨 있거든.

    “…….”

    대공은 돛대에 허리를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화살이 목과 가슴, 허리, 허벅지에 박혔다.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지휘봉을 꾸욱 쥐고 놓지 않았다. 얼굴 표정은……후회인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그러면서도 후회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별로 재미있는 얼굴은 아니군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머리를 배서 잘 보관해두십시오. 써먹을 데가 있을 겁니다.”

    “예.”

    부관이 도끼를 꺼내들어서 대공의 시체에 다가갔다. 흡, 하고 기합을 넣어 부관이 도끼를 휘둘렀다. 두 번의 도끼질만에 대공은 머리가 떨어졌다.

    *  *  *

    “대공 전하, 피하십시오!”

    “빌어먹을 놈들……항복조차 받아들이지 않다니!”

    아비규환이었다.

    근위병들이 어떻게든 대공만은 살리기 위해서 대신 화살을 맞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는 한계가 있었다. 분당 수천 개씩 떨어지는 화살을 막아낼 만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빠른 속도로 갑판에 쓰러졌다.

    ‘이건 어떤가. 그대와 내가 내기를 하는 것이다.’

    이때 대공은 어느 여인이 자신에게 건넨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대가 판단한 대로 제노바에 주둔하라. 다만, 나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 피렌체로 남진하겠다. 만약 제국이 제노바를 공격하면 본인은 즉시 방향을 돌리겠다. 그리고 다시는 그대의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화살이 근위병들의 틈을 뚫고 들어와 대공의 어깨에 박혔다. 대공은 눈썹을 찡그렸을 뿐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만일,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국이 남진한다면?’

    ‘본인의 승리다.’

    ‘달리 요구하실 것은 없습니까?’

    ‘그뿐이다.’

    아아.

    대공은 마음속 깊이 탄식했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던가.

    ‘괜찮습니다. 이 내기는 누가 승리하더라도 왕국에 이득을 안겨줍니다.’

    ‘제가 승리할 경우, 통령의 군대가 남쪽에서 북진함으로써 제국군을 쌍방향에서 협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패배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에서 동시에 제국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통령.’

    대공은 왜 자신의 말에 엘리자베트 통령이 굳이 대답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달리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단 하나뿐이었다.

    왜냐하면, 대공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어차피 대공이 죽어버리면, 사르데냐 왕국군의 모든 지휘권이 통령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이건 왕국과 제국의 전쟁이 아니었다. 제국과 엘리자베트 통령의 싸움이었어.’

    화살이 연이어서 대공의 허벅지를 날카롭게 쑤셨다.

    대공은 점점 더 눈앞이 새하얘졌다. 이제는 부하들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공허했으며,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명멸했다.

    ‘미안하오, 후작. 부디 내 죽음으로 용서…….’

    푹, 하고 마지막 화살이 대공의 목을 꿰뚫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대공의 가슴을 여태까지 환하게 비추었던 불꽃이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대공이 의문으로 품어왔던 것, 싫어했던 것, 좋아했던 것,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순식간에 밝혔다.

    그러나 잠깐뿐이었다. 불꽃은 순식간에 커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으며, 그 속에 대공은 다시금 홀로 남았다. 불꽃이 사라지자 어둠이 덮쳐왔다. 대공은 어스름이 자신의 살갗을 점점 더 덮어오는 것을 느꼈고――어느새 몸 전체가 그림자에 덮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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