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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디펜스-379화 (379/510)

00379 양웅(兩雄)의 조우  =========================================================================

제국군이 근처 일대에 도착하기까지 6일이 걸렸다.

그동안 제국군은 빠르게 진군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당히 느긋하게 움직였다. 정찰부대의 보고를 들어보니, 꽤나 많은 숫자의 척후병을 동원하면서 느릿느릿 전진하는 것 같았다.

“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군.”

“매복을 두려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곳으로 오는 길은 좁은 계곡과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음. 매복을 조심하는 것인가.”

용병대장의 말을 들으면서 대공은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여겼다.

“또한, 도중에 마주치는 마을이란 마을은 싸그리 약탈하고 있다 하옵니다. 마을 창고에 있는 곡식을 전부 가져가고 농사에 쓸 소는 전부 도축한다고…….”

“쯧쯧.”

대장들이 저마다 혀를 찼다. 제국군은 확실히 협상이 결렬된 이후, 더 정확하게 얘기해서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한 이후, 여태까지 언제 약탈을 자제했냐는 듯이 무자비하게 나왔다.

“대공 전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협곡 지대에 복병을 대거 배치해서 적군을 요격해야 합니다. 저들이 가도로 뛰쳐나오면 얼마나 많은 인명이 상하겠습니까?”

“……불허한다.”

대공이 뭣 씹은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보고를 들었지 않는가. 제국은 만전의 대비를 하며 다가오고 있다. 이쪽은 일만이고 저쪽은 이만이다. 병력상 정면에서 맞붙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 필패, 참패이겠지……. 지금은 진출할 수 없다.”

“하오나 전하, 민가의 피해가…….”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피렌체 대공이 분을 참으면서 명령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뛰쳐나가고 싶은 사람이 대공 본인이었다. 용병대장들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사실 사르데냐 출신을 제외하고 대장들은 안전한 성안에서 머무는 것을 선호했다.

혹시 몰라서 가장 매목하기 좋은 지점에 이백 명을 숨겨두긴 했다. 그리고 이백 명의 복병은, 알프스 산자락에서 나고 자란 헬베티카 용병을 상대로 산악 지대에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증명했다. 역으로 기습을 당해 전멸당한 것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섣불리 제국군과 맞서는 것은 금물이다. 참아라. 참으면 기회가 올 것이다.”

대공 휘하의 병력 일만삼천은 바싹 움츠러들었다.

정찰부대를 늘리는 것 이외에 군사적 활동은 거의 없었다. 성벽을 보수하고, 농성장비를 점검하고, 제노바 시장을 닥달해서 더 많은 보급물자를 지원받고……. 잡무를 도맡으면서 피렌체 대공은 신중하게, 다만 신중하게 제국군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의했다.

이곳 제노바인가? 로디 후작의 영지였던 라스페치아인가.

이윽고 대공이 바라던 정보를 전령이 가져왔다.

“대공 전하, 정찰대의 보고입니다. 제국군이 베르세토에서 기수를 틀었습니다.”

“……! 동쪽인가, 서쪽인가.”

“동쪽입니다. 전하. 제국군은 남동쪽으로 남하하고 있습니다.”

동쪽!

피렌체 대공이 이마에 손을 올렸다. 라스페치아였다. 제국군이 노리는 곳은 제노바가 아니라 라스페치아였다. 달리 말해, 이미 경고한 바대로 라스페치아의 영지민들은 제국과 내통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았다…….

“대공 전하.”

용병대장들이 불안한 눈길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다들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언어보다 명확한 의사가 회의실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대공이 침을 삼켰다.

‘불태워야만 하는 것인가. 라스페치아를.’

그는 손바닥을 통해 자신의 이마에서 혈관이 작게 약동하는 것을 느꼈다.

‘제국에 넘어가기 전에, 내 두 손으로 직접 불태워야 한다는 말인가.’

후작이 선정을 베푼 덕분에 라스페치아는 부유했다. 흑사병이 전 대륙에 휘몰아칠 때도, 라스페치아는 영주의 발빠른 대처로 피해가 최소화된 모범사례 중 하나였다. 만일 이곳을 제국군이 아무런 피도 흘리지 않고 차지한다면……끔찍했다.

제국군은 원없이 보급을 받겠지. 식량도 무기도 충분한 상태에서 전쟁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 여파는 단지 라스페치아 주변에 한정되지 않는다. 제노바로, 피렌체로, 테베레로, 왕국 전역으로 전염병처럼 퍼칠 것이다.

“전하.”

용병대장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재촉했다.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 대공의 뇌리에는 며칠 전 엘리자베트 통령이 재밌다는 듯 건넨 말이 스치고 있었다.

‘라스페치아의 시민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그대 피렌체의 시민을 지킬 것이냐. 그대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거기서 그대가 어떤 인간인지도 드러나겠지…….’

대공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럴수록 용병대장들도 불안에 잠겼다. 침묵이 길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내려질 명령이 그만큼 숙고를 거쳤다는 것이요, 쉽사리 번복되지 않을 만큼 단호하다는 것이었다.

“……라스페치아를……내버려둔다.”

“전하!”

피렌체 대공은 무표정했다. 단지 목소리에서 미처 다 억누르지 못한 괴로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라스페치아가 적도에게 넘어가면 전국은 극히 난해해집니다! 전하, 부디 결단을!”

“전하께서는 지켜보고만 계셔도 좋습니다. 저희에게 자유로이 행동해도 좋다고 허락만 해주십시오. 소인들이 알아서 처리하겠나이다!”

용병대장들이 이구동성으로 결단을 촉구했다. 군주(軍主)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 대장들 얼굴에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대공은 그들의 목소리를 떨쳐내려는 듯 강하게 명령했다.

“다시 명령한다. 라스페치아를 내버려둔다! 이는 결정사항이다.”

“하, 하오면 라스페치아의 무기고를 징발하는 것만이라도 허가해주십시오. 반역의 위험이 있다는 명목을 내세우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라스페치아가 왕국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있는가.”

대장들이 입을 다물었다. 증거는 없었다. 그저 정황상 강하게 의심이 들 뿐이었다.

“아직 배신하지도 않았고, 배신하리라는 증거도 없는 도시에 무슨 권리로 무기고를 징발하느냐. 이쪽에서 무기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 오히려 역심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명령한다. 라스페치아는 내버려둔다…….”

대공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로디 후작이 반역자일 리 없다고 믿었다. 후작을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린 것만 해도 이미 평생 씻을 수 없는 과오였다. 또 다시 후작의 영지민을 반역도로 몰아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대공의 군대는 그대로 제노바에 주둔했다.

며칠 뒤, 삼만에 이르는 제국군이 라스페치아에 밀어닥쳤다는 정보가 들렸다. 천 명이 채 되지 않는 라스페치아의 수비병력이 가망이 없는 농성전을 펼친다는 소식과 함께.

─ 피해가 심각합니다! 적의 마법전력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합니다!

─ 동쪽 성벽 일부가 무너졌습니다. 원군은, 원군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라스페치아는 다급하게 원군을 요청했다.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일반 시민까지 참전해서 어떻게든 농성을 이어나갔지만 상황은 심각한 모양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흐르고.

사흘이 지나갔다.

회의실에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대공은 얼굴이 부쩍 야위었다.

“라스페치아는 아직도 버티고 있는가.”

“예. 오늘 새벽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제국군이 간밤에 급습하여 성벽을 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리 대기시켜둔 예비대 덕택에 간신히 퇴치했다고…….”

대공과 용병대장들은 답답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라스페치아가 제국과 내통한 것이 맞습니까?”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됩니다. 우리를 이곳에서 꾀어내려는 술책일 수도 있어요.”

“섣부르니 뭐니 자시고, 당장 외성이 함락되기 직전이라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원군을 보내서 도와줘야 합니다.”

지휘관들은 크게 의견이 둘로 나뉘었다. 라스페치아가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는 의견과 이것이 전부 유인책이라는 의견이었다. 양측 모두 심증이 있을 뿐이라서 논쟁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렸다.

“…….”

대공 역시 판단할 수 없었다.

만약 제국군이 진심으로 라스페치아에 공세를 펼치는 것이라면 왜 통신마법을 차단시키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웠다. 덕분에 다급하게 원군을 요청하는 통신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혹시 우리를 안전한 제노바에서 끌어내기 위해 기만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대공은 제국군이 얼마나 간교한지 알고 있었다. 이쪽이 어떻게 생각할지 빤히 읽어내고, 되레 역으로 연락책을 풀어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적군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쪽의 생각을 읽고 있는가……. 대공은 답이 없는 고민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어느 사르데냐인 용병대장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러다가 라스페치아가 적도의 손에 넘어가면, 파비아를 내버려둔 밀라노 공작과 이쪽이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아군을 구원하지도 못하는 군사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피렌체 대공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뭘 고민한 것인가?’

저 용병대장이 한 말이 옳았다. 만일 여기서 라스페치아를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빤히 파비아가 파괴되고 능욕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만히 방치해버린 밀라노 공작과 뭐가 다른가.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공은 치욕스러웠다. 누구보다 밀라노 공작의 선택에 분노하고 반발했던 사람이 바로 대공 본인이었다. 그런데 이제 겁을 집어먹어서 한때 자신이 비난했던 행위를 그대로 반복하려고 했다……. 대공은 재차 자문했다. 지금까지 무엇을 생각한 것인가?

“전하! 급보이옵니다!”

그때 전령이 회의실에 헐레벌떡 들어왔다. 전령은 황급히 군례를 올렸다.

“라스페치아, 외성 함락! 기사단은 전멸했습니다!”

“……!”

“현재 영주대리가 내성으로 후퇴하여 마지막 저항을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라스페치아에서는 원군이 오고 있는지, 오고 있다면 어디까지 도착했는지 묻고 있습니다!”

용병대장들이 고개를 돌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이제 하루, 길어봤자 사흘 안에 라스페치아의 운명은 어떤 식으로든 결정된다. 선택은 대공에게 넘어갔다.

피렌체의 대공이자 메디치 가문의 주인, 코시모 데 메디치는 입을 열었다.

“라스페치아를 구원한다.”

마침내 떨어진 대공의 결정에 지휘관들 사이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전하!”

“단, 육로가 아니라 해로를 통해 라스페치아로 향한다. 제국에는 해군이 전무하다. 우리가 이동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을 터.”

대공이 이견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투로 확고하게 명령했다.

“제노바 시장에게 당장 본인의 명령을 전달하라. 제노바에 있는 함선을 모두 징발한다. 이는 국왕 전하의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작전이요, 조금이라도 거부의 의사를 내비추는 자는 항명죄로 즉결처단하겠노라!”

“예, 전하!”

부관이 딱 부러지게 군례를 올린 다음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마법사 부대를 먼저 라스페치아로 파견한다.”

“전하, 송구하지만……순간전이 마법에 대해서는 적군이 반마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통신만 풀어둔 것인가.”

전령의 첨언에 대공이 주먹을 쥐었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제국군은 진심으로 라스페치아를 공략하고 있었다. 전이 마법을 막아둔 것이 증거였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 적이 이쪽 생각을 읽고 있을지…….

“기사단이 전멸한 이상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다. 전군, 서둘러 준비하도록. 최대한 빨리 라스페치아로 향한다.”

“예, 전하!”

주사위는 던져졌다. 대공은 그러나 주사위가 어디로 굴러갈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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