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8 양웅(兩雄)의 조우 =========================================================================
“두 분이 애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이해하오. 그러니 본인이 나쁜 역할을 자처하겠소.”
엘리자베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후작은 이미 죽었소. 우리가 죽은 사람을 대신해서 살아있는 적을 처리해야 하오. 제노바인가, 라스페치아인가. 어느 쪽으로 제국군이 몰려올지 정확하게 예상할 필요가 있지.”
“으음.”
애도는 애도였고 회의는 회의였다. 마냥 슬픔에 잠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엘리자베트는 '후작'이라고 생전의 작위를 불러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애도를 표했다…….
“통령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저들은 언제든지 제노바로 올 것인지 라스페치아로 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즉, 제국군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전략을 수립해본들 어차피 무용지물입니다.”
“…….”
“우리가 어디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가. 그에 따라서 우선 전략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올바른 발언이었다. 옆에서 밀라노 공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엘리자베트는 미소를 지었다. 조소였다. 이쪽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웃는 느낌에 가까웠다. 대공은 방금 그들이 나눈 대화에서 어느 부분이 스스로에게 조소를 일으킬 법했는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비웃음은 한 순간이었다. 엘리자베트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어나갔다.
“좋은 지적이오. 대공은 어느 곳이 중요하다 생각하시오?”
“제노바야말로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전략적 거점입니다. 대도시이고, 아국의 해군기지이며, 무엇보다도 부유합니다. 라스페치아와는 비교할 수 없지요.”
대공이 확신을 담아서 강하게 말했다.
“설령 라스페치아가 함락될지라도 대세에 큰 영향은 없습니다. 그러나 제노바는 다릅니다. 아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입니다. 파르마에 이어서 제노바까지 넘어간다면, 왕국 신민들은 두려움에 떨겠지요.”
“이 노구는 다르게 생각하오.”
밀라노 공작이 반론했다.
“제노바는 훌륭하고 단단한 성벽을 보유하고 있소. 적군이 몰아닥쳐도 능히 1년 넘게 버틸 수가 있소. 허나 라스페치아는 다르오.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대하다는 말이외다. 충분한 병력을 배치하지 않는다면 도시째로 제국에게 선물하게 될 것이오.”
“공작. 바로 그 충분한 병력이 문제입니다.”
대공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 휘하의 병력으로는 어떻게 해도 두 도시를 동시에 지켜내기 어렵습니다.”
“으으음.”
두 귀족은 낯빛이 곤란해졌다.
확실히 안전하게 대도시 하나를 지킬 것인가, 다소 위험하지만 도시 두 개를 지킬 것인가……. 지난 번과 대조해서 두 귀족은 입장이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이제 대공은 안전한 노선을 주장했으며, 공작은 위험한 노선을 지향했다.
이건 피렌체 대공이 제국군에 참패했기 때문이다. 대공은 적군이 얼마나 가공스러운지 철저하게 깨달았다. 위험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감수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대공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간단한 문제 아니겠소.”
“좋은 해법이 떠오르셨습니까, 통령?”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이 당도하기 전에 우리의 손으로 직접 라스페치아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되오.”
“뭐…….”
쑥대밭이라니? 방금 이 여자가 뭐라고 말한 것인가? 피렌체 대공이 그렇게 의문을 가진 순간, 엘리자베트가 재차 확실하게 말했다.
“라스페치아로 병력을 급파하여 성벽을 부수고 주민을 소거시키는 거요. 반항하는 시민은 본보기로 숙청하시오. 제국에 넘겨주느니 차라리 없애버리는 편이 낫지.”
“무슨……지금 제정신입니까!”
대공이 경악하며 엘리자베트를 쳐다보았다. 엘리자베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대공은 가슴속에서 단숨에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우리에겐 라스페치아를 파괴할 권리가 없습니다!”
“영주인 로디 후작이 반역자로 지정되었다. 반역향을 소거시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절차이지 않는가?”
“사르데냐인이 아니라고 해서 무척 쉽게 말씀하시는구려, 통령.”
밀라노 공작도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하나가 되어 제국에 맞서자고 결의한 마당에 또 다시 희생자를 늘린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없소.”
“전략적으로 필요한 조치일 따름이오.”
엘리자베트가 차분히 대응했다.
“제노바와 라스페치아를 동시에 지킬 수 없다. 라스페치아를 온전히 넘겨주면 적군을 살찌우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명확하오. 라스페치아를 파괴시키는 것이지.”
“…….”
대공의 입가가 떨렸다.
대공은 필사적으로 분노를 참아내며 또박또박 말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축복받았군요. 당신 같은 분이 통수권자로 있으니 말입니다.”
“…….”
“여기 골방에 틀어박혀 수만 명의 목숨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느니 필요없다느니 멋대로 재단하는 느낌은 어떻습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어떻습니까, 통령 각하. 권력은 달콤하신지요.”
대공이 오른손으로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결국 대공은 화를 전부 억누르지 못했다.
“사르데냐 왕국의 대장군으로서 명령하겠습니다! 더 이상 아국의 신민을 고의적으로 살상하거나 위험에 방치하는 행위는, 어떠한 미명 아래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통령께선 특히나 주의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통령의 인민이 아니라고 해서 가벼이 여긴다면――내 가문과 명예를 걸고 경고하겠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대지입니다.”
불온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큰일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엘리자베트가 중얼거렸다.
“과연. 아름답군.”
상황에 어울리지 않은 반응이었다. 대공이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의미입니까, 통령.”
“말 그대로의 의미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미처 몰랐소. 그렇군. 이런 기분이었는가…….”
“……?”
질문에 대답이 되지 않았다. 도리어 아리송해졌다. 대공이 공작을 쳐다보자, 공작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만 이쪽을 깔보거나 우습게 여기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더 의아스러웠다.
엘리자베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본인의 예상은 이러하다. 제국군은 라스페치아로 향한다. 제국군은 파르마에서 움직이는 게 이틀 느렸다. 그 이틀 동안 이미 라스페치아의 시민들과 연락하여 반란을 준비했겠지.”
“이틀?”
“본인이 베네치아에서 움직인 것이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도 제국군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느라 시간이 늦었다고 판단해야 한다.”
피렌체 대공이 미간을 좁혔다.
“행군을 채비하느라 늦은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군. 제국은 우리가 움직이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언제든지 진군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겠지.”
“…….”
대공이 다시 공작을 쳐다보았다. 두 명의 대귀족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무엇을 근거로 엘리자베트 통령이 저리도 자신만만하게 확신하는 것인가? 그들 눈에 통령은 지나치게 성급하게 비추었다.
“문제는 라스페치아가 함락당한 이후이다. 제국군은 제노바로 향하지 않는다.”
“그럼 어디로 향한다는 말씀입니까?”
“피렌체. 바로 그대의 영지이다, 대공.”
“……!”
대공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럴 리가. 적군이 피렌체로 남하하면 저에게 후방을 노출하게 됩니다. 그런 위험을 구태여 감수할 까닭이…….”
“피렌체는 그대의 본거지다. 어찌되었든 그대는 제노바에서 나와 제국군을 추격할 수밖에 없다.”
“…….”
“안전한 성안에서 위험천만한 평야로 나오는 것이지. 그것이 제국의 노림수다.”
엘리자베트가 싱긋 웃었다.
대공과 공작은 무심코 그녀에게 시선이 빼앗겼다. 어릴 적부터 대륙 최고의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통령이었다. 두 대귀족은 행군 도중에 기습을 당한 병사처럼 한 순간이나마 멍했다.
“재미있지 않은가. 대공. 제국은 그대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양자택일, 말입니까?”
“아아. 라스페치아의 시민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그대 피렌체의 영지민을 지킬 것이냐. 그대는 틀림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거기서 그대가 어떤 인간인지도 드러나겠지……후후. 가히 악질적인 취미가 아닌가.”
엘리자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티끌 한점 없이 맑은 미소였으나 대공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아까 전에 통령이 지었던 비웃음도, 지금 내보이는 미소도, 전부 이곳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있지 않았다.
“……우스운 이야기로군요. 양자택일이 이루어지려면, 지금 각하가 말씀하신 그대로 제국군이 움직여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적군의 향방을 재단하시는 것입니까.”
“대공. 본인은 제국을 잘 알고 있다.”
엘리자베트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이건 제국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상대방의 신념을 미끼로 삼아서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들이민다.”
“……추상적입니다. 도무지 근거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 것에 기반해서 군을 운용하다니 언어도단입니다.”
“호오, 그런가. 추상적인가.”
엘리자베트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는 명백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대공의 말대로 본인은 한낱 외국에서 온 용병에 불과하다. 내가 고용한 용병들도 급료는 전부 사르데냐의 왕실에서 제공하고 있지. 대리장군으로 임명된 그대가 명령한다면, 나는 잠자코 따르는 수밖에 없다.”
“…….”
엘리자베트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대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건 어떤가. 그대와 내가 내기를 하는 것이다.”
“내기라니요?”
“그대가 판단한 대로 제노바에 주둔하라. 다만, 나는 만약의 사태를 위해서 피렌체로 남진하겠다. 만약 제국이 제노바를 공격하면 본인은 즉시 방향을 돌리겠다. 그리고 다시는 그대의 작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대공이 엘리자베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만일,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국이 남진한다면?”
“본인의 승리다. 대공은 향후 작전을 펼치는 데 있어 본인의 의견을 심각하게 고려해주도록.”
“달리 요구하실 것은 없습니까?”
“그뿐이다.”
대공과 통령이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내기를 받아들이지요.”
“대공!”
밀라노 공작이 나지막하게 질책했다.
“대국을 결정하는 데 있어 사사로운 내기가 끼어들어서는 안 되오!”
“괜찮습니다, 공작. 이 내기는 누가 승리하더라도 왕국에 이득을 안겨줍니다.”
피렌체 대공은 엘리자베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제가 승리할 경우, 통령의 군대가 남쪽에서 북진함으로써 제국군을 쌍방향에서 협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패배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에서 동시에 제국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통령.”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빙그레 웃었다.
여전히 밀라노 공작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경고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 각개격파를 당할 위험이 있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여차하면 선단을 동원해서 해로를 이용하겠습니다.”
“허. 대공의 뜻이 정 확고하다면야, 말리지 않겠소만…….”
엘리자베트가 주먹으로 탁상을 가볍게 두 번 두들겼다.
“결정되었군. 본인은 조금이라도 빨리 남하해야 하니 이만 나가보겠다.”
“……살펴가십시오.”
수정구가 비추는 막에서 엘리자베트가 흐릿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밀라노 공작의 모습도 곧이어 사그라들었다.
회의실에 혼자 남은 피렌체 대공이 주먹을 꾸욱 쥐었다. 양자택일은 전형적인 정치꾼들의 논리였다. 어쩔 수 없었다느니,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느니,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데 써먹는 수사학에 불과했다.
피렌체 대공은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양자택일 따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증명해주겠다…….
============================ 작품 후기 ============================
참고 지도를 올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