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7 양웅(兩雄)의 조우 =========================================================================
* * *
후작이 죽었다. 급편으로 소식이 전달되었다.
국가반역죄, 왕실능욕죄, 신성모독죄……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덤터기씌울 수 있는 죄목 중에서 악질적인 것은 죄다 붙었다. 충신의 최후가 이런 것인가. 끔찍한 농담이로군.
더불어서 사르데냐 왕실은 평범한 사형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극형을 집행했다.
제레미나 데이지를 보면 알겠지만 이 세계는 극형과 고문이 변태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후작은 살갗이 벗겨진 다음 온 핏줄과 근육이 난도질당했고, 뼈는 잘게 부숴버린 다음 개먹이로 던져졌다.
발표에 따르면 후작은 우리 제국과 내통했다고 한다. 밀라노 공작과 피렌체 대공의 작전을 몰래 입수해서 우리에게 알려준 것도 후작, 왕실을 속여서 우리에게 금화를 뿌린 장본인도 후작, 이라고 하던가. 잘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잘 만들어진 희생양이었다.
나는 누가 범인인지 알고 있었다.
후작은 사지(死地)로 걸어들어가기 직전, 나에게 급히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궁중백에게 내 신실함을 담아 보내오. 궁중백이 나에게 요구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하오. 아시다시피 우리가 건너야 할 산맥은 두 겹으로 되어 있었으며, 베네치아에 펼쳐진 첫 번째 산맥을 생각보다 힘들이지 않고 건넜소. 이제 나는 마지막 산을 등정하려고 하오.’
‘편지를 보내는 까닭은 부디 내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오. 나는 궁중백이 약속에 엄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하지만 때때로 엄격함과 잔혹함 사이의 경계는 애매하오. 그 경계를 가로짓는 것은, 바로 두 사람이 나누는 약속으로 인하여 타인이 희생되는가 희생되지 않는가, 그뿐이오…….’
‘이 편지에 내 반지를 붙여두오. 나의 가문과 직위를 상징하는 반지요.’
‘국왕 전하께서 손수 내려주신 가보라오. 내 긍지와 피가 이 작은 물건에 집약되어 있소. 물론 궁중백은 그런 추상적인 것을 선호하지 않을 터이니, 이 반지가 있어야만 우리 가문의 금고를 열 수 있음을 알려두겠소. 사실상 전재산이지. 이제 신뢰가 조금 생기지 않겠소? 농담이외다.’
‘궁중백. 사흘만 기다려주시오. 딱 사흘이외다. 우리의 약속에 의해 타인이, 하물며 무고한 약자가 희생되면 안 되오. 나는 두 번째 산맥을 등정한 다음 궁중백에게 반지를 되돌려받으러 방문하겠소……. 아스카니오 주노 데 로디.’
편지에는 확실히 금반지가 부착되어 있었다.
볼품없고 낡은 반지였다. 이게 당최 황금으로 만들었는지 놋쇠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색깔이 누리끼리했다. 아마 후작 가문의 창고에는 값비싼 물건이 하나도 없을 거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서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틀렸습니다, 후작. 저는 추상적인 걸 아주 좋아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건대, 나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내가 범인이었다.
엘리자베트가 베네치아에 틀어박혀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공화국군은 어디까지나 외국의 용병에 불과했다. 그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후작은 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후작이 엘리자베트에게 갈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트가 후작의 이용가치를 알아보리라는 것도……. 다시 말해, 후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엘리자베트가 아니었다. 나였다.
“주군. 베네치아에서 공화국군이 움직였다는 정보다.”
막사에 라우라가 들어왔다. 가볍게 검술이라도 연습했는지 몸이 땀으로 젖었다.
“병력은 일만이천에서 일만오천 사이라고 한다. 피렌체 대공이 다시 용병을 소집해서 일만오천까지 키웠으니, 다 합치면 삼만 대군에 이른다. 둘이 합류하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시간에 여유가 얼마나 있습니까?”
“음.”
라우라가 망토와 흉갑을 벗어던졌다. 하녀들이 라우라에게 달라붙었다. 미리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와서 하녀 세 명이 라우라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저 하녀들은 모두 벙어리에다 귀머거리였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일수록 좋다. 하지만, 그렇군. 빠듯하게 나흘까지는 여유가 잡힌다.”
“이틀만 더 기다려도 괜찮을까요?”
“…….”
라우라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명령조가 아닌 걸 보니 개인적인 이유로군.”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일이지요.”
“좋다. 우리는 이틀 뒤에 움직인다.”
라우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틀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부탁했는지 이유는 묻지 않았다.
가만히 주둔하는 이틀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공화국의 개입을 비난했다.
주변국들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입을 다물고만 있기 어려워졌다. 주변국은 여태까지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은 타국의 전쟁에, 그것도 '공작 가문 복권'이라는 지극히 사사로운 명분의 전쟁에 마음대로 끼어들었다.
누가 봐도 도가 지나쳤다. 주변국에서 비난이 쇄도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을 위시로 하여 프랑크, 튜튼, 폴리투니아, 칼마르가 차례대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외국에 대한 간섭을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이었다.
루돌프 황제는 최종 권고를 내렸다.
─ 사르데냐 왕국과 공화국을 자칭하는 반역도당에게 최후로 경고하는 바이다. 짐은 그대들에게 칼 대신 악수를 취할 기회를 몇 번이나 주었다. 이제 짐은 더 이상 물러서지도 타협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로지 통보할 따름이다.
─ 밀라노 공작령, 피아센차-파르마 공작령을 파르네세 가문의 영지에 포함시킨다. 아울러 사르데냐 왕국과 반역도당은 즉시 모든 인적·물적 교류를 중지한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그대들은 인간이 죽음 앞에서도 오만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이런저런 외교적 공방이 오가자 이틀은 금방 지나갔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으므로 라우라는 군대를 움직였다. 피아센차-파르마에 최소한의 수비 병력만 남겨두고, 우리 제국군은 사르데냐 중부를 향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목표지는 피렌체 대공이 다스리는 대도시 피렌체였다.
“사흘. 확실히 기다렸습니다.”
이만오천 명에 이르는 군사가 길게 행렬을 이루어 진군했다. 그 광경을 언덕에서 지켜보았다. 내 왼손에는 후작이 남긴 금반지가 끼어 있었다.
“약속은 지켰습니다.”
휴전은 없었다.
한 달 가까이 침묵한 전쟁이 재개되었다.
* * *
사르데냐 왕국군은 현재 총사령관이 세 명 있었다. 피렌체 대공, 밀라노 공작, 엘리자베트 통령이 이에 해당했다.
명목상으로는 국왕의 대리장군인 피렌체 대공이 군권을 잡아야 할 터였다. 그렇지만 밀라노 공작은 순순히 대공을 따르지 않았으며, 엘리자베트 통령에 이르러서는 아예 한 국가의 통수권자였다. 어느 쪽이든 얌전히 명령을 따를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
대공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최근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나머지 대공은 거의 매일마다 위염에 시달렸다. 군대 하나에 총사령관급이 세 명이라니? 농담이라면 웃을 수 있지만 현실이라면 정색하지도 못했다.
세 사람은 지금 수정구를 통해서 회의하고 있었다. 사실 회의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안녕하시오.” “반갑소.” “명성은 일찍이 들었소.” 회의가 시작하고 딱 세 마디밖에 발언되지 않았다. 대공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때 부관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대공 전하. 제국이 움직였습니다.”
“드디어…….”
무심코 대공이 한숨 비슷한 한탄을 흘려보냈다. 공작과 통령도 관심이 갔는지 슬쩍 부관을 쳐다보았다.
“목적지는 어디인가.”
“타루스 강을 따라서 남하하고 있습니다. 전하.”
“타루스……. 그렇군. 제노바로 오는 것인가.”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파르마에서 출발하여 제노바로 오기 위해서는 타루스 강을 따라 진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제노바에는 대공이 머무르고 있었다. 제국군의 다음 목표는 대공 자신이었다…….
“라스페치아일 가능성도 있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밀라노 공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작이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수염이 덩달아서 들썩거렸다.
“타루스 강을 따라가다가 서쪽으로 향하면 제노바. 하지만 동쪽으로 기수를 돌리면 라스페치아가 나오지. 반드시 제노바로 향하리라는 보장은 없소.”
“라스페치아? 그곳에 가서 제국이 얻을 이익이 무엇입니까?”
대공은 공작이 자신의 의견을 반박해서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사실 말문을 열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번 회의에서 대공이 의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로디 후작……실례했소. 반역자 아스카니오의 영지가 라스페치아이지 않았소외까.”
“……그렇군요. 아스카니오는 선정을 베풀기로 유명했던 자. 분명이 영지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대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민들은 지금쯤 아스카니오가 반역죄로 처형당한 것에 분노했을 겁니다.”
“옳소. 제국군이 진군하면 영지민들이 그에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대하오. 아니, 어쩌면 이미 제국과 라스페치아 사이에 밀담이 오갔을지도 모르오.”
“무혈입성인가…….”
이번에는 밀라노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경계하고 싫어하지만 쌍방의 실력은 인정한다. 그런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라스페치아 방면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 노구는 그리 생각하오. 허나 대공이 제노바를 비운다면, 제국군이 마음을 바꿔서 언제든지 제노바로 진군할 수도 있소. 도박성이 강한 걸 부정하지 않겠소.”
“으음.”
제노바인가. 아니면 라스페치아인가.
저들이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전에 야전으로 맞붙는 것도 방법이었다. 문제는 피렌체 대공 휘하에 병력이 13,000명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제국군은 약 삼만.
트레비아 전투에서는 제국보다 병력이 많은 상태에서도 참패했다. 지금은 병력이 많기는커녕 적군에 비해 1/2 수준이었다. 야전으로 덤벼서 도저히 이길 것 같지가 않았다…….
밀라노 공작이 한숨을 쉬었다.
“……아스카니오를 섣불리 죽이는 것이 아니었소.”
“공작!”
피렌체 대공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후작은 공식적으로 대역죄인이 되었다. 후작을 두든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반역죄가 적용되었다. 위험했다.
“대공. 내 입을 막지 마시오. 현명한 노인은 죽음 앞에서 대담해지는 법이오.”
“…….”
“나는 정치적인 타협을 원했지, 후작이 모든 걸 짊어지고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소. 후작은 이 나라와 왕실에 헌신적인 인물이었소. 대공도 잘 알고 있지 않소이까.”
피렌체 대공은 말을 아꼈다.
대공도 공작도 알고 있었다. 로디 후작은 반역을 꾀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는 세계가 살벌한 정치판인 이상, 세 명의 대귀족은 이따금 서로 반목하고 화해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신념대로 사르데냐에 헌신하고 있었다.
공작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아스카니오는 처형당하기 전날 나에게 통신을 해왔다오.”
“공작에게?”
“밀라노 공작령을 포기해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더라이다. 본인의 영지를 나에게 대신 건네줄 테니, 사르데냐의 평화를 위해서 공작령을 놔줄 수 있겠느냐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대공이 설마,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승락하셨습니까?”
“당연히 거절했소. 밀라노는 내 개인 소유물이 아니오. 우리 가문의 역사가 담겨 있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요구라고 생각했고, 냉큼 꺼져버리라고 소리쳤소. 그랬더니 다음날에 아스카니오가 반역죄로 잡혀가더군…….”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구려.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그건 대공도 자신할 수 없었다.
밀라노 공작과 불화를 일으켰을 때부터인가. 제국에 속아넘어 트레비아 강으로 진군했을 때부터인가. 어쩌면, 파르네세 가문을 멸망시키고 한 소녀를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겼을 때부터인가…….
마치 과거의 망령이 진득하게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질척하고, 한번 발을 디디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늪이 있는 것 같았다.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