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76화 (376/510)
  • 00376 양웅(兩雄)의 조우  =========================================================================

    *  *  *

    “통령 각하. 로디 후작이 접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음. 들어오시라 전하도록.”

    엘리자베트가 통령이 탁자에 놓인 서류를 치웠다. 군사지도, 보고서, 정책현황 등, 온갖 잡다한 물건이 탁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비서격으로 따라온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피식 웃었다.

    “청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청소가 아니라 보안상의 안전이다.”

    엘리자베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여기엔 기밀서류도 많아.”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본인의 말을 믿지 않는군?”

    “저는 제 경험을 신뢰할 뿐입니다, 각하.”

    쿠르츠는 엘리자베트만큼 완벽한 인간을 보지 못했지만, 딱 두 가지 분야에 있어서 통령은 완벽하게 무능했다. 청소와 요리였다. 엘리자베트가 하루라도 머물다 지나간 곳은 태풍이 휩쓸고 간 지역처럼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으며, 엘리자베트가 손끝이라도 간섭한 요리는 단맛이 쓴맛이 되고 매운맛이 신맛이 되는 가히 창조주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됐다. 얼른 후작을 모시기나 해라.”

    엘리자베트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엘리자베트는 청소를 포기했는지 손을 털었다.

    사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고도로 훈련된 첩자조차 통령의 책상에서 뭔가 의미 있는 정보를 골라내기란 불가능했다. 저건 그냥 혼돈의 카오스였으니까.

    잠시 뒤, 로디 후작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합스부르크에 정의와 명예가 함께하기를.”

    “여신께서 사르데냐를 영원토록 축복하시기를. 반갑소, 후작.”

    엘리자베트가 일어서서 후작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했다.

    “각하. 갑작스러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후작과 만나는 일이라면 새벽 세 시에도 반갑게 환영하겠소. 본인은 후작의 어깨에 많은 생명이 실려 있음을 알고 있소. 그런 사람은 흔치 않지.”

    엘리자베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엘리자베트는 슬쩍 후작의 이마를 훔쳐보았다. 후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머리가 점점 더 후퇴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만남을 거듭할 때마다 후작의 대머리는 눈에 띄게 확산되었는데, 덕분에 엘리자베트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정도였다.

    “바로 그 생명 때문에 급히 찾아왔습니다. ……통령 각하.”

    “음.”

    로디 후작이 조심스럽게 쿠르츠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쿠르츠는 문가에서 경호원처럼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슐라이어마허 대장. 잠시 후작과 단 둘이서 얘기하고 싶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맥주나 마시고 있게나.”

    쿠르츠가 상쾌하게 미소를 지었다.

    “분부를 받들지요.”

    쿠르츠는 집무실을 나갔다. 쿵, 하고 방문이 닫혔다.

    “안심하시오. 후작. 이 방에는 메모리아 마법이 설치되어 있지 않소.”

    엘리자베트가 후작을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나에게 신앙 고백을 하여도 좋소.”

    “각하께서 특정한 신을 섬기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을 한분 섬기오. 바로 국가라는 이름의 신이지. 강력하고, 눈으로 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웬만한 인간의 소원은 들어줄 수 있다오.”

    엘리자베트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깍지손을 책상에 올렸다.

    “귀국에 지금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종류의 신이기도 하지.”

    “……각하.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군대를 움직이지 말아주십시오.”

    엘리자베트가 가만히 후작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사르데냐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이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각하. 제 개인적인 부탁에 불과합니다.”

    로디 후작이 처참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꼴불견사납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충분히 인지하는 모양이었다.

    특이하군.

    엘리자베트는 흥미가 생겼다.

    후작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약간 둔한 면모가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외교판에서 파트너로 써먹기에 이상적이라는 소리였으므로. 그런 후작이 개인적인 부탁 따위를 운운했다……. 틀림없이 뭔가가 있었다.

    “흥미롭구려. 본인은 지금까지 후작한테 '개인'은 별로 중요한 가치관이 아니라고 생각했소.”

    “물론 소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백성입니다.”

    “까딱하면 반역죄가 될 수도 있소, 후작.”

    엘리자베트가 싱긋 웃었다.

    후작은 이것이 왕국의 공식적인 제안이 아니라 개인적인 부탁이라고 앞서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의 개인적인 부탁이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현재 왕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백성들을 위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했다.

    “……실언했습니다. 소인은 단지 국왕 전하를 위해 견마지로할 따름입니다.”

    “이해하오.”

    너무 쉽다, 하고 엘리자베트가 생각했다.

    단 한 번 함정을 설치했을 뿐인데 후작은 간단하게 걸려들었다. 예전부터 이러했다. 엘리자베트는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상대방을 이용하고 농락할 수 있었다…….

    “제국의 단탈리안 궁중백입니다.”

    “흐음.”

    그 이름을 듣자 엘리자베트는 눈꼬리가 약간, 아주 약간 올라갔다.

    “궁중백이 소인에게 경고했습니다. 통령 각하의 군대가 여기 베네치아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무차별적으로 백성들을 약탈하고 살육하겠노라고…….”

    “신이시여. 그게 정말이오?”

    엘리자베트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서 움직여야겠군.

    “각하. 궁중백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아니, 제정신이지만 미쳐 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서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그런 자에게 무고한 백성들이 살해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으음. 일이 곤란하게 진행되고 있구려.”

    아니었다. 궁중백은 제정신이지만 미친 것이 아니라, 미쳤지만 제정신인 것이었다. 그 두 개는 아주 달랐다.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미천한 자가 부탁드립니다. 각하, 제발 민중을 생각하여…….”

    “후작. 그대의 마음을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아도 좋소.”

    엘리자베트가 오른손을 슬쩍 들어 제지했다.

    “인민은 곧 국가. 이미 본인은 후작에게 동의하고 있소.”

    “하, 하오면…….”

    “문제는 언제나 정치라오.”

    엘리자베트가 깍지손에 턱을 올렸다.

    “그대도 알겠지만 우리 공화국은 귀국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여기까지 온 것이오. 이제 와서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 결과적으로 귀국과 한 약속을 어기게 되오. 귀국은 아국의 유일무이한 우방이자 동맹. 후작, 본인은 친구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소.”

    “……소인이 국왕 전하를 설득하겠습니다.”

    후작이 결연하게 말했다. 죽음을 각오한 눈동자였다.

    “애당초 국왕 전하께서도 전쟁을 달갑게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소인이 진심을 다해 설득하면 분명히 알아주실 것입니다. 무엇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인지…….”

    “흐음.”

    “제국군의 가증스러운 술책으로 인하여 아국은 현재 세 개의 파벌로 나뉘었습니다. 힘을 합쳐도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어찌 분열된 채로 이기겠나이까. 지금은 한 발자국 양도해서 평화를 이룩해야 할 때입니다. 소인은 그리 확신합니다.”

    엘리자베트가 찬찬히 후작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진심이 느껴졌다.

    “허나, 여기서 물러서면 밀라노 공작령을 내주어야 할 터요. 공작이 동의하겠소?”

    “……꼬리를 잘라내야만 살 수 있다면, 어느 정도 희생은 필요한 법입니다.”

    엘리자베트는 다소 감탄했다.

    후작은 정확하게 전세를 판단하고 있었다. 직감인지 본능인지 몰라도, 이대로 제국군과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피렌체 대공이나 밀라노 공작에 비교하면 훨씬 더 판단력이 뛰어났다.

    게다가 밀라노 공작씩이나 되는 인물을 꼬리라고 단언했다. 배짱까지 두둑했다.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밀라노 공작을 숙청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오.”

    “공작은 안 그래도 강하게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후작이 성공하기를 기원하겠소.”

    엘리자베트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후작은 깊이 감명하여 안색이 밝아졌다.

    “각하……!”

    “착각하면 안 되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소. 길어봤자 사흘. 그 안에 그대의 군주를 설득해야 할 것이오. 사흘 뒤에도 소식이 없다면, 본인은 주저하지 않고 군을 움직일 거요.”

    “충분합니다. 소인을 믿어주십시오.”

    두 사람이 단단하게 손을 마주잡았다.

    후작이 한결 가벼워진 기색으로, 그러면서도 비장의 각오를 두르고 집무실을 나갔다. 후작이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엘리자베트가 그를 불렀다.

    “후작. 공화국 군대가 소모하는 식량과 전비가 예상보다 심각하다고 보고하시오.”

    “통령 각하……?”

    “외국의 군대를 유지하느라 거금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군주는 없소. 조금이라도 그대의 국왕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죽어서라도 갚겠습니다.”

    후작은 엘리자베트를 향해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후작이 집무실을 나가고 얼마 뒤, 쿠르츠 슐라이어마허가 교대하듯이 들어왔다. 쿠르츠가 건달처럼 싱글벙글거렸다.

    “밀담은 즐거우셨습니까, 각하. 대머리가 취향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메모리아를 사르데냐 왕실에 보내라.”

    쿠르츠의 입가가 히죽 휘어졌다.

    “괜찮겠습니까? 후작은 십중팔구 사형당할 겁니다.”

    “그리고 사르데냐는 다시금 하나가 되겠지.”

    쿠르츠에게 축객령을 내릴 때,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말했다. '맥주나 마시고 오게나.' 둘 사이에서 맥주는 메모리아 마법을 뜻하는 은어였다. 통령과 후작이 나눈 대화는 집무실에 몰래 설치된 메모리아 아티팩트에 의해 남김없이 기록되었다.

    엘리자베트가 손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왕실에서 허락하지도 않은 회담을 독단적으로 진행. 자국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은연중에 비난했고, 밀라노 공작을 숙청하자고까지 얘기했다. 단순한 사형이 아니라 극형에 처해지겠지.”

    “사르데냐 왕실에 대한 선물입니까?”

    “아니.”

    엘리자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사르데냐에 필요한 것은 희생양이다. 패전을 책임지는 사람이, 실패의 원흉이라 지목되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로디 후작이라는 말씀이군요.”

    “아아. 후작은 일부러 제국군의 용병대에 뇌물을 바침으로써 밀라노 공작의 작전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왕실을 배신하고 제국군을 지지했으며, 우리 공화국군이 움직이지 않도록 공작까지 펼쳤다. 이보다 희생양에 제격인 사내가 없겠지.”

    엘리자베트가 일어나서 창가에 섰다.

    그녀는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후작은 반역자이자 배신자로 전락한다. 이로써 왕실은 밀라노 공작에게 화해를 청할 수 있고, 밀라노 공작도 체면을 차릴 수 있게 된다. 피렌체 대공의 위신도 세워지지.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왕국이 약해서가 아니다. 로디 후작이 내통자였기 때문이다, 라고…….”

    후작이 건물을 걸어나가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국왕을 만나서 설득하려는 듯 걸음걸이가 바빴다.

    “게다가 후작은 국왕과 만나서 우리 공화국군을 잔뜩 흉볼 거다. 전비를 어마어마하게 잡아먹는다느니, 식량이 거덜난다느니.”

    “국왕은 우리가 보낸 메모리아를 이미 감상한 상태겠군요. 각하.”

    “그렇다. 국왕의 눈에 후작은 단순히 공화국을 중상모략하는 배신자로 비추겠지.”

    쿠르츠가 크게 웃었다.

    “완벽합니다, 각하. 당장 메모리아를 전송하겠습니다.”

    “수고하도록.”

    쿠르츠가 집무실에서 나간 이후로도, 엘리자베트는 한동안 조용히 창가에 섰다.

    그녀는 창문 너머를 노려보면서 주먹을 꾸욱 쥐었다.

    “간단히 져주지 않겠다. 단탈리안…….”

    다음날.

    국왕을 접견하러 왕궁에 등청한 로디 후작은 근위병들에 의해서 체포. 왕궁의 복도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포박당했다. 후작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런가. 그랬는가.”

    하고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고위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반역죄가 적용되어, 이례적으로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그날 처형되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이 없냐는 질문에 후작은 단지 침묵했다.

    대륙력 1512년 8월.

    엘리자베트가 통솔하는 공화국군 일만삼천――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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