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75화 (375/510)
  • 00375 양웅(兩雄)의 조우  =========================================================================

    과연 여신께서는 천한 종자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다음날, 합스부르크 공화국에서 외교 성명서를 발표했다.

    외교문서에는 무미건조한 단어가 나열되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이다 못해 지루해빠진 문장이 나불나불 기어다녔다. 쓸데없는 기름기를 싹 걷어내고 오직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내용만 골라내면, 대체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천하의 개상놈이다”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었다.

    세상사란 의외로 간결했다.

    어째서 사람들은 온갖 언어와 장식물을 총동원해서 핵심을 베베 꼴까. 아마 의도적으로 타인이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드려는 것이겠지. 근성이 썩어빠졌다.

    자연미인보다 화장미인이 더 취급받는 세상에 가볍게 회한과 슬픔을 느꼈지만, 아무래도 이 사태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의 성명서는 별다른 비난 없이 타국에 수용되었다.

    라우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의외로군. 공화국은 주변국들에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했다만.”

    “우리가 너무 압도적으로 승리해버린 탓입니다. 주변국에서는 결코 우리가 압승하기를 원하지 않겠지요.”

    나는 라우라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였다.

    우리는 서로 알몸인 채로 침대를 뒹굴고 있었다. 거의 매일 우리 두 사람은 함께 취침했다. 라우라와 내가 연인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나 있었다. 거리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해도 곤란하다. 뭐, 주변국들 생각은 뻔하지요.”

    “그렇군. 공화국은 텀터기를 쓴 것인가.”

    라우라가 내 머리를 빗질하듯이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좋게 말하면 분위기를 읽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스스로 광대짓을 자처하는 겁니다. 주변국들에서 차마 대놓고 하지 못할 말을 공화국에서 대신 말해준다. 나머지 나라들은 이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적당히 동조 의사를 암시한다……음.”

    라우라가 내 입안에 산딸기를 넣어주었다. 파비아 백작과 기사단장, 부단장의 머리에 집어넣으려고 채집한 산딸기였다. 너무 많이 따버려서 상당히 많은 양이 남아버렸다.

    “뭐. 대충 그런 거죠.”

    “결국 제국을 멈춰 세우자고 암묵적으로 외교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 아닌가. 주군은 그래도 괜찮은가?”

    “상관없습니다.”

    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전쟁을 멈춰봤자 공화국에 좋을 게 하나 없습니다. 우리는 사르데냐 왕실한테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청할 것이고, 이걸 거부할 만큼 사르데냐는 입장이 좋지 않지요…….”

    “호오. 공화국은 들러리 역할만 잔뜩 하고 버림패가 되겠군.”

    내가 긍정의 의미로 라우라의 갈비뼈를 문질거렸다. 라우라가 꺄륵 웃었다. 참고로 라우라는 간지럽히기에 겁나게 약했다. 성감대랑 간지럼타는 거랑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공화국 입장에서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갑니까, 라우라.”

    “으응.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애쓰겠지.”

    “전쟁 중에 이루어지는 협상에서 유리해지려면요?”

    라우라가 턱끝을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승리로군……. 공화국은 전투에서 적어도 한 번쯤 승리하길 원할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국에 첩자를 심어두었습니다. 엘리자베트 통령이 베네치아의 원조를 받으면서 용병을 몰래 소집하고 있더군요. 세 달 전부터 말입니다.”

    “세 달 전이라고……? 그때는 우리가 아직 군대를 움직이지도 않았다!”

    라우라는 놀란 목소리였다.

    “하다못해 외교전도 시작하지 않았을 때다. 공화국이 무슨 수로 이쪽의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말인가.”

    “헬베티카 연방이 우리에게 복속을 청하지 않았습니까. 폴리투니아와 휴전하고, 튜튼과 협상하고, 프랑크는 이미 해치웠고, 바타비아는 아닙니다. 남은 선택지는 사르데냐뿐. 간단한 논리입니다.”

    어쩐지 우스워서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간단한 논리를 간파할 정도의 지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흐, 정말 기대를 배반시키지 않는군요. 언제나 저를 즐겁게 해줍니다.”

    “…….”

    라우라가 내 얼굴을 어딘지 흐릿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저기……주군.”

    “음? 뭡니까?”

    “그러니까…….”

    라우라가 말끝을 늘어트렸다.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다. 그나저나 공화국이 함부로 참전하기는 어려울 터인데. 엘리자베트 통령이 전쟁에 끼어들면, 아국의 마왕군은 당장 공화국으로 침공할 것이다. 양면전쟁이 되어버린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마왕군은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

    마족을 동원하는 것이야말로 엘리자베트 통령이 바라는 바다. 그러면 이번 전쟁이 마족과 인간종의 전면전으로 변질되어버린다. 여태까지 잠자코 방관하고 있는 주변국들도 당장 들고 일어서겠지.

    “제2차 국화전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귀족들이 벌이는 정치전이어야 합니다. 엘리자베트 통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쳐들어올 테면 쳐들어와봐라. 우리는 멸망하겠지만, 그 대가로 제국도 곤욕을 치를 것이다…….”

    나는 작게 키득거렸다.

    “정말로 간덩어리가 배밖으로 튀어나온 여인이 아니고 뭡니까. 공화국은 통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피와 땀을 흘려서 만들어낸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그토록 소중한 나라를 마치 체스판 위의 장기말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훌륭하군요.”

    “…….”

    라우라가 또 다시 흐릿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아니, 걱정이 아닌가. 우려? 착잡함? ……어느 쪽이든 사람의 감정은 이렇다 저렇다 딱 잘라서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대신에 라우라의 살에 코를 파묻었다.

    나는 자신이 있다. 준비도 해두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은 틀림없이 올해 안에, 길어도 내년 안에 몰락한다…….

    *  *  *

    합스부르크 공화국이 참전한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였다.

    정확하게 얘기해서 참전은 아니었다. 베네치아를 비롯해서 몇몇 도시들이 공화국에 “부디 우리 도시를 보호해주시오” 하고 요청했다. 공화국은 단지 요청을 받아들여 베네치아에 진주했다.

    그 숫자는 15,000명. 아나톨리아와 폴리투니아 출신의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도시 몇 개를 지키는 데 필요한 용병치고는 지나치게 많았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이럴 때 쓰라고 발명된 격언이겠지.

    아나톨리아 제국의 용병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프랑크 제국이 공중되어버린 지금, 온 대륙을 통을어서 제국을 자처하는 국가는 두 개밖에 안 남았다. 우리 합스부르크 제국과 바다 건너의 아나톨리아 제국…….

    이 이상으로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강대해지면 안 된다고 판단했는가. 아니면 엘리자베트가 뒤에서 부추겼는가. 아마도 후자이겠지. 역시 엘리자베트는 재밌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법을 항상 하나쯤은 들고왔다.

    “타국이 전쟁에 간섭하다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후작!”

    물론 내 개인적으로 공화국이 참전할 걸 예측했다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는 분노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당장 로디 후작을 소환해서 길길이 날뛰었다.

    “참전이 아니오. 단지 베네치아 의회가 만약의 사태를 우려해서…….”

    “참전이 아니라고요? 하. 그럼 피아센차-파르마의 의회가 우리 제국군에 주둔을 요청해도 전쟁에 참여하는 게 아니겠습니다?”

    “그, 그것은…….”

    “어디서 다섯 살짜리 애송이도 웃어버릴 변명을 들고 오는 겁니까!”

    로디 후작이 땀을 뻘뻘 흘렸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나는 지금까지 후작과 면담하면서 단 한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모욕을 당했을 때도 차분하게,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도 냉정하게 대화했다. 언젠가 공화국이 참전할 순간을 위해서, 하나의 카드로 아껴두었다.

    “귀국에서는 우리에게 기다려달라 부탁했습니다! 협상에 필요한 시간을 달라! 후작, 당신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수작을 뒤에서 꾸미고 있었습니까? 이것이 귀국에 대한 우리의 존중을 보답하는 방식입니까?”

    “……뭐라 드릴 말씀이 없소, 궁중백.”

    로디 후작은 처음 목격하는 내 분노에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새였다.

    이 아저씨도 참 불쌍했다. 사르데냐 왕실에서는 어떻게든 타협을 끌어내라고 닥달하지, 밀라노 공작은 뭐 쓸데없이 나서서 대국을 망쳤냐고 욕하지, 피렌체 대공은 괜히 외교전으로 어떻게 해보려 들지 말고 전투나 대비하라고 일갈하지…….

    그리고 나한테 불려와서는 왜 이딴 식으로 사냐고 절찬리에 비난을 받고 있다. 가엽게도.

    아마 로디 후작은 지금 너무 억울한 나머지 혀 깨물고 자살하고 싶을 거다. 외교대사만큼 등골이 휘어지는 역할이 없다. 깽판은 다른 애들이 놓는데 책임은 자기가 몽땅 짊어져야 하거든.

    참고로 나는 안 그래도 불쌍한 사람을 더 불쌍하게 만드는 것이 취미다.

    “파르네세 가문과 귀국 사이의 결투였습니다. 알겠습니까? 제3자가 끼어들어서 더럽혀도 되는 난투장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궁중백의 말이 옳소이다…….”

    “결투에서 패배를 했으면 적당히 승복해야 할 것이지, 이제 자신들이 못하겠으니 타국을 끌어들이겠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귀국은 뻔뻔하고, 수치심을 모르며, 국가 간의 기본적인 존중마저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꽝, 하고 탁자를 발로 걷어찼다.

    탁상이 넘어지면서 그 위에 놓여 있던 포도주병이 산산이 깨졌다. 후작이 움찔했다. 무척이나 값비싼 포도주였지만 상관없었다. 일부러 깨트리려고 올려둔 물건이었다.

    “후작. 이걸 보십시오. 눈 똑바로 뜨고 어디 봐보십시오!”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내 그림자에서 거무튀튀한 가스와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곧장 형태를 이루었다. 죽음의 기사 여섯 마리가 튀어나와 순식간에 나와 후작을 둘러쌌다.

    “구, 궁중백. 이건…….”

    “예에. 죽음의 기사입니다. 이들 하나하나가 제국 제2급 무사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기만 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백 명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후작의 안색이 헬쓱해졌다. 사실은 백 명이 채 안 되지만.

    “이백 명으로 구성된 최상급 기사단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고요하게 적진에 침투하여 적 지휘관의 수급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전력인지 알겠습니까.”

    “…….”

    “이 대단한 전력을, 저는 귀국을 상대하면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는 바로 후작 옆을 스쳐서 내팽개쳐졌다.

    “왜, 제가 언제라도 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는 전력조차 사용하지 못한 멍청이라서 그랬습니까? 이들이 전쟁터에서 얼마나 유용한지 몰라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

    “왜냐하면 이들은 마족이며, 저는 귀국과 오로지 신사 대 신사의 결투만을 벌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귀국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후작, 당신을 인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마왕인 내가 마족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후작은 점점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땅바닥에 코끝이 닿을 기세였다.

    “그걸 당신은, 귀국은, 제 존중과 신뢰를 이다지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정말로, 뭐라 드릴 말씀이 없소…….”

    “공허한 사과는 집어치우십시오!”

    내가 후작에게 바싹 다가갔다. 눈을 치켜세우고 후작을 노려보았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만장일치로 올해의 남우주연상을 갖다 바치리라.

    “만약에 공화국 군대가 베네치아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일 경우!”

    “…….”

    “우리 제국군은 더 이상 어떠한 신사적인 행동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후작, 당신이 그토록 소중하다고 노래부른 민중이 어디까지 처참해질 수 있는지 구경해보시지요!”

    후작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궁중백, 제발……이 소인의 부탁이오. 제발 백성들만큼은…….”

    “그런 광경을 보고 싶지 않으면 공화국 군대를 붙들어두십시오!”

    내가 후작의 몸을 손으로 거칠게 밀었다. 축객령이었다.

    “썩 꺼지십시오!”

    후작은 오늘도 기력이 빠진 모습으로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치 회사에서 핍박받은 아버지의 형상과 같았다.

    나는 후작이 나간 걸 확인하고 서랍에서 새 포도주를 꺼냈다.

    비밀이지만, 저기 탁자에서 굴러떨어져 깨진 유리병에는 싸구려 포도주가 들어 있었다. 미리 내용물을 바꿔치기했다.

    사람이 마실 것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이래 봬도 나는 기본적인 예의에 충실한 남자다.

    “음.”

    포도주를 유리잔에 따랐다. 아름다운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이제 엘리자베트는 깨나 고생할 거다. 공화국을 내버려두고 사르데냐까지 왔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원래 집 나가면 고생이다. 안 그런가, 엘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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