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4 양웅(兩雄)의 조우 =========================================================================
아니나 다를까. 후작은 뇌물 공세를 퍼부었다.
금화 삼천 장이나 오천 장은 우스웠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연대장들이 뻘쭘한 표정을 지으면서 “저어, 궁중백 각하. 이게 오늘 결산입니다.” 하고 보고하러 들어왔다. 나는 그날마다 가장 금화를 많이 벌어온 대장에게는 칭찬을, 가장 소득이 적은 대장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둔하기는! 준다고 해서 그냥 덥썩 받아먹으니 밀당이 없지 않느냐!”
“애인은 수두룩하게 꼬셔본 주제에 정작 늙은 후작 한 명을 제대로 구워삶지 못하는고. 얼간이 같으니라고! 내일도 이것밖에 못해오면 그날로 지옥을 맛볼 줄 알거라.”
“지금 본인이랑 장난하는가! 도대체 금화 일천 장으로 뭘 어떻게 해먹으라는 게냐! 애새끼 용돈도 이것보다는 많을 것이다!”
나흘이 지나자 용병대장들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상관의 허락 아래 뇌물을 받아먹는다는, 지극히 기묘하고 이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용병대장들은 야차처럼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눈알이 시뻘개져서는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오늘은 오천을 벌었습니다, 저는 삼천입니다, 하고 내게 보고해왔다.
“음.”
나는 무척이나 흡족했다.
“좋다. 이제 자네들에게 본인의 비법을 전수해도 될 듯싶다.”
“비법……입니까?”
“본인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단탈리안이다. 일찍이 서열 제71위에서 출세한 마왕이 바로 나다. 트레비아의 강물로 귓구멍을 잘 씻어내고 경청하도록.”
그리고 단탈리안표 특별강좌가 막사에서 비밀리에 열렸다.
“자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자네는 진짜 정보를 흘려라. 모두가 협조적으로 나오면 후작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겠는고. 후작 본인이 '음, 저 자는 설득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은 꽤 확실하게 포섭했다'라고 착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짓 정보를 유포함으로써 도리어 상대방에게 신뢰를 얻는 방법.
“정보는 항상 반쯤만 확실해야 한다. 보급선이 이날 이때 지나가고 있습니다, 라고 알려준다고 해서 정말 그 보급선이 그날 그때 지나가면 안 된다. 한 시간 정도 일찍. 혹은 한 시간 정도 늦게 말해주어야지.”
“어……각하.”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녀는 공책을 들고 아예 깃펜으로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받아적고 있었다.
“저기. 그러면 후작이 저희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정반대다. 후작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차피 의심은 끝까지 가지고 간다. 이럴 때는 오히려 실수를 해주어야 한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음, 만약 이 사람이 나를 정말로 속이고 싶었더라면 완벽하게 연극을 펼쳤을 터인데, 살짝 어수룩한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날 속이려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고 안심하게 만드는 게다.”
의도적으로 실수를 섞어넣음으로써 도리어 상대방에게 안심을 주는 방법.
“상대방이 우위에 서 있다고 착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쪽이 적당히 실수하면 실수할수록 후작은 기고만장하게 나오겠지. 돈을 그만큼이나 줬는데도 이것밖에 못하겠느냐고 말이야.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렇게 단단히 착각을 심어주어야 한다…….”
상대방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고 착각함으로써 결국 의심을 불식시키는 방법.
“알아들었는가, 제군들.”
“예. 각하.”
세 시간에 걸쳐 특별강좌가 끝났다.
용병대장들은 어째서인지 어마어마하게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라우라를 바라볼 때 내보이는 존경심과는 한참 거리가 떨어졌다.
라우라를 향한 시선이 ‘우리 총사령관 전하께선 정말로 대단해!’였다면, 나를 향한 시선은 ‘……단탈리안 전하께서는, 뭐라고 할까. 그래. 정말로 대단한 분이었네……’ 하는 느낌이었다. 무슨 상관인가. 어느 쪽이든 존경심은 존경심이었다. 매우 기분이 좋았다.
“제군은 이제부터 나의 제자다. 나는 아무나 제자로 삼지 않는다.”
“…….”
“나의 기준은 엄격하며,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네들은 사르데냐 왕실의 골수까지 빨아먹고 십이지장은 회 쳐 먹어야 할 것이다.”
용병대장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진심으로 제군의 건투를 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각하!”
그들은 필사의 각오를 온몸에 둘렀다. 수능을 앞둔 재수생의 얼굴이 이럴까 싶었다.
연대장들이 후작을 상대로 세기의 사기극을 벌이는 동안, 우리 제국군은 병참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병참선은 노바라-파비아-피아센차-파르마로 이어졌다. 네 개의 기지는 전부 강으로 이어져 있었다. 강물을 젖줄로 삼아 제국군은 튼튼하고 원활한 병참로를 완성했다.
도시 하나에 인근 마을들을 깔끔하게 털어먹은지라,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식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부족하다 싶은 물자는 현지 주민들에게 직접 돈을 내고 구입했다.
물론 현지인들은 침략군인 우리와 거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도 약탈을 당할 것이냐 아니면 얌전히 물건을 팔 것이냐, 하고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건네주니까 전원이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사실 돈으로 물자를 구입하는 우리 제국군은 무척 신사적이었다.
다른 한편, 제국 본토에서는 끊임없이 외교전을 이어나갔다.
─ 아국은 사르데냐군에 압승을 거두었으나 마땅히 승자로서 관용을 베풀고자 한다.
─ 사르데냐는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에게 본래 물려졌어야 할 영지, 즉 피아센차-파르마 공작령을 돌려달라. 더불어서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으로 밀라노 공작령을 파르네세 가문에 포함시키도록 한다.
─ 이상의 조건만 만족되면 아국은 어떠한 위해도 사르데냐 왕실에게, 또한 사르데냐에서 살아가는 신민에게 끼치지 않을 것임을 약조한다. 아국은 전쟁의 주범인 파비아를 제외하고 어떠한 영지에서도 약탈을 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진심이다.
외교전을 주도하는 사람은 가미긴과 라피스 그리고 이바르였다.
라피스와 이바르는 내 의사를 충실하게 전해주었고, 그걸 바탕으로 가미긴이 외교단을 전두에서 지휘했다. 내가 각본과 대본을 짜고 그녀들이 실행에 옮겼다. 멋들어진 팀워크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르데냐의 귀족들이 주춤했다.
가만히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니, 굳이 전쟁에 나설 이유가 없지 않는가.
안 그래도 밀라노 공작은 거세게 비난을 받고 있었다. 파비아 백작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군사요충지인 노바라가 함락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으며, 심지어 피렌체 대공이 코앞에서 패퇴하는데도 수수방관했다.
사정을 모르는 귀족들이 보기에는 뭐 이런 천하의 상놈이 다 있나 싶겠지.
그런데 마침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원하는 것도 밀라노 공작령 하나뿐이다.
다른 영지는 침범할 계획도 없고 약탈할 생각도 없다고 한다. 또 실제로도 그러고 있다. 귀족들 입장에서는 '그냥 밀라노 공작만 치워버리면……?' 하고 마음이 솔깃해질 법했다.
파비아 백작이 죽은 것도, 노바라가 넘어간 것도, 피렌체 대공이 패배한 것도 전부 밀라노 공작의 책임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책임을 져야지 않겠는가. 그런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당연히 밀라노 공작은 길길이 날뛰겠지. 밀라노를 지배하는 스포르차 가문은 유서가 깊었다. 도마뱀 꼬리 잘라내듯이 깔끔하게 치워버릴 수 있는 버림패가 아니었다.
그러나 밀라노 공작이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공작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도 차가워졌다.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면 하다못해 나가서 싸워라도 보라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공작은 ‘조금만 더 버티면 용병들이 알아서 해산할 것이다!’라고 반박하겠지.
그렇다.
내가 노리는 지점이 여기다.
바로 여기서 사르데냐 왕국은 분열한다.
“단탈리안 궁중백……!”
병참기지를 요새화시킨 지 한 달 가까이 흐른 무렵.
로디 후작이 콧구멍에서 씩씩 김을 불어대며 내 막사에 들이닥쳤다. 후작은 목덜미는 물론이고 훤히 벗겨진 이마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단단히 분노한 게 확실했다.
“어서 오시지요, 후작.”
“나를 속였구려! 용병단을 갖고서 나를 우롱했어!”
내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대머리 후작께서는 드디어 한 달 만에 자신이 인형극에서 멋지게 춤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용병단이라니요? 후작, 설마 개인적으로 우리 용병대장들과 접촉하셨습니까?”
“시치미떼지 마시오!”
시치미가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맞습니다, 라고 선선하게 인정해버리면 어쩌겠는가. 이쪽이 불리해질 만한 증언을 알아서 나불거려줄 의리는 없었다.
“이제 궁중백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았소. 아주 잘!”
로디 후작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후작의 주름살이,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하나하나 전부 셀 수 있었다.
“궁중백은 뼛속 깊이 거짓밖에 모르는 자요. 타인을 농락하고 우롱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소! 그러면서 입으로는 대륙의 평화라느니 양국의 우호라느니, 좋을 대로 무엇이든 지껄이지……당신을 경멸하오, 단탈리안 궁중백!”
나는 다리를 꼬고 그 위에 깍짓손을 올렸다.
“농락하는 자, 배신하는 자, 우롱하는 자입니까. 귀가 가렵지도 않군요.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떠들어주십시오.”
“뭐…….”
“당신은 사르데냐의 전권대사입니다. 사르데냐 천만 신민의 운명이 당신 어깨 위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제국을 대표합니다. 제가 경멸받든 말든 제국이 안녕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요.”
로디 후작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 기세로 밀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바르바토스도, 아가레스도, 심지어 바알마저 나한테 기세를 빼앗지는 못했다. 그들이 못한 것을 당신에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후작.
“당신이 용병단에 무슨 장난을 벌였는지 저는 관심없습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사실은 말입니다, 후작.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쟁이 계속되리라는 것뿐입니다.”
“…….”
“확실하게 말씀드리지요.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날도 후작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갔다. 제법 많은 양의 금화를 허공에 날려버리게 되어서 그런지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다음날, 나는 사르데냐 왕실이 우리 용병단에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을 널리 발표했다.
제국군이 민가에 대한 약탈을 자제하는 등 지극히 '신사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데, 왕국군이 뇌물과 같이 '기사도적이지 못한' 방법을 동원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현했다.
사르데냐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곧바로 폭탄이 터졌다.
밀라노 공작이 여태까지 농성전을 고집한 까닭이 무엇인가. 제국의 용병단에 급료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비롯했다. 그런데 사르데냐 왕실에서 로디 후작한테 명령해서 바로 그 부족하다던 금화를 뿌렸다.
밀라노 공작은 왕실이 대사를 그르쳤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자신이 내세운 대전략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밀라노 공작이 도리어 소리를 높였다. 왕실도 어이가 없겠지. 파비아 백작의 죽음과 피렌체 대공의 패배를 수수방관했다며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작을 책했다. 당장 출진해서 불명예를 회복하라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귀족들은 즉각 세 개의 당파로 갈라졌다.
밀라노 공작을 위시하여, 비난의 화살을 왕실로 돌리는 파벌.
왕실을 중심으로, 밀라노 공작한테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파벌.
마지막으로 쓰잘데기 없는 싸움은 그만두고 전쟁이나 준비하자는 파벌. 여기에는 피렌체 대공이 속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제국군은 한 달 동안 병참기지를 완성시키고, 외교전을 지속하고, 더불어서 적군을 분열시키기도 했다. 용병대장들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챙긴 것은 덤이었다.
“자아.”
포도주를 마시면서 평원을 내려다보았다. 사르데냐의 강물이 유구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붉은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며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기다리느라 슬슬 지치고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엘리자베트.”
유일하게 나의 제국에 대적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부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