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73화 (373/510)
  • 00373 양웅(兩雄)의 조우  =========================================================================

    사르데냐 왕실에서 급히 사신을 보냈다.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겠지.

    밀라노 공작과 피렌체 대공이 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사르데냐 왕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헬파이어 수준으로 떨어졌다.

    과장법이 아니다. 티키누스 전투에서 삼천 명, 노바라 공성전에서 오천 명, 트레비아 전투에서 이만 명이 쓰러지거나 도망쳐버린 것이다. 전부 도합해서 무려 삼만 명에 이른다. 더군다나, 전원이 정예병…….

    우리가 알프스 산맥을 5월 30일에 건넜고, 티키누스 전투를 6월 28일에 끝냈으니, 정확하게 한 달이 걸렸다. 고작 한 달. 사르데냐의 북방군-중앙군 주력은 겨우 한 달 만에 증발해버렸다.

    사르데냐 국왕은, 소문에 따르자면, 전투 보고를 받고 아예 기절했다고 한다.

    “삼만 명! 과인의 삼만 명을 돌려다오!”

    그렇게 비명을 질렀다던가.

    국왕 입장에선 악몽이나 다름없겠지.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은 국왕뿐만이 아니었다. 왕도(王都) 테베레 시민들은 당장이라도 제국군이 들이닥칠 것이라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파르네세 가문의 악귀, 복수를 위해 마왕에게 영혼을 판 마녀……불과 며칠 사이 라우라에겐 수십 가지의 별명이 붙었다.

    악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티키누스 전투가 일어나고 바로 다음날에 두 곳의 영지가 항복했다. 피아센차와 파르마였다. 특이하게도 이곳 영지민들은 제국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 영지는 예전에 파르네세 가문이 다스리던 곳이었다.

    반역향으로 낙인 찍힌 지방이 다 그러하듯이, 지난 내전에서 패배해버린 피아센차-파르마의 영지민들은 극심하게 차별을 받았다. 공작령에서 두 개의 남작령으로 갈기갈기 찢어졌고, 이곳 출신의 인사는 왕실에 등용되지 못했다.

    멍청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사르데냐의 정치가였다면 피아센차-파르마를 저딴 식으로 억압하지 않았을 거다. 피아센차는 백작령으로 격하시키고, 파르마는 남작령으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파르마에 한해서만 차별 정책을 펼친다.

    이러면 파르마 시민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피아센차의 시민에게 향한다. “모두가 잘못했는데 어째서 너희만!” 하고 분개한다. 두 영지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기겠지.

    명심해야 한다. 억압은 하나의 집단을 두 개로 분리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이걸 알지 못하면 그저 잠재적인 반란분자를 키워주는 꼬락서니밖에 되지 않는다. 하긴, 이제 와서 충고해봤자 사르데냐 국왕이 들을 리도 없는가.

    어쩔 수 없지. 모쪼록 다음부터 주의하시길.

    하하.

    아무튼, 왕실에서 전권대사를 파견해온 시기가 바로 이처럼 공포와 반란이 정점을 찍은 시기였다. 사신은 이번에도 로디 후작이었다.

    “오랜만에 뵈오, 궁중백.”

    “그간 안녕했습니까. 후작.”

    대머리에 수염이 덮수룩한 이 중년의 신사는 놀랍게도 이번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귀족 세계에서 드물게도 두개골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 않았다.

    나는 후작처럼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 좋았다. 사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상쾌했다.

    딱히 대머리가 시원해보여서가 아니다. 정말이다.

    “국왕 전하께서는 진심 어린 사과를 황제 폐하와 파르네세 영애에게 건네실 준비가 되어 계시오.”

    약간 잡담을 나눈 뒤에 우리는 본론에 들어갔다.

    “귀국에서 전하의 사과를 받아들여준다면 전쟁은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소.”

    “후작. 저는 아직까지도 파르네세 공작이 파르네세 '영애'라고 불리는 점에 깊은 유감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나는 느긋했다. 지금 급한 사람은 이쪽이 아니었다.

    “영애라니요?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파르마-피아센차를 다스리는 공작가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주인입니다. 우리 둘 사이에 아직도 거대한 인식차가 도사리는 것 같군요.”

    말투는 온순했지만 내용이 반쯤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영애를 파르네세 공작으로 인정한다고 가정해보시오.”

    로디 후작이 신중하게 말했다.

    “파르네세의 영지는 사방팔방이 아국에 포위된 형태가 되고, 결국 '육지의 섬'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오. 교류도 끊기고 상인도 발을 돌릴 터. 그런 영지에 무슨 가치가 있겠소?”

    “흐음. 확실히 그건 문제로군요.”

    내가 유리잔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고심에 빠진 것처럼 보였을까. 로디 후작의 안색이 약간이지만 밝아졌다.

    “알아주어서 감사하오. 이제 보다 현실적인 타협안을…….”

    “그러면 밀라노 공작령까지 우리한테 넘겨주시면 되겠습니다.”

    후작의 얼굴이 굳었다.

    “밀라노라니…….”

    “보십시오. 밀라노까지 파르네세 가문에 포함되면 영지가 헬베티카 연방에 딱 맞닿습니다. 연방은 우리 제국으로 길이 통하니까, 결과적으로 파르네세 가문이 '육지의 섬'이 될 일은 사라집니다.”

    내가 짜잔, 하고 멋진 마술이라도 보여준 것처럼 활짝 웃었다.

    “완벽한 해결책이군요. 어떻습니까.”

    “지금 소인을 우롱하는 것이외까!”

    후작이 흥분해서 탁자를 내려쳤다.

    “밀라노는 아국에서 두 번째로 광활한 공작령이오! 함부로 타국이 가져가니 마니 할 만한 영토가 아니란 말이오!”

    “파르마 공작령도 그만큼 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공중분해되었지요. 이미 한 번 일어난 사건은 두 번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로디 후작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거렸다. 파르마 영지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말을 꺼냈는데 졸지에 두 배, 아니 세 배에 가까운 영토를 내놓으라고 하니 꼭지가 돌아버릴 법했다.

    “우리의 요청은 단순하고 명료하며, 따라서 확고합니다. 후작.”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인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건 우리라고. 그쪽은 이래라 저래라 요구할 처지가 안 된다.

    “우리는 귀국의 국왕 전하가 고귀하신 황제 폐하와 파르네세 공작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합니다. 아울러, 지난 내전 및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으로 밀라노 공작령, 과거의 파르마 공작령, 두 영지를 파르네세 가문에 내주십시오.”

    “그처럼 무례한 조건은 결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합스부르크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즉시 중단하십시오.”

    내 목소리는 한없이 단호했다.

    “이상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이상 타협은 없습니다.”

    “…….”

    로디 후작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었다.

    “궁중백은……처음부터 전쟁을 원하신 것이구려…….”

    “저런. 중상모략은 곤란합니다, 후작.”

    내가 웃었다.

    “저는 한 달 전에도, 두 달 전에도 평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걸 보기 좋게 걷어찬 장본인이 귀국의 국왕 전하입니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마족에게 몸을 팔아재낀 창녀이고, 제국은 마녀 한 명에게 놀아나는 바보집단이다……. 멋진 도발입니다.”

    로디 후작은 목까지 붉어졌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이래서 전쟁을 치르기 전에 명분을 확보해놓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을 때, 상대방에게 거의 무제한적인 요구를 관철시킬 수가 있었다. 그것이 명분의 위력이었다.

    “파비아 백작이 왜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멍청한 작자가 이번 전쟁에 도화선을 불지폈기 때문입니다. 감히 제국의 대장군을 성노예라 모욕하다니 대단한 배짱이었지요.”

    내가 작은 종을 손으로 흔들었다.

    부관이 상자를 세 개 갖고 왔다. 상자는 고급스러운 청색 비단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국왕 전하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한번 열어보시지요.”

    “…….”

    아마 무슨 물건인지 직감했겠지. 후작이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뚜껑을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파비아 백작의 머리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페르세포네 여신이시여.”

    로디 후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파비아 백작의 얼굴은 죽음을 맞이한 순간 그대로 표정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졌다. 마법으로 처리하여 보존해둔 덕택이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보기에 역겨울까봐 딸기향을 첨부했습니다. 포도향과 딸기향, 둘 중에 무엇을 더 국왕 전하가 좋아할지 고심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딸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입을 열면.”

    내가 상자에 손을 넣어서 파비아 백작의 입을 열어재꼈다. 푸르뎅뎅한 혓바닥에 앙증맞게도 산딸기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산딸기를 집어들었다.

    “어떻습니까? 무척이나 우아하지요. 산딸기가 사람의 머리통에 몉 개나 들어갈 수 있는가 시험해보았습니다. 맹세컨대, 후작. 정확히 사십아홉 개가 들어가더군요! 딱 하나가 아까웠습니다.”

    “…….”

    “나머지 상자에는 검독수리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을 담았습니다. 부디 만족스러운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빨로 산딸기를 한입 깨물었다.

    로디 후작이 그걸 보고 다시 두 눈을 감았다.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이오…….”

    “그리고 백작은 살아 있는 자를 모욕했지요. 귀국의 국왕에 제가 한 말을 빠짐없이 전달하십시오.”

    타협의 여지가 전무하다는 걸 느꼈을까.

    로디 후작이 힘없이 막사를 빠져나갔다. 아마도 후작은 밀라노 공작령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종전을 이룩하고 싶을 거다. 그러나 후작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상관없이 사르데냐의 국왕이, 밀라노의 공작이 납득할 리 없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부관에게 손짓했다.

    “연대장들을 집합시키게. 삼십 분 안에 모두 모이도록.”

    “예, 각하.”

    연대장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모여들었다.

    “제장들. 이제부터 사르데냐 왕국에서 자네들을 뇌물로 유혹하려 들 것이다.”

    “뇌물 말입니까?”

    “전쟁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한테 이길 자신은 없다. 그런 겁쟁이 돼지들이 선택할 방법은 뇌물밖에 없지.”

    연대장들이 실실 웃었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헬베티카의 명예를 걸고 뇌물 따위에는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그게 아니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껏 뇌물을 접수해라.”

    “예?”

    “모처럼 선물을 주겠다는 것이다. 괜히 받지 않아서 아쉬워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연대장들이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쪽이 거짓으로 충성심을 떠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안심해라. 나는 금전과 관련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 곁에 무시무시한 아가씨가 한 명 있어서 말이지, 돈으로 거짓말을 하면 엄청나게 혼내거든.

    “선물을 받는다고 해서 사르데냐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런 것이다.”

    “……각하. 설마.”

    “아아, 받아먹기만 하고 입을 싹 닦도록.”

    지나치게 적나라한 말에 연대장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괘,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도리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전쟁터에서 적군한테 도리는 무슨 도리인가. 제군의 지갑이나 배부르게 채워라. 제군이 풍요로워야 병졸들한테 고기 한 점이라도 떨어진다. 여차하면 부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도 좋다.”

    “…….”

    적군에게 뇌물을 받으라고 권장하는 상관은 또 처음이겠지. 연대장들이 어쩔 줄 몰라했다.

    “이건 총사령관의 명령이기도 하다.”

    “공작 전하께서…….”

    “아울러서 공작은 이렇게 명령했다. 각 연대장 별로 왕국에게 얼마나 많이 뇌물을 뜯어냈느냐에 따라서 공적을 평가하겠노라고.”

    내가 탁자를 쾅, 하고 내리쳤다. 연대장들은 화들짝 놀랐다.

    “이건 놀이가 아니다! 전쟁의 일환이다! 사르데냐 왕국에 돈이 적어질수록 장차 제군이 맞이할 적군의 숫자도 그만큼 적어진다! 그대들은 만에 하나라도 방심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뇌물을 받아내야 할 것이야. 알겠는가!”

    “며, 명을 받듭니다!”

    연대장들이 군례를 올렸다.

    “알겠으면 냉큼 나갈 것이지 뭣들 하는가! 행여라도 쥐꼬리만한 뇌물밖에 받지 못한 연대장은 총사령관이 아니라 내 손에 경을 칠 게야!”

    “예, 옙!”

    용병대장들은 헐레벌떡 막사에서 뛰어나갔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로디 후작에겐 미안하게 되었다. 아마 나를 설득시킬 수 없겠으니 휘하 연대장들을 꼬시려고 시도해보겠지. 노력이 가상하다마는,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

    포기해라. 포기하면 편하다.

    ============================ 작품 후기 ============================

    단탈리안이 대체 어느 정도의 영토를 요구한 것인지, 그에 대해 설정란에 지도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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