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71화 (371/510)
  • 00371 제2차 국화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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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어붙여!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밥버러지들아!”

    “최대한 버텨라! 방패로 눈을 가리지 마라!”

    보병들 사이에 피 튀기는 접전이 일어났다.

    창날이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고, 칼이 쇄골을 내리쳐서 어깨와 목의 틈새를 찢어갈겼다. 방패가 방패를 거칠게 밀어재끼는 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사관들은 목을 길게 내뻗어서 이따금 멍청하게 대열을 어지럽히는 병사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십오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흐르자, 일방적으로 밀리는 군세가 있었다.

    제국군이었다.

    사르데냐 보병이 제국군을 조금씩이지만 밀어내고 있었다.

    “전하, 아군이 우세하옵니다!”

    “좋다!”

    피렌체 대공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적군은 아군에 비해 보병이 압도적으로 적다. 밀어붙여라!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총사령관이 흥분하자 열기가 다른 부관들에게도 전염되었다.

    애시당초 강줄기를 도하해서 공격하는 것을 사르데냐의 지휘관들은 꺼려했다. 제국군이 일부러 파비아에서 나와서 이곳까지 진출한 이유가 의심스러웠다. 이쪽이 도하하는 와중에 공격하려는 것 아닌가. 아니면 상류에 댐을 쌓아 터트리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총사령관 코시모 데 메디치는 다르게 생각했다.

    “지금 즉시 도하를 준비하도록.”

    “전하!”

    지휘관들이 놀란 표정으로 반박했다.

    “비록 수심이 얇사오나 안심은 금물인 줄 아룁니다. 소신은 저들이 아군의 반도(半途)에 편승할까 염려됩니다.”

    “내 전해듣기로 제국군은 삼만 명에 이른다고 들었다.”

    대공이 말했다. 목소리가 유독 싸늘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저들은 이만을 조금 넘은 것 같구나. 나머지 군사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가?”

    “…….”

    “파비아에 포로로 붙잡힌 시민만 일만이 넘는다. 그들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천의 병사를 남겨둘 필요가 있다.”

    “……! 대공 전하, 설마!”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 창녀는 기어코 파비아의 시민들을 처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적군이 이곳까지 진출한 이유는 시민들을 정리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우리가 도하를 두려워해서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파비아에선 끔찍한 비극이 벌어진다.”

    지휘관들이 길게 탄식했다.

    “여신이시여…….”

    “빌어먹을 제국놈들! 명예도 모르는가!”

    적군의 잔인한 처사에 분노하는 이도, 지금쯤 파비아에서 벌어지고 있을 참극에 표정을 찡그리는 이도 있었다. 피렌체 대공은 당장 분노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알겠는가. 저들은 우리에게 승리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게 아니다. 후방이 정리될 때까지, 조금 더 가볍게 후퇴할 수 있도록 우리한테서 시간을 벌어보려는 심산이다…….”

    대공이 날카롭게 전방을 쳐다보았다.

    제국군의 궁기병대가 이쪽을 약 올리며 깔짝깔짝 화살을 쏘아댔다. 어지간히도 이쪽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은 것이리라. 누가 봐도 아군을 유인하는 몸짓이었다.

    정말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에는 너무나 빤한 술책이었다. 피렌체 대공이 가늘게 눈을 떴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술책에는 속임수가 들어 있기 마련. 어디 확인해볼까.’

    대공은 우선 궁기병대에 똑같이 궁기병대를 출진시켰다.

    병력은 일천. 의도적으로 적군과 숫자를 엇비슷하게 맞추었다.

    대공의 계산은 간단했다. 만약 적군이 정말로 우리를 끌어내고 싶어 한다면, 궁기병대를 더욱 더 충원해서 이쪽을 공격해올 것이다. 적군이 군사를 투입하면 이쪽도 똑같이 투입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저 유인하는 척 시늉하는 것이라면.’

    대공이 판단했다.

    ‘제국군은 계속해서 일천 명 남짓하는 궁기병대로만 이쪽의 신경을 툭툭 건드릴 것이다. 그 경우, 저들의 목적은 우리에게 의심암귀를 불어넣는 것. 섣불리 강을 도하하지 못하게끔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대공이 냉정하게 전장을 바라보았다.

    제국군 궁기병대가 왕국군 궁기병대에 쫓겨서 강을 넘었다. 충분히 추격했다 싶어서 왕국군이 돌아오려는 순간, 제국군이 돌연 반전하여 또 다시 공격해왔다. 그 광경을 보고 대공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역시 허장성세였는가.”

    적 궁기병대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대공은 세 가지 판단을 동시에 내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제국군은 정말로 우리를 유인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진짜 목적은 지연책. 유인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고, 저들이 무슨 함정을 준비했을까 두려워하도록 만든다.

    두 번째. 저들은 전면전을 바라고 있지 않다.

    아마도 적군은 파비아 시내가 파괴되었다는 정보가 우리한테 입수되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적군은 몰래 후퇴하고 싶어하는데, 정보가 새어나가면 이쪽에서 급히 추적하리란 사실이 명백하므로.

    즉, 세 번째.

    적군에게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싸우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전군에 전진 명령을 하달하라!”

    이제 피렌체 대공은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강물을 도하해서 공격하는 것은 틀림없이 위험하다. 그러나 트레비아는 수심이 얕다. 실제로 제국군 궁기병대는 제 집 안방마냥 강줄기를 건너고 되돌아오고 하지 않는가.

    여전히 도하 도중에 공격받을까 염려되는 지휘관들을 향해 대공이 말했다.

    “안심하라. 제국군은 의도치 않았겠지만 우리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저 강으로 군대를 진전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제 꾀에 자기가 넘어진다는 건 이걸 두고 하는 말이다.”

    대공이 씨익 웃었다.

    지휘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확실히 적 궁기병대는 이쪽을 대신해서 트레비아가 안전한 강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보병이 강에 들어가도 기껏해봐야 허리까지 물이 차오를 뿐이겠지.

    “예, 전하! 각 연대에 즉각 명을 전달하겠습니다.”

    평원에 뿔나팔이 길게 울려 퍼졌다.

    기사단을 필두로 왕국군 삼만 명이 전진했다.

    곧이어 양익의 기병대가 먼저 강을 건넜다. 그러자 적군도 기병대로 대응했다. 강 너머에서 기병대끼리 접전을 펼치는 와중에, 보병들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견뎌내며 힘차게 나아갔다.

    “…….”

    “…….”

    지휘부는 긴장에 휩싸였다. 이때가 제일 위험한 고비였다.

    기사단과 기병대를 먼저 내보낸 것은 무사히 도하를 완료하기 위함이었다. 행여나 적군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기사단과 기병대가 필사적으로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제국군에 기병이 생각보다 많았다. 척 봐도 아군보다 두 배가 넘었다. 무장이 빈약한 경기병이 아니라 기사나 다름없이 갑옷과 마갑을 갖춰입은 중기병이었다. 언제까지 아군이 버텨줄지 미지수였다…….

    ‘신들이시여! 부디 학살자에게 자애를 베풀지 말아주소서!’

    대공이 기도했다. 그는 덤덤하게 말에 올라타서 지휘부와 함께 강을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만큼은 누구보다 초조했다.

    ‘마족에게 몸을 팔아재낀 창녀를 용서하지 마시옵고, 무엇보다도 무고하게 죽어나간 시민들의 복수를 제가 이루어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보병들은 빠르게 트레비아 강을 건넜다.

    말발굽이 물결을 헤쳐나와 무른 땅을 밟은 순간, 피렌체 대공은 승리를 예감했다.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아군의 기병은 두 배가 뛰어넘는 적 기병을 상대로 훌륭하게 버텨주었다!

    “제군들! 보아라!”

    대공이 기쁨에 차서 소리 질렀다.

    얼굴에 기쁜 감정이 드러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대공은 위엄이 넘치는 표정과 목소리를 유지했다. 총사령관은 안색이 약간 변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막대하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대공은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은 우리가 곧바로 진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도하를 성공했다. 우리는 적의 허를 찌른 것이다!”

    “대공 전하의 혜안이 실로 옳습니다!”

    부관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제군들이 분발할 차례다. 압도적인 보병 전력을 허투로 낭비하지 않고 적도를 쓸어버리도록!”

    “예, 전하. 전군 앞으로!”

    무사히 트레비아를 넘은 왕국군이 자신만만하게 진군했다.

    대공이 흐뭇해하며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연대가 강을 전부 건넜다. 그런데 강가의 군데군데 늪이 엶게 퍼져 있었다. 운 나쁘게 그곳으로 빠져나오게 된 병사들은, 허벅지에 질척질척한 진흙을 묻힐 수밖에 없었다.

    ‘저런.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피렌체 대공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천운이다. 도하가 반쯤 이루어진 시점에서 공격을 허용했다면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만약 제국군이 전면전을 치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면, 또 지리를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면, 십중팔구 저곳 늪지대로 왕국군을 몰아세웠을 터. 왕국군은 끔찍한 상황에 처했으리라…….

    “흐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기를 하나 넘겼다는 생각에 대공이 안도했다.

    또한, 대공은 더욱 더 강하게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제국군은 정말로 회전을 치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이 근방의 지리에 미숙한 것도 분명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제국군을 지금 공격한 건 극히 올바른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병과 보병이 맞부닥치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결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하, 아군이 우세하옵니다!”

    부관이 흥분한 어조로 보고했다. 십 미터. 접전이 발생한 이후에 왕국군의 대열이 제국군의 대열을 십 미터 뒤로 밀어냈다. 삼십 분 만에 전열이 십 미터나 밀린 것이었다. 제국군은 명백히 열세에 처했다.

    피렌체 대공도 무심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다! 적군은 아군에 비해 보병이 압도적으로 적다. 밀어붙여라!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희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행운과 불운이 차례로 교대하듯이, 다른 부관은 안 좋은 소식을 보고했다.

    “아군의 우익 기병대가 패주하고 있습니다!”

    “무슨……베르티모 남작은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대공이 반응하기 전에 주변의 연대장이 버럭 일갈했다.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받아먹던 작자가 정작 전투에서는 가장 먼저 꼬리를 말고 도망치다니! 전하! 남작을 군법으로 처벌해야 마땅한 줄 아룁니다.”

    “음. 전투가 끝나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바로잡겠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심 우익 기병대를 탓하지 않았다. 두 배가 넘는 적병을 상대로 이만하면 충분히 잘 버텨주었다. 하지만 아군의 패주를 관대하게 용서하면 다른 병사들까지 쉽게쉽게 도주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에 루아노 기사단장은 명불허전이군요. 한치도 밀리지 않고 있사옵니다.”

    “비록 우익이 무너졌으나 좌익이 굳건하니,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사려됩니다.”

    현재 전황은 왕국군에 우세했다.

    일단 중앙의 보병에서 숫자 차이가 극심했다. 제국군이 약 일만오천에 지나지 않는데 반하여, 왕국군은 약 삼만 명의 보병으로 밀어붙였다.

    기병전에선 제국군이 유리했다. 하지만 전황을 뒤바꿀 정도로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우익의 기병대가 패배하여 도망쳤지만, 좌익에선 피렌체의 기사단장이 용감무쌍하게 적군에 맞섰다.

    아직까진 왕국군이 근소하게 압도한다 표현해도 좋겠지. 그러나 중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상, 어느 순간부터 제국군은 급속하게 전력이 줄어들 게 분명했다.

    장기전이다, 하고 대공이 생각했다. 앞으로 길게는 여섯 시간. 짧게는 두 시간까지 전투가 이어지겠지…….

    헬베티카 용병은 다른 용병보다 질이 뛰어난 만큼 넉넉잡아 다섯 시간까지는 각오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군의 승리였다.

    ‘문제는 적군을 추격할 기병전력이 전무하다는 게로군.’

    대공은 입맛이 썼다.

    ‘전투에선 승리하겠지만 적군은 적어도 전력의 7할을 보존할 것이다. 완승이지만 대승은 아니다. 단기결전으로 이번 전쟁을 끝내는 것은 무리인가……아니. 지금은 파비아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자. 밀라노 공작이 못한 것을 내가 해냈다! 그걸로 충분하다…….’

    대공이 우익에 전력을 보강하라고 명령하려던 찰나였다.

    “저, 전하. 루아노 기사단장으로부터 보고가!”

    생각에 빠져 있던 피렌체 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수정구를 든 마법사의 얼굴이 헬쓱했다.

    “무엇인가. 서둘러 보고하라.”

    “아군 좌익에, 적이 급습! 게트아네 부기사단장이 전사!”

    “……!”

    대공을 비롯해서 지휘부 전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습입니다! 제국군의 복병이 기사단의 측면을 기습했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된다. 어디에서 복병 따위가…….”

    “좌익의 기병대는 이미 패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단도 3할……아니, 4할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기사단장은 급히 명령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작품 후기 ============================

    작품설정란에 전투 지도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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