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70 제2차 국화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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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력 1512년 6월 28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오늘, 곧이어 푸르게 될 하늘은 지상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도록 또 한 번 강요된다.
그것은 여름비로 습해진 땅바닥에 다시 엎어지는 핏물이다. 방패에 박힌 징이 또 다른 방패에 박힌 징을 내리치는 쇳소리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살육이라 부르며, 전쟁이라 부르고, 비극이라 부른다.
그러나 어떤 단어를 써봤자 오늘 지켜보게 될 광경을 담아낼 수는 없다.
이날 삼만 명이 죽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 채로 살해당할 것이요, 또한 기꺼이 살해할 것이다. 여기에 책임 따위는 없다. 사람은 얼마든지 무책임하게 타인의 목덜미에 칼날을 쑤셔박을 수가 있다.
사가(史家)는 이에 대해 뭐라 논평하겠는가.
화려한 언어와 문체를 총동원하여 무엇을 역사서에 남길 것인가.
기껏해야 사람의 추악한 본능이겠지.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며 음울한 어조로 비극을 노래하고, 결국 몇 사람의 용기, 몇 사람의 지략, 몇 사람의 행운만이 마치 유일하게 특별한 것인양 기록되리라.
거기에는 피가 없다.
청동과 청동이 맹렬하게 부딪치며 내는 징소리도, 살인자가 코앞의 살인자에게 터트리는 노호마저 없다.
그러므로, 기억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나는 영원을 살아가는 마왕으로서 이날 평원에 흩뿌려질 피 한 방울까지 기억한다. 미적지근하게 사람의 본성 따위를 책망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책임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영원토록 이곳에 남을 것이다.
“대장군.”
“아아.”
라우라가 천천히 뒷머리를 한데로 묶었다.
우리군은 현재 피아센차를 향해서 진군하고 있었다. 피아센차를 공략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전력에서 열세인데 공성전을 걸 리 만무했다.
목적지는 우리군과 왕국군 사이에 흐르는 강줄기였다.
파비아에서 피아센차로 향하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저 강줄기를 거치는 남쪽길. 그리고 밀라노 방향으로 우회하는 북쪽길이다.
“만일 북로를 택하면 밀라노와 피아센차 사이에 끼어드는 모양새가 된다. 피렌체 대공은 의심하겠지. 우리가 내분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터인데, 어찌하여 자처해서 더욱 더 위태로운 포위망으로 끼어드는가…….”
자칫 이쪽의 의도를 의심해버릴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남쪽길이다.
“공작. 저는 드 블랑 남작이 잘 숨어줬는지 걱정입니다.”
“남작은 지난 번에 별동대를 맡아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적임자다.”
드 블랑 남작은 밤새도록 추격전을 벌였다. 그녀는 막사에서 세 시간만 자고 또 다시 텔레포트 마법서를 사용해서 어디론가 떠났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지난 밤, 라우라는 포로를 설렁설렁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포로를 뒤쫓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목적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드 블랑 남작이 이끄는 기병대는 지금 강줄기 근처의 숲에 매복했다.
한밤에 탈주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기병대가 출동했다. 우리군에 섞여 있을 스파이(당연히 스파이는 어디에나 있다)가 설령 기병대가 나가는 것을 목격했을지라도, 적군에는 ‘포로를 뒤쫓기 위해서 기병대가 출동했다’라고 보고되겠지.
매복을 의심하지 않게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덧붙여서, 간밤의 수색전에는 기병 일천과 보병 일천이백이 동원되었다. 보병 이백은 눈속임용으로 다시 우리 진영으로 복귀했다. 나머지 이천은 지금쯤 드 블랑 남작과 함께 숨을 죽이고 숲에 숨었겠지.
이 세계에 와서 제법 전쟁짓하러 돌아다니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아군의 병력은 무조건 부풀려서 광고하라는 것이다.
아군이 일만 명이면 이만 명으로 속이고, 이만 명이면 오만 명으로 부풀린다. 이건 허세가 아니다. 그래야 본진에서 별동대가 일이천 빠져나가도 적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군도 적군도 안다. 오만 명이 뻥튀기한 숫자라는 사실을. 요는 이쪽에 정확히 어느 정도 병력이 갖추어져 있는지 감을 못잡게 만들면 그만이다.
아군의 병력을 잔뜩 줄여서 발표하거나 아니면 잔뜩 늘려서 발표해야 하는데……아무래도 과장하는 편이 낫다. 본국이나 동맹국에 원조를 요청할 때도 ‘지금 삼만 명이 굶고 있습니다!’보다 ‘지금 오만 명이 굶고 있습니다!’라고 해야 떡고물이 더 떨어진다.
아무튼 적군은 이쪽의 병력을 정확히 몰랐다. 복병 이천의 누락은 허용 범위였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라우라를 쳐다보았다. 냉정하고 늠름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이 아이는 언제나 일타쌍피를 취했다. 일부러 포로를 풀어줌으로써 적군이 서둘러 출진하도록 유인했다. 그와 동시에 의심의 눈초리를 피해서 복병을 숨겨두었다…….
매복이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높겠지. 감탄스러운 솜씨였다.
복병 자체는 누구나 떠올릴 만큼 평범한 발상이다. 문제는 그걸 실제로 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 여기에서 삼류와 이류가 갈린다. 발상을 실제로 실현하면서 일거양득까지 취해버린다면, 틀림없이 일류에 속하겠지.
“정찰부대의 첩보입니다, 전하.”
부관 한 명이 말을 몰아 황급히 다가왔다.
“피아센차에 있는 적군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출진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나. 피렌체 대공은 결단이 빠르군.”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푸른 산양 기병연대에 명령을 하달한다.”
“예, 전하!”
“지금 즉시 선봉대로서 달려나가 피아센차의 적 진영에 한바탕 화살비 세례를 퍼붓고 와라. 접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사르데냐놈들의 엉덩이에 화살맛을 조금만 보여주는 걸로 충분하다.”
난쟁이족 연대장이 군례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놈들을 십분 끌어오겠습니다.”
궁기병 일천 명이 긴 행군대열에서 빠져나가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마법전을 대비해서 마법사도 열 명이 함께 따라나섰다.
궁기병대가 적군을 깔짝깔짝 괴롭히는 동안, 우리는 본래 목적지인 강줄기에 도착했다. 라우라는 이 강줄기를 눈앞에 두고 진영을 꾸리도록 명령했다.
강줄기의 이름은 트레비아.
사실 강이라기보다 조금 넓은 개천에 가까웠다. 강폭은 넓지만 깊이가 얇았다. 본래 사르데냐에서는 여름에 비가 드물었고 겨울에 비가 잦았다. 건기라고 표현할 만큼 비가 드문 것은 또 아니라서, 그럭저럭 강줄기의 구색이나마 갖추었다.
다만 강 주변으로 드문드문 늪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만일 대군이 트레비아를 도하한다고 하면, 일단 느릿느릿한 유속과 얄팍한 수심에 안심할 거다. 그러나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늪 웅덩이가 있어서 발자국을 내딛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다시 말해, 소수의 병력이 건너기엔 안성맞춤이지만 대군이 한꺼번에 움직이기는 썩 길이 좋지 않다.
라우라는 보름이 넘도록 사방팔방 정찰부대를 파견하여 인근 지리를 꿰뚫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피아센차 부근에서 전투가 일어나리라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특히나 이 주변은 정찰부대에게 일일이 확인해보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라우라는 트레비아 강을 전쟁터로 낙점했다.
“겉보기에는 만만하되 실상은 난해하다. 이 작고 볼품없는 강줄기는 매복 작전에 써먹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잠시 뒤, 궁기병대가 강 저편에서 복귀해왔다. 연대는 적군의 기병에 쫓기고 있었다.
연대가 주저없이 강물에 뛰어들어 우리 진영으로 달아나자 적들이 주춤했다. 기병 단독으로 깊숙한 곳까지 추격하기는 부담스러웠겠지. 이만큼 내쫓았으면 됐다, 하며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궁기병대가 강을 건너다 말고 다시 공격했다. 적군을 약 올리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사르데냐 왕국군의 기병연대도 활을 빼들어서 응수했다.
제법 진귀한 장면이었다. 궁기병과 궁기병이 강가 근처를 맴돌며 사격을 주고받았다.
참고로 궁기병 간의 대결은 가장 손실이 적은 싸움이었다. 멀리 있는 적병을 화살로 맞히기도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움직이는 말에 앉아서 움직이는 적을 맞히기란 오죽할까. 거의 촌극에 가까웠다. 솔직히 화살값이 아까웠다.
오후가 되자 사르데냐 본군이 움직였다.
적은 이미 완벽하게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궁병들이 앞서고 뒷배를 장창병들이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행여나 궁기병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적군은 기병까지 충원했다.
라우라가 멀리서 펼쳐지는 조우전을 관찰했다.
“적군은 기병이 적군.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은 삼천 정도이다.”
“삼천이 안 됩니다. 이천사백, 이천육백 정도일까요.”
옆에서 엘프 연대장이 말을 거들었다. 엘프족은 인간보다 눈이 좋았다.
“다만 피렌체의 검독수리 기사단이 까다롭군요. 육백 명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입니다만, 사르데냐 왕국 최강의 기사단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사르데냐 왕국에서 최강인가.”
라우라가 슬쩍 웃었다.
“요즘은 아무데서나 최강을 자칭하는 것이 유행인 모양이군. 그래서, 저들이 무서운가?”
“설마요. 사르데냐의 기사단 따위를 두려워해서야 용병짓도 못해먹습니다, 전하.”
용병대장들이 실실 웃었다. 사기는 충분했다.
“작전을 변경한다.”
라우라가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툭툭 쳤다.
“본래는 적군이 도하할 때를 노려서 공격하려 했다마는, 그럴 필요가 없어보이는군. 적군이 강을 완전히 건널 때까지 기다려준다.”
“쉽게 갈 수 있는 싸움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전하?”
“아아. 적군에 기병이 이천오백뿐이라면 구태여 조심할 필요가 없다.”
용병대장들은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은 눈앞의 젊은 총사령관 전하에게 제법 튼실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궁기병대가 적군의 기병에 쫓겨서 강줄기를 건너왔다. 이번에는 적군도 과감했다. 궁기병대를 바짝 쫓아서 트레비아 강을 넘었다. 적들이 트레비아를 다 건너자마자, 라우라가 지휘봉을 휘둘렀다.
“모든 기병연대는 돌격하라!”
미리 대열을 짜두고 있었던 기병연대들이 뿔나팔을 불었다.
인근의 숲에서 매복하고 있는 드 블랑 남작의 휘하를 제외하고, 아군의 모든 기병이 말갈기를 휘날리며 달려나갔다. 경기병대까지 포함해서 그 숫자는 사천오백을 헤아렸다. 적군의 두 배에 해당하는 전력이었다.
양익에서 치열한 기병전이 이어졌다.
그 사이, 적군의 보병들이 트레비아를 넘어왔다.
적들은 지체하지 않고 우리 본대를 향해서 접근해왔다. 물경 삼만 대군의 보병이었다. 대군이 항오를 맞추어 다가오는 모습은 베테랑 용병에게도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궁병 앞으로!”
“궁병 앞으로!”
라우라의 명령을 내가 이어받아 확성마법으로 소리쳤다. 오천 명에 이르는 궁병이 장창병들 앞으로 일렬을 이루어 나아갔다. 곧이어 동일한 명령이 저편에서도 울려 퍼졌다.
“사격 개시!”
“쏘아라!”
지휘관들의 명령에 맞추어서 궁병들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때때로 상대편의 깊은 곳까지 떨어져 누군가의 허벅지를, 혹은 팔뚝을 맞추었다. 그러나 우리군이든 왕국군이든 피해는 심각하지 않았다.
화살 세례가 몇 번 오갔다. 그동안 양군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한 걸음, 부정할 수 없는 한 걸음이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눈 좋은 인간이라면 적병의 얼굴 표정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서로 가까워졌다.
“궁병을 양익으로 물려라.”
라우라가 명령했다. 이제 신사적으로 화살만 주고 받는 시간은 끝났다.
아군의 궁병은 양익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고, 적군의 궁병도 장창병 뒤쪽으로 숨어버렸다. 허공을 가로짓는 화살의 숫자가 잠깐이지만 확실하게 줄어들었다.
이제 저들이든 우리든 발걸음을 뒤로 물릴 수 없다.
등을 돌린다면 오직 패배해서 처참하게 도망칠 때뿐.
“황제 폐하를 위하여!”
“국왕 전하에게 영광을!”
전투 함성과 함께 아군의 제1열과 적군의 제1열이 맞부닥쳤다.
트레비아 전투의 개시였다.
============================ 작품 후기 ============================
전쟁 지도를 설정란에 올려둡니다.
상세한 전투 지도는 아마 다음화에 올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