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69화 (369/510)
  • 00369 제2차 국화전쟁  =========================================================================

    명령에 충실하게도 기병대가 적당히, 설렁설렁, 대충 탈주자를 추적했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나 설렁설렁이었다. 포로들은 맨발로 뛰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에겐 천천히 말발굽을 모는 기병조차 공포 그 자체였다. 기병대장의 보고에 따르면, 포로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필사적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전하. 포로들이 피아센차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습니다.”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보고했다. 밤새도록 추격전을 벌이다 와서 그런지 얼굴이 헬쓱했다.

    “정말로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녀석들한테 화살비를 날렸습니다. 운이 안 좋은 녀석이 맞고 쓰러지더군요. 피아센차의 경비병들도 그걸 빤히 봤습니다. 아마 포로들이 간자로 의심받을 가능성은 적을 겁니다.”

    “수고했다, 남작. 푹 쉬도록.”

    감사합니다, 하고 남작이 집무실에서 나갔다.

    남작이 나가고 난 다음에 내가 물었다.

    “라우라. 왜 일부러 포로를 대공한테 넘겨준 겁니까? 포로들은 우리군의 실상을 꿰뚫고 있습니다. 대공에게 공짜로 정보를 건네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피렌체 대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대공을 끌어들여?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은 지금껏 우리군의 전략을 의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  *  *

    “……종잡을 수가 없군.”

    피렌체 대공이 하얀 미간을 찌푸렸다. 찡그린 얼굴에도 귀티가 흘렀다. 주변에 모여든 연대장들은 그런 사령관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 적들은 계속해서 정찰부대들을 보내오는 것이지? 고작해야 백 명 단위다. 이래서야 마치 우리에게 간식거리를 끝없이 던져주는 꼴이지 않는가…….”

    “으음.”

    연대장들도 곤란한 듯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현재 왕국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승전에 순수히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은, 적군의 숫자가 지나치게 적기 때문이었다.

    적게는 오십 명, 많아봤자 이백 명. 그것도 싸움이 일어나면 얼마 창칼을 섞다가 냉큼 도주해버렸다. 전투보다 차라리 조우라 표현하는 편이 알맞았다. 이래서는 승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어 방심하게 만드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술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이다…….”

    “예. 그렇습니다.”

    연대장들도 난감한 얼굴이었다.

    상대에게 자그마한 승리를 계속 던져준다. 결과, 상대는 적이 허약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상대는 방심하기에 이르며 그 틈을 노리고 공격해온다.

    너무나 전형적인 술책이었다.

    이런 책략이 실제로 먹히려면 '자그마한 승리'의 규모가 어느 정도 거대해야만 했다. 적군의 정찰부대 백 명을 무찔렀다고 해서 방심할 멍청이는 없었다. 적어도 코시모 데 메디치 대공은 그런 멍청이가 아니었다.

    연대장 한 명이 말했다.

    “적은 우리가 밀라노의 군대와 합류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굳이 합류해야 할 만큼 적은 강하지 않다, 그런 인상을 우리한테 심어주고 싶겠지요.”

    “제군. 그러면 저들은 우리를 바보로 취급한다는 얘기가 되는군.”

    “…….”

    바로 그 점이 석연치 않았다.

    피렌체 대공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휘하는 달랐다. 헬베티카의 기라성과 같은 용병부대가 줄줄이 서 있었다. 어떤 연대는 역사가 이백 년이 넘었다.

    전설적인 부대를 이끄는 대장들이 라우라 데 파르네세한테 진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허술한 속임수로 상대를 농락할 수는 없다고.

    “설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제국군의 총사령관은 훨씬 더 멍청하여, 부하의 진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인사라는 것인가…….”

    “하하.”

    연대장들이 작게 웃었다. 만약 그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멍청이라면 브르타뉴군을 물리치지도 못했겠지. 즉, 적들에게 뭔지 모를 의도가 숨어 있다고 봐야 했다. 대공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도 한번 농담을 던져본 것이었다.

    “아무래도 제국군은 우리가 조급해하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장단에 놀아줄 필요는 없지. 이곳 피아센차에 목책을 두르고 단단히 방비하라.”

    “예, 대공 전하!”

    이틀이 지났다.

    병사들에게 충분히 휴식을 안겨주었다. 피렌체 대공은 슬슬 파비아로 공격해들어갈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대공의 종사가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왔다.

    “영원한 영광에 충성을. 보고드립니다.”

    “음.”

    대공이 탁자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이 낮은 자가 신분이 높은 자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도,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온 것도 예의에 어긋났다. 하지만 대공은 군중에서 거추장스러운 예법을 모조리 금지했다.

    “파비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전하.”

    “반란?”

    대공이 깃펜을 멈추었다. 그는 왕실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본능적으로 지금 막 들은 소식이 매주마다 바쳐야 하는 장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상세히 보고하라.”

    “포로로 잡힌 파비아의 시민들이 대규모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오 분 전, 시민 일곱 명이 우리 군진에 도착했습니다.”

    “나머지는 가면서 듣도록 하지. 안내하라.”

    피렌체 대공이 벌떡 일어섰다. 그가 직접 망토를 둘러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망토는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색이었다.

    “시민이 확실한가? 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제국군의 경기병이 코앞까지 추격해왔습니다.”

    “음. 추격 자체가 위장일 가능성은?”

    “제국군이 화살을 쏘았습니다. 본래 아홉 명의 시민이 도망치고 있었습니다만, 두 명이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경비대가 급히 병사를 내보내서 추격군을 쫓았습니다.”

    대공이 음, 하고 턱끝을 끄덕였다.

    복도를 걸어다니던 군인과 시종이 대공을 보고 공손하게 길을 비켰다. 사람들이 양편으로 갈라지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붉은색 망토가 펄럭거리며 복도바닥을 쓸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망토 끝자락이 볼품없이 상해 있었다.

    “데 두라초 경을 불러라. 진실의 마법으로 검증하도록.”

    “현자는 소식을 듣고 이미 가 있습니다.”

    “좋다.”

    두 사람이 관저의 앞마당에 걸어나왔다. 그곳에는 처참한 몰골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인이 가져온 의자에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군인들은 주위에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전원 일어섰다. 그중 군청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영원한 영광에 충성을.”

    “자네가 새벽부터 수고하는군. 검사를 끝마쳤는가?”

    “예에, 대공 전하. 파비아의 시민이 확실합니다.”

    늙은 마법사가 고개를 가까이 해서 속삭였다.

    “탈주를 시도한 시민이 대략 삼백 명이라고 하옵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시민은 겨우 일곱 명이지 않는가.”

    “……그만큼 추격이 치열했겠지요. 전하. 가여운 영혼들을 위로해주시옵소서. 파비아는 지옥이 되었고, 용병들은 악귀처럼 잔인합니다. 저들은 모두 아내와 딸을 잃었습니다.”

    대공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심문은 오늘밤에 하도록 하지. 내 손님들에게 따뜻한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를 허락해주게나.”

    “자애로우신 메디치여.”

    마법사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소인이 미약하나마 기력을 돋구는 물약을 대접했나이다. 감히 아뢰옵니다. 저들은 적도의 군세와 무장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바, 즉시 정보를 받아내어 대책을 세우는 것이 옳다 여겨집니다.”

    그러자 대공이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파비아에서 여기까지 도망쳐온 사람들을 당장 심문하라는 말인가.”

    “저들에게 얻어낸 정보로 적도를 물리칠 수 있다면, 대공 전하.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위로이자 복수가 되겠지요.”

    “…….”

    대공이 천천히 턱끝을 끄덕였다. 마치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듯한 고개짓이었다.

    젊은 대공이 지켜보는 앞에서 심문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포로가 아니라 자국의 시민한테 양해를 구하고 이루어지는 심문이었다. 종사가 정중히 질문하면 시민들이 울면서 대답했다.

    “저희 집에는 병사가 세 명 머물렀습니다. 첫날 밤부터 놈들은 제 딸을 욕보였습니다……그걸 막으려고 저와 아들이 덤볐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그놈들은 심지어 옆집에 머무는 병사들과 모여서……이웃집의 딸까지 함께…….”

    “개자식들!”

    어느새 한두 명씩 모여든 지휘관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쏟았다.

    제국군이 그저 '재미'로 무슨 짓거리를 벌였는가 시민들 입밖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대공을 비롯해서 사르데냐의 군인들은 점점 할 말을 잃어갔다. 파비아는 문자 그대로 지옥이었다. 살인, 강간, 방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었다.

    “어제부터 놈들이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놈들은 미쳤습니다! 민가든 성벽이든 가리지 않고…….”

    “잠시만.”

    피렌체 대공이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적도가 성벽을 파괴했다고?”

    “예, 예.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불태우고 부셨사옵니다.”

    “…….”

    대공이 뭔가 석연치 않은 듯 눈썹을 찡그렸다. 잠시 뒤 그가 중얼거렸다.

    “……과연. 그것이었는가.”

    “전하?”

    “이들을 정중히 관저의 객실로 안내하라.”

    그리고 대공은 모든 연대장을 집합시켰다.

    지휘관들이 모두 모이자 대공이 명령했다.

    “제군. 우리는 즉시 파비아로 진군한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연대장들이 깜짝 놀랐다.

    “전하, 바로 얼마 전에 방비를 단단히 하도록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명령을 내리시게 된 연유를 소인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소서.”

    “적들이 왜 소규모의 정찰부대를 끊임없이 파견했는지 알아냈다.”

    대공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가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은 지금 포위망에서 도망치려는 것이다!”

    *  *  *

    “왜 기껏 힘들게 얻어놓은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가. 대공은 틀림없이 의문에 휩싸일 게다.”

    라우라가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파비아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여기서 농성하면 삼만 대군이든 오만 대군이든 너끈히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왜 파괴하는가…….”

    라우라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때, 대공에게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르겠지.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정찰부대를 보냈다는 것이다. 왜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소부대를 지치지도 않고 보내왔나.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성벽을 파괴하나. 그 해답은…….”

    *  *  *

    “전하. 포위망이라니요?”

    “우리는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생각했다. 반대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아라.”

    피렌체 대공이 지도를 가리켰다.

    “우리군은 현재 밀라노의 군대와 합류하지 않고 있다. 밀라노 공작과 과인이 다투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공작과 과인이 불화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제국군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

    “적군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현재 밀라노와 피아센차, 양방향에서 저들을 압박하고 있다.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서로 협력해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병력도 이쪽이 압도한다. 적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 군을 뒤로 물리려고 하겠군요, 전하!”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확신과 분노로 형형했다.

    “정반대였다. 제국군은 우리의 합류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다. 저들 입장에서 우리는 이미 연합하고 있다. 즉, 합류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저들에겐 최선이다.”

    “과연. 그래서 소규모의 병력으로 진군을 방해한 것입니까.”

    연대장들이 납득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군을 뒤로 물리자고 결심한 이상, 우리한테 파비아를 온전하게 넘겨주기엔 아깝겠지. 철저하게 파괴하고 방기하여 우리가 써먹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전하. 하오면 지금 적군은…….”

    “그렇다. 전략적인 후퇴를 준비하고 있다.”

    대공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적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 중 하나다! 일만오천 명의 포로를 데리고 후퇴하거나, 아니면 포로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후퇴하는 것이다.”

    “학살이라니…….”

    “어차피 거추장스럽다고 여길 것이다. 저 악귀 같은 놈들이라면 가능하겠지.”

    연대장들이 침음을 흘렸다.

    “전하, 그것이 사실이라면 서둘러 파비아로 향해야 하옵니다.”

    “아아. 저들이 포로와 함께 후퇴하고 있다면 뒷덜미를 물어뜯는다. 만약 포로들을 학살하고 있다면……일만오천 명의 인간을 전부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며칠은 걸리겠지. 죽음을 직면한 시민들은 있는 힘껏 반항할 것이다.”

    대공이 탁자를 쿵, 하고 내리쳤다.

    “어느 쪽이든 적군은 군기가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이 최고의 기회이다! 전군에 명령을 하달하라! 우리는 파비아로 향한다!”

    *  *  *

    “파비아를 버리고 군을 뒤로 물린다. 그것이 대공의 해답이다. 대공의 판단은 세 가지로 나뉘겠지.”

    라우라가 흥얼거리 듯이 즐거운 음색으로 말했다.

    “우리가 포로를 이끌고 퇴각할 경우, 일만오천 명의 포로 때문에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공격한다. 우리가 포로를 처단하고 퇴각하려는 경우, 그러기 이전에 공격해 들어간다. 우리가 포로를 내버려두고 퇴각할 경우, 대공은 일만오천 명의 무고한 시민을 해방시켜주는 영웅이 된다. 어느 쪽이든 대공에겐 이득밖에 없다…….”

    라우라가 지휘봉으로 지도의 특정 부분을 가리켰다.

    “그렇게 추격해오는 대공을 우리는 전력을 다해 요격한다! 두 번의 전투는 없다! 피렌체 대공이 이끄는 왕국군은 내일 안에 소멸된다!”

    내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는 파비아를 지옥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파비아뿐만이 아니다. 사르데냐 왕국 전체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사르데냐인에게 마왕보다 더 증오스러운 이름이 되겠지. 나는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리리플]

    너는나의것// 옙, 첫코입니다.

    한뫼사람// 웰-컴.

    Omicron// 이분, 덧글 상태가...?

    프롤마룬// 엘리자베트의 존재 의의는 멘붕에 있지 않습니다.(...)

    NineBreaker// 그러면 정말로 죽어버려요!

    검의마술사// 작중에 안 나왔을 뿐이지 살도 자주 섞고 있습니다. 군중인데 말이죠!

    물고기인간// 단탈리안은 버스를 탄 기분이라서 사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사르데냐를 밟아주라고 명령하니까 저절로 밟아주는 신하가 아래에 있어요!

    아침새// 달리 말하자면 한니발이 로마에 패배했다기보다 카르타고 로마에 패배했다고 말해야 한니발이 그나마 억울해하지 않을 것입니다.ㅠㅠ

    Selendis// 감사합니다!

    xgesty1// 헉, 벌써 그렇게 오래되었나요? 제 눈에는 여전히 낯이 익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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