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67화 (367/510)

00367 제2차 국화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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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까, 공작!”

청년이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적도가 파비아를 약탈하고 있습니다. 보름 내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집 안방을 돌아다니듯이 사르데냐를 농락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청년은 검은 곱슬머리가 단정하고 짧게 깎여져 있었다. 하얀 이마가 아름다웠다.

다만 청년의 아름다움은 곱상한 이마에 있지 않았다. 이마에, 미간에, 심지어 눈썹 끄트머리에서, 생기가 난폭하게 꿈틀거렸다. 그런데 눈동자가――깊은 눈동자가 모든 혈기를 간신히 억눌렀다.

바로 거기에 이 청년이 가진 아름다움이 있었다. 당장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생기가 가득 넘쳤으나 청년은 놀라운 자제력으로 그걸 다잡았다.

청년은 난폭한 말을 다스리는 기수와 같았다. 말이 사납고 거칠수록 그걸 제어해내는 기수가 훌륭해지듯이, 꼭 그처럼 청년은 타고난 혈기를 억누름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증명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대공. 제국군에는 물자가 부족하외다.”

“시민들이 죽어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시민들이! 공작은 지금 귀족으로서 의무를 방기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 갓 스물여섯 살이 된 청년.

그 이름은 코시모 데 메디치, 사르데냐 왕국에서 국왕 다음으로 지체가 높은 메디치 가문의 주인이자, 대도시 피렌체를 다스리는 대공(大公)이었다.

“제국군은 강력하고 이쪽의 수비병력은 나약하오. 이 노인이 무얼 할 수 있겠소?”

“그걸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것이 국왕 전하께서 공작에게 내린 임무입니다!”

“전하께서는 나에게 밀라노를 사수하라 명하셨소.”

밀라노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법수정구에 희뿌옇게 투영되었다. 육십 세가 넘은 밀라노 공작과 스물여섯 살의 피렌체 대공, 두 대귀족은 현재 작전회의를 나누고 있었다.

“파비아의 비극은 안타까우나 소탐대실을 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오.”

“소탐? 지금 소탐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피렌체 대공이 입술을 실룩였다.

“제가 무엇이 소탐인지 감히 말씀드리지요.”

“이 노구가 경청하겠소.”

“형제 도시가 파괴되고 있는데도 병력이 아까워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 것.”

대공의 검은색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포로를 풀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낱 돈이 아까워 재산을 풀지 않는 것, 군사기지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작전이 헝클어질까 두려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것. 이것들이 소탐입니다!”

피렌체 대공은 탁자를 쿵, 하고 쳤다.

“수치심을 기억하십시오, 공작! 지금 왕도(王都)에서 공작을 뭐라고 욕하는 줄 아십니까. 파르네세의 창녀보다 밀라노의 공작이 안방주인에 어울린다며 조소하고 있습니다!”

“…….”

밀라노 공작이 한숨을 쉬었다.

“노구의 말을 주의하여 들어보시구려. 제국군에는 물자가 부족하오. 용병들에게 내어줄 급료도 부족한 상황이오.”

“……계속해서 말씀하시지요.”

청년이 화를 짓누르며 일단 경청했다.

그는 눈앞의 노인보다 귀족 서열이 높았다. 허나 밀라노의 주인이나 피렌체의 주인이나 위세로 따지자면 비등비등했다. 명목상은 우위이나 실제로는 동격. 그런 상대방을 대할 때 거들먹거릴 만큼 청년은 멍청하지 않았다.

사르데냐 왕국은 겨우 몇 년 전에 내전을 겪었다. 귀족가의 절반 가량이 내전에서 쓰러졌다.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은 한결같이 유능했다.

밀라노 공작과 피렌체 대공은 비록 노인과 청년으로서 한참 나이가 차이났지만, 지난 내전에서 파르네세 공작가를 궤멸시키는 데 혁혁한 군공을 세웠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났다.

――뛰어나기에,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경계했다.

“우리가 이대로 방비를 단단히 하여 농성한다면 제국군은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이오.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만큼 상대하기 쉬운 적도 없소외다.”

“…….”

“저들은 곧 반란을 일으키거나 떠나버릴 것이오. 밀이 자라는 데 더러운 비료가 필요하듯, 영광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항상 얼마간의 모욕이 필요하오. 우리는 버텨야 하오!”

피렌체 대공이 손가락으로 탁자 끝을 툭툭 건드렸다.

“무슨 근거로 적도에게 물자가 부족함을 자신합니까?”

“제국군이 협상을 서두르고 있소.”

밀라노 공작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헐값에라도 파비아의 시민을 넘기려고 아둥바둥거린다오. 저들에게 당장 급전이 필요하다는 뜻이외다.”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공작.”

피렌체 대공이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포로들이 먹어 헤치우는 식량이 아까워서 공작한테 떠넘기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만 명의 포로를 받아들이면 밀라노는 틀림없이 식량난에 시달립니다.”

“내 도시의 식량고는 앞으로 삼 년을 버틸 수 있소.”

“……적군이 그 사실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들이 무얼 노리는지 우리로서는 섣불리 단정지을 수가 없습니다.”

피렌체 대공은 차분히 반박하면서도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시민 전체를 삼 년이나 먹이고 재울 군량이 있다니. 밀라노 공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전쟁을 대비해온 것이 분명했다. 성벽도 아주 튼튼하게 보수되어 있겠지.

‘쯧,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이유가 있었나.’

적군이 아무리 강력해도 자기 도시 하나만큼은 지킬 자신이 있다. 반면에 야전에서 승리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까 형제 도시가 약탈되든 파괴되든 나 몰라라 하염없이 틀어박힌 것이다…….

‘가증스럽군.’

젊은 대공은 심장이 역정으로 물들었다.

‘시민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어찌 귀족이라 불리는가. 무능한 악보다 역겨운 것이 유능한 악이다. 야망이 있다면 시민을 지키는 것과 자신의 야망을 동시에 성취해라! 그것이 대귀족의 기본 자세이지 않은가!’

피렌체 대공은 점점 마음이 굳었다.

공작의 전략은 이해했다. 그러나 근거가 지나치게 빈약했다. 허술한 지레짐작에 기대어서 군대를 운용할 수는 없었다. 사르데냐 왕국에 침범한 저 창녀의 군대를 하루 빨리 내쫓아야만 했다.

대공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공작의 전략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데 메디치 대공!”

“이곳은 사르데냐이고, 우리는 사르데냐인이며, 저들은 침략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민의 재산이 빼앗기는 것을 얌전히 지켜보는 게 아닙니다. 공작. 나에게 보조를 맞추어 적군을 요격하십시오.”

밀라노 공작의 얼굴이 주름살로 깊게 일그러졌다.

“제국군과 야전에서 맞붙는 건 하책이오! 브르타뉴의 기사단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벌써 잊었소외까.”

“기사단을 물리친 것은 마왕의 군대이지 창녀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제국군이 원하는 바요. 자기네를 깔보고 야전에서 맞붙는 것 말이오!”

대공이 노공작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렇게 해볼까요. 적군이 밀라노를 포위해서 공격하든지 말든지 내 휘하의 군대는 일절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공작이 혼자서 제국군을 상대해보십시오!”

“무슨…….”

노귀족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피렌체 대공은 더욱 분노에 차올라 일갈했다.

“자신이 당하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타인에게는 부당한 짓을 강요합니까!”

“…….”

“파비아 백작은 우리들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파르네세 가문에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여겨 둘째 공녀를 노예로 전락시키자고 제안한 장본인이 누구였습니까? 우리입니다. 바로 우리가 동의한 일이었습니다. 그걸 파비아 백작이 대행해주었거늘!”

대공이 탁자에 놓인 유리잔을 손등으로 걷어쳤다. 유리잔은 바닥에 부닥쳐서 요란하게 깨졌다.

“일찍이 은혜를 베푼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다니……! 백작의 신민이 잔혹하게 학살을 당하는데 이 와중에도 겁쟁이처럼 안방에 박혀 있다니!”

“대공! 말씀이 심하오!”

“명예를 아십시오!”

두 귀족이 거의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국왕 전하의 대리장군으로서 명합니다. 내 휘하에 합류하시오!”

“대공에게는 나의 시민병을 마음대로 지휘할 권리가 없소! 사르데냐 북방군 총사령관은 바로 나, 루도비코 데 스포르차이외다!”

둘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그대가 아니라 설령 국왕 전하께서 오신다 하여도 내 시민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것이오!”

“어리석고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는 노인이여……! 파비아가 그대를 영원히 저주하리라!”

대공은 그 자리에서 마법수정구를 잡아다가 방바닥에 내팽개쳤다.

수정구가 산산조각났다. 값비싼 아티팩트였지만 대공은 당장이라도 뻔뻔한 노인네의 얼굴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후회 따위는 없었다.

피렌체 대공은 군화로 수정구 조각을 짓밟았다.

“창녀라고 욕하지만 정작 부끄러운 것은 우리가 아닌가!”

시민을 지킨다.

형제를 돕는다.

침략자를 물리친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명한 의무였다. 문제가 있다면 이 의무가 적이 '무겁다'라는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 하루하루가 노동으로 고되고 힘겨운 인간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이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귀족이 있었다.

대저 귀족이란, 당연히 짊어져야만 하는 짐을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메는 자.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면 귀족이 뭐가 고귀하여 세금을 거두는가. 그런 귀족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귀족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피렌체 대공은 만전을 기울였다.

우선, 그는 밀라노 공작이 전해준 정보를 마냥 무시하지 않았다.

밀라노 공작의 추측이 맞다면 분하지만 공작이 말한 대로 농성전을 펼쳐야 옳았다. 그러므로 피렌체 대공은 한 가지 계책을 고안했다.

대공은 제국군에 사신을 보냈다. 자신이 공작을 대신해서 파비아의 포로들을 사들이겠노라고 제안한 것이었다.

‘만일 제국군이 급전이 필요하다면 내 제의에 응할 것이요.’

대공이 판단했다.

‘급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밀라노에 식량난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면, 내 제의를 거절할 것이다.’

그리고 제국군은 대공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신이 실패하고 돌아왔다. 대공은 사신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하게 상을 내렸다.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제국군은 물자 부족 따위를 겪고 있지 않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기결전이 아니라 장기전. 밀라노에 농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제장을 소집하라!”

피렌체 대공이 휘하의 연대장을 소집했다.

젊고 아름다운 대공의 카리스마에 이미 연대장들은 매혹되어 있었다. 프랑크인, 합스부르크인, 사르데냐인, 폴리투니아인 등등, 용병대장들은 저마다 출신이 천차만별이었다. 피렌체 대공은 일곱 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그들을 사로잡았다.

“진군의 나팔을 울리도록. 이제부터 우리는 황제의 군대를 처단한다!”

피렌체 대공 코시모 데 메디치 휘하, 사르데냐 왕국군 35,000명.

북상(北上).

*  *  *

“걸렸습니다.”

사신을 떠나보내고 내가 미소를 지었다.

라우라도 나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밀라노 공작을 대신해서 피렌체 대공이 몸값을 지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파비아가 함락되도록 내버려둔 사람은 대공이 아니라 공작. 그런데도 대공이 사신을 보내왔다는 것은…….”

“왜 우리가 헐값에 포로를 넘기려 하는가. 그 이유를 판단하기 위함이지요.”

우리가 작게 키득거렸다.

“적군의 지휘부는 보기 좋게 분열된 모양이다, 주군. 이 기회를 놓친다면 말도 안 되는 멍청이다.”

“실로 옳습니다. 한번 장대하게 연기해보지요…….”

유능한 지휘관의 적은 무능한 아군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능함이다. 나는 그걸 앙리에타 여왕한테서 배웠다. 어디 이 좋은 교훈을 다른 사람에게도 널리 전파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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