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66화 (366/510)
  • 00366 제2차 국화전쟁  =========================================================================

    *  *  *

    제국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기습으로 완승을 거두고 라우라는 즉시 파비아로 군세를 몰았다.

    파비아는 꽤나 괜찮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문제는 수비에 임하는 병력이 적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서 사백 명은 될까 싶었다.

    반면에 아군은 육천 명에 이르렀고, 마법사까지 열한 명을 거느렸다. 단적으로 말하자. 적군에 승산은 전무했다.

    게다가 사령관인 라우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공성전 분야의 달인이었다. 순전히 요새도시로 지어진 하이델베르크도, 프랑크 최대의 도시 파리시오룸도, 라우라의 발 아래 굴복하였다. 파비아는 간식거리에 불과하겠지.

    라우라가 명령했다.

    “백작의 목을 내걸어서 저들에게 전시하도록.”

    용병들이 방금 전투에서 죽인 적군의 수급들을 창에 꽂았다.

    새벽이 밝아오자, 성벽에서 농성하던 수비군은 처참하고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수천 개가 넘는 머리통이 창끝에 꿰뚫려서 대롱거렸다. 개중에는 파비아 백작의 머리도 있었다. 영주가 잔인하게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수비군은 사기가 곤두박질쳤다.

    라우라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열한 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성문으로 마법을 쏘아댔다. 성문은 금세 박살났고, 기병들이 뿔나빨을 울리며 신나게 돌진했다.

    사기가 떨어진데다 성문까지 돌파당하자 수비군은 완전히 전의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포기한 채 각자 제 살 길을 찾아 도망쳤다.

    덕분에 육천 명의 기병은 마치 초원을 달리듯이 도시를 휘저었다. 그들에게 라우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아이와 노인에게 손을 대지 마라.”

    달리 말하자면, 모든 남자 주민과 여자 주민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설상가상으로 라우라는 자유로운 약탈까지 허가했다. 병사가 무언가를 약탈해도 지휘부가 결코 제지하지 않겠다며.

    파비아에 지옥이 펼쳐졌다.

    용병들은 승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듬뿍 향유했다. 그들은 부잣집과 귀족 저택의 정문을 깨부수고 난입했다. 앞을 가로막는 하인이나 남자는 머리통이 도끼에 찍혀 절명했다.

    “꺄아아아악!”

    “사, 살려주십쇼! 제발 살려만 주십쇼!”

    남자고 여자고 가리지 않고 살해당하고 강간당했다. 재미로 인간을 죽이거나 민가에 불을 지르는 무리도 심심찮게 있었다. 파비아의 시민은 평생 동안, 아니 대를 이어서 쌓은 재산을 깡그리 빼앗겼다.

    재산만 빼앗기면 그나마 양반이겠지.

    “살아남은 주민은 모두 노예로 취급한다.”

    라우라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본관을 노예로 취급했던 이들에게 관용은 불필요하다. 사르데냐와 파비아는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 한 마디가 파비아 시민 일만오천 명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제국군은 파비아에 군사 기지로 삼아 주둔했다. 민가는 강제로 징발당해서 아군의 숙소로 쓰였고, 주민은 노예가 되어 용병의 수발을 들었다. 재물도 식량도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는 편안하게 휴식을 즐겼다.

    파비아 함락.

    소식은 사르데냐 왕국을 강타했다.

    파비아 백작이 전사했다는 것, 오천의 기병이 단 한 번의 전투로 증발했다는 것에 왕국군은 충격을 받았다. 기병 전력이 일소되어버린 밀라노 공작은 야전을 포기하고 더욱 더 성안에 틀어박혔다.

    라우라가 보고를 받고 중얼거렸다.

    “흠, 아예 틀어박히면 곤란한데. 밀라노 공작은 확실히 파비아 백작보다 군재에 밝은 듯하군.”

    “기병이 싹 전멸했는데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겠지요.”

    “으음…….”

    라우라가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아서 돌렸다.

    “주군. 어디 좋은 생각이 없겠는가.”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을 끌어내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공작의 전략을 점점 곤란하게 만들 방법은 있지요.”

    “그게 무엇인가?”

    내가 빙그레 웃었다.

    “밀라노 공작에게 선포하십시오. 파비아의 노예를 돌려받고자 한다면 몸값을 지불하라고.”

    “……아아, 과연. 몸값을 비싸게 매겨서 공작이 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라우라는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감탄했다.

    “공작은 시민을 풀어줄 수 있는데도 외면하는 것이다. 비난이 쏟아지겠군.”

    “아뇨, 정반대입니다. 값을 아주 싸게 매깁니다.”

    “음?”

    라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내 수제자나 다름없었지만 딱 한 발자국 모자란 면이 있었다. 모략의 수준이 조금 지나치게 빤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었다.

    “두당 삼십 리브라 정도로 가격을 매기십시오. 평민이고 귀족이고 상관없습니다. 모두가 삼십 리브라입니다.”

    “하아? 무슨 소리인가.”

    라우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이지 않은가. 그래서야 밀라노 공작이 노예를 구입하게…….”

    “단, 자그마한 조건을 내걸어둡니다. 일괄 구매만 인정하겠다고 말이지요. 약삭빠르게 귀족만 따로 골라서 구입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으음……?”

    “구입하려면 일만오천 명의 시민을 한꺼번에. 그 이외의 방식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라우라는 여전히 아리까리한 것 같았다.

    내가 웃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상식적으로 귀족까지 단돈 삼십 리브라에 풀어주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이쪽은 삼십 리브라에 팔아재끼려고 한다…….”

    “…….”

    “밀라노 공작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일괄 구매라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 원정군에 당장 거금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라우라가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그렇군! 우리에게 돈이 얼마 없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인가!”

    “밀라노 공작은 우리의 경제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파비아를 서둘러 약탈한 것도 재정적인 압박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겠지요.”

    밀라노 공작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전쟁을 길게 끌면 끌수록 자신한테 유리해진다. 어쩌면 이쪽이 고용비를 체불하여 용병들이 알아서 해산해버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은 얼마 전에 꼭두각시 전쟁을 치루지 않았던가! 막대한 전비를 소모했으리라. 지금 제국에는 연달아서 대규모 전쟁을 수행할 여유가 부족하다. 아니, 없다. 그러니까 당장 포로의 몸값을 받아챙기려는 것이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인간에게는 못된 버릇이 있지요. 일단 판단을 내리면 거기에 맞추어서 좋을 대로 상황을 해석해버립니다. 밀라노 공작은 자기 생각이 옳은지 한번 튕겨볼 겁니다. 그때 우리가 가격을 4/5 정도로 낮추어서 다시 제시합니다.”

    “하하하!”

    라우라가 자기 팔뚝을 잡고 웃었다.

    “역시 주군은 최고다! 대륙에서, 세계에서 가장 흉악하고 썩어빠진 남자다!”

    하고 라우라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덥썩 안겼다. 그리고 내가 불평을 남길 틈도 없이 키스를 해왔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왜 나와 사귀는 여자들은 전부 내가 흉악해서 좋다는 것일까. 설마 나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그런 식의 얘기인가……. 정말로 모르겠다. 아마 죽어도 모르겠지.

    우리는 곧바로 밀라노 공작에게 술책을 걸었다.

    “파비아의 노예들을 돌려받고자 한다면 몸값을 지불하라.”

    가격은 두당 30골드. 자유민의 몸값이라 하기에도 상당히 헐었고, 귀족의 몸값이라고 하면 거의 공짜였다. 바겐세일이라고 표현해도 좋았다.

    단, 반드시 한꺼번에 사들여야만 한다고 조건을 붙였다. 노예로 붙잡힌 시민이 일만오천에 이르므로 45만 골드를 지불해야 한다. 상당한 거금이지만, 일만오천 명의 인력에 빚을 메달아두는 셈이니 사실상 거저나 다름없었다.

    밀라노 공작이 사신을 보내와서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교섭인을 파견하여 '그럼 가격을 할인해서 35만 리브라는 어때? 이거 거진 떨이야, 떨이!' 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밀라노 공작은 절대로 안 된다는 식으로 거절해왔다. 제국군에 돈이 부족함을 확신했겠지.

    단순히 거절했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약탈 행위를 대대적으로 비난했다. 자유민을 노예로 취급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 어쩌고 저쩌고……. 정확히 기억해줄 의리는 없었다. 아무 윤리학 책이나 펼쳐도 쓰여 있을 법한 문구였다.

    우리 두 사람은 '점잖은 쌍욕'으로 도배된 서신을 나란히 읽었다. 그리고 키득거렸다.

    “주군. 이제 되었는가?”

    “예. 이제 충분합니다.”

    제국군은 파비아에 삼천 명의 수비병만 남겨두고 북상했다.

    도중, 밀라노에 진군시킨 이만 명을 불러들여서 합류.

    총합 이만오천 명 가량의 병력으로 군사기지 노바라를 공격했다.

    노바라는 잘 정비된 군사거점으로 함락시키기 만만치 않았다. 사르데냐 왕국에서 헐레벌떡 고용한 용병 오천 명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만만치 않았을 따름이지, 병력상 5배가 뛰어넘는 아군에 맞서서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었다.

    우리군의 위치를 살펴보자면.

    노바라 - 아군 - 밀라노, 이렇게 되어서 적군의 거점 사이에 끼어든 모양새였다.

    만약 이때 밀라노에서 과감하게 출진하여 아군의 배후를 공격했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노바라를 함락시키는 데 상당한 기간이 걸렸겠지. 그리고 사르데냐 왕국의 남부에서 모집된 군대가 치고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밀라노 공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노바라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마법통신을 쉴 새 없이 보내도, 성벽 한쪽이 무너져내려 처절한 농성을 이어가도, 공작은 마치 용병들을 내다버린 것처럼 밀라노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노바라의 용병은 절망했겠지. 무언가 대단한 일을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군의 후방을 견제해달라. 단지 그뿐이었다. 이 간단한 요청조차 밀라노 공작은 무시했다.

    덕택에 우리는 후방을 염려하지 않고 노바라를 공격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밀라노 공작은 우리가 유인책을 거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바라를 멀리서 지켜보며 말했다. 적군의 용병은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이미 성벽이 두 군데 무너졌는데, 어떻게든 병력을 집중하여 난입을 막아냈다.

    “재정이 부족하니까 자기를 도시에서 끌어내어 단기결전을 펼치려는 거다. 뭐,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판단입니다.”

    “그러나 오판이지.”

    라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밀라노 공작은 도시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본인은 그리 생각할 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천 명의 기병과 오천 명의 용병을 전부 잃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제 밀라노에 남은 것은 시민병뿐.”

    그렇다.

    우리는 사르데냐 왕국군의 대전략을 역으로 이용했다.

    대도시를 지키고 싶다면 얼마든지 지키게 내버려둔다. 단, 적군이 보유한 정예병은 모조리 녹여버린다. 파비아를 약탈함으로써 재화와 식량도 충분히 비축한다.

    밀라노 공작은 대도시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기병, 정예병, 군사기지, 거기에 평판과 명성까지…….

    시민을 풀어줄 수 있었음에도 방치해버렸으며, 더 나아가 군사기지가 함락되는 걸 코앞에서 수수방관했다. 밀라노 공작에 대해서, 그리고 사르데냐의 전략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비난이 쏟아지겠지.

    군사거점 노바라는 아흐레 만에 아군의 손안에 떨어졌다.

    성문이 돌파될 때까지 적군의 용병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원군이 올 가능성 자체가 없어졌음이 분명해지자 더 이상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라우라는 관대하게 항복을 받아들이고 도리어 그들의 분투를 칭찬하며 재고용했다. 재고용에 응하지 않은 연대장을 처형시킨 다음, 우리군은 새롭게 이천 명의 병력을 얻었다. 어찌되었든 사르데냐 왕국군은 용병들의 신뢰를 무참히 배반했다.

    이 시점에서 왕국은 이미 정예병 10,000명을 잃었다.

    그러고는 이른바 전략적 승리를 거뒀노라고 위안하고 있겠지.

    좋다. 얼마든지 위안해라. 어차피 그게 승리가 아님을 깨닫기까지, 딱히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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