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5 제2차 국화전쟁 =========================================================================
아군은 적군의 예기를 인정사정없이 꺾어트렸다.
군마의 말발굽이 밟고 지나간 곳에는 피먼지와 비명만이 남았다.
“크아아악!”
“무, 물러서지 마라!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다!”
사르데냐 왕국군은 완벽하게 기습을 얻어맞았는데도 분발했다. 그러나 지옥도는 이제야 막 펼쳐지고 있었다. 앞선 동료들이 명예롭게 제1열 돌격을 성공시키자, 제2열과 제3열 그리고 제4열의 아군은 거세게 들끓었다.
─ 부우우우우.
곳곳에서 뿔나팔이 울려퍼졌다.
제1열이 지나쳐간 바로 그곳을 다시금 후속 기병들이 들이받았다.
언제부터 적이 도주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쩌면 제2열 돌격까지는 견뎠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제3열이 들이닥칠 쯤에 적군은 서로 뭉쳐서 대항하지조차 못했다. 제4열 돌격에 이르러서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이미 승패는 결정났다.
“도망치지 마라, 겁쟁이들아!”
그때 적진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우리의 가족과 이웃은 누가 지킨다는 말이냐! 파비아를 지켜라! 시민을 지켜라! 그리고 그대들의 긍지를, 아군을 버리고 도망치는 겁쟁이 따위가 아님을 증명하라!”
중년 남성일까. 분노에 차서 호통을 쳤다.
오직 지휘관만이 전장에서 확성 마법을 썼다. 마법 아티팩트가 어마어마하게 비싸서 지휘관 말고 감히 구입할 엄두가 안 나는 까닭도 있었지만, 너도 나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버리면 명령 체계가 망가져버렸다.
즉, 저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파비아 백작. 혹은 백작의 부관이라는 소리였다.
“용감하군요.”
“하지만 무모하다.”
내 칭찬에 라우라가 비웃음을 지었다.
“야밤에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설령 바르바토스 언니께서 오신다 해도 손쓸 도리가 없겠지. 한낱 필부의 용맹으로 감당할 수 없을뿐더러――지휘관이 어디 있는지를 빤히 알려주다니.”
라우라가 나에게 눈짓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명령했다.
“제5열, 적도의 지휘관을 향해서 돌격하라!”
이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제5열의 기병대가 말을 몰았다. 경기병을 제외하면 사실상 우리군에 마지막으로 남은 전력이었다. 라우라는 제1열과 제5열에 정예 연대를 배치해두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파비아 백작도 이쪽의 명령을 들었겠지.
“맞서 싸워라! 살아서 비겁해지느니 죽어서 명예로워지라!”
그가 난폭한 맹수처럼 포효했다.
“이날 밤을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기억해주시리라! 여신께 피를!”
“여신께 피를!”
파비아 백작의 근처에는 적군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파비아나 밀라노의 기사단이겠지. 마흔 명도 안 되어보이는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백장이 구령하고 기사들이 호응하였다.
“동포에게 영광을! 우리의 적에게는 죽음을!”
“으아아아아!”
“국왕 전하 만세!”
기사들이 일제히 국왕 전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이곳으로 질주해왔다.
실로 장렬한 돌격이었다. 저들은 그러나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이쪽은 제5열이 천 명의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장이 빈약한 경기병이 아니었다. 수십 년이 넘게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최정예 중기병이었다.
천 명의 중기병과 서른 명의 기사가 충돌했다.
“국왕 전하 만세!”
“사르데냐의 평야를 위하여!”
과연 기사단은 막강했다. 아군에 비해 돌격 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백 명을, 이백 명을 도륙했다. 일당백이라는 관용어는 기사에게 허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저들이 백 명을 죽일 때 우리는 열 명을 죽였고, 저들이 이백 명을 죽일 때 우리는 또 다시 열 명을 죽였다. 어느새 백작 주변에는 열댓 명 남짓하는 기사밖에 남지 않았다. 기사단의 군기(軍旗)마저 땅바닥에 떨어졌다.
“훌륭하군요. 멋집니다……!”
나는 깊은 만족감을 표현했다.
나에겐 후천적인 질병이 하나 있다. 바로 기사-혐오증이다.
생드니 평원에서 앙리에타에게 발려버린 이후, 나는 기사들이 처절하게 죽어나갈 때마다 엄청난 오르가즘을 느낀다. 거짓말이 아니다. 솔직히 섹스해서 사정하는 쾌감보다 훨씬 더 좋다.
기사 따위 세상에서 모조리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아니, 진심으로.
“흐하하. 거금을 들여 고용한 보람이 있습니다. 더 죽이십시오! 저 쓸데없이 비싸보이는 투구를 깨부수십시오. 장갑은 뭉개트려서 개밥으로 사용합시다.”
“……저 돌격을 보고 느껴지는 감상이 고작 그것인가?”
라우라가 질겁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쳐다보는 눈초리였다.
“오오, 물론 고귀하고 용감한 돌격이었습니다.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기에 더욱 더 더럽혀야 마땅합니다! 새하얀 종이를 보면 응당 새까만 물감으로 칠해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헬베티카의 전사들이여, 쳐죽여라! 기사 따위 겉만 번지르르한 병종임을 증명하라!”
“어째서 소녀는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라우라가 팍팍 한숨을 쉬었다.
최고지휘관인 우리 두 명이 꽁트를 펼치는 사이, 기사단은 전멸했다.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기사들은 투창 세례에 군마가 쓰러졌다. 그래도 반항하는 기사들에겐 선물로 화살비가 쏟아졌다.
“전하, 적도의 지휘관을 생포했나이다! 대승입니다!”
중대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우리가 숫적으로 유리했다고 하나 오천 명의 기병을, 그것도 기사단이 포함된 적군을 박살냈다. 반면에 아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말 그대로 대승, 완승이겠지.
“승리를 경하드립니다, 공작 전하!”
“전하의 지략과 용맹은 아테나 여신께 비견되옵니다!”
라우라가 위엄 있게 턱끝을 까닥였다.
“실로 분투했다. 적장을 사로잡은 병사는 누구인가.”
“제 중대에 소속한 기젤라 중사입니다.”
“기젤라 중사는 앞으로 나오도록.”
한 난쟁이가 걸어나왔다. 풍체가 당당했지만 총사령관의 면전이라 그런지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다. 그게 아니라면, 주변을 둘러싼 중대장들한테 겁을 먹은 건지도 모르지.
“기젤라 중사!”
“예, 전하!”
“그대는 헬베티카 전사의 용맹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이 대지에 흐르는 강줄기의 이름을 본따, 오늘밤은 티키누스 전투라고 불릴 것이다. 그리고 티키누스 전투의 주인공은 기젤라 중사, 그대이다! 그대의 이름은 영원토록 역사에 전해질 것이다!”
난쟁이 중사는 감읍한 표정을 차마 숨기지 못했다.
“본관은 그대에게 자그마한 은상으로써 오천 리브라를 하사한다.”
“화, 화, 황공하옵니다!”
중사가 눈알이 빠질 기세로 말했다. 머릿속에 아무런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무작정 황공하다는 말이 나온 것 같았다. 주변에서도 헉소리가 튀어나왔다.
오천 골드라니!
평범한 용병이라면 십 년 내내 뒹굴어야 얻는 금액이다.
그런데 용병은 봉급에서 절반을 식비로 쓰고, 다시 절반의 절반을 무기와 장갑 가꾸는 데 써먹는다. 삼십 년 동안 진짜 아무런 사치도 부리지 않고 목숨을 내걸어야만 5천 골드를 벌까 말까했다.
하지만, 당장 내일 전투에서 죽을지도 모를 용병이 저금은 무슨 놈의 저금인가! 질 좋은 맥주에 그럴저럭 예쁜 창녀를 안는 데 봉급을 죄다 쏟아붓기 일쑤이다. 5천 골드는 평생 절대로 만져볼 일이 없다.
미친 듯이 배포가 큰 공작 전하에게 중사 본인은 물론이고 중대장들도 할 말을 잃었다.
“기젤라 중사가 소속한 중대의 책임자는 그대인가.”
“예, 예. 전하. 소인은 파르민 대위라고 하옵니다.”
역시 난쟁이인 중대장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아까 전에 중사를 소개한 자였다.
“음. 파르민 대위에게도 금화 오천을 하사한다.”
“…….”
대위가 딸꾹질을 했다. 중대장들이 소리없이 경악하는 것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며 라우라가 크게 소리쳤다.
“들으라! 여기 파르민 대위는 부하의 공로를 가로채서 보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러하지 않았다. 파르민 대위는 무엇이 전사의 명예인지, 무엇이 상관의 덕목인지 몸소 실현했도다. 훌륭하다!”
돌처럼 굳어버린 파르민 대위의 어깨를 라우라가 토닥거렸다.
“세간에서는 그대들이 돈을 쫓는 망령이라고 매도한다. 금화를 받고 타인을 죽이는 악귀이자 살인마라고…….”
“…….”
“실로 우리는 사람을 죽인다. 아아, 기꺼이 죽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긍지가 있다. 부하의 공로를 빼앗지 않는다.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는다. 전투를 앞두고 도망치지 않는다……그것이 우리의 긍지이다. 그렇기에 그대들은 헬베티카인이다!”
병사들이 팔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헬베티카는 이종족이 세운 국가. 언제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용병의 필요성을 인정받아 살아왔다지만, 어찌 살면서 받은 경멸을 잊었겠는가.
라우라는 그걸 정면에서 깨부수고 있었다.
“고로, 오늘밤의 승리는 본관의 승리가 아니다! 제국의 승리는 더더욱 아니다! 바로 그대들, 헬베티카의 승리이다! 오늘밤, 여신들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노라! 대륙은 헬베티카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대륙은 헬베티카를 영원히 두려워할 것이라고!”
함성이 울려퍼졌다. “공작 전하 만세!” “헬베티카 만세!” 하고 병사들이 끊임없이 환호했다.
다만 나는 다른 의미에서 감탄하고 있었다.
깔끔했다.
헬베티카인이 가진 피해의식. 거기에 용병이라는 직업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심을 교묘하게 찔렀다. 어느 순간부터 라우라는 '우리'라고 말했다. 그녀 자신을 용병의 무리에 끼워넣은 것이었다.
사람의 심리는 대부분이 피해의식, 자부심, 공동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라우라는 바로 핵심적인 심리만 건드린 것이다.
연설은 사람의 심리를 조종하고 부추기는 기술. 그런 점에서 라우라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았다. 누구에게 본받았는지 몰라도 깔끔한 솜씨였다. 틀림없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잘난 스승님을 두었겠지…….
병사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라우라가 척척 걸어갔다.
그 앞에는 밧줄에 파비아 백작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팔뚝과 허벅지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격렬하게 반항한 흔적이었다.
“창녀 주제에 감히 시답잖은 속임수를……!”
파비아 백작이 피 끓는 얼굴로 분노했다. 그는 중년의 남자였다. 주름살마다 엄격한 가풍이 녹아들어 있었다.
비록 몸은 포로로 사로잡혔으나 정신만은 굴복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걸까. 파비아 백작이 당당하게 일갈했다.
“과연 잠자리로 황제를 농락한 창녀로다! 하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 마족에게 가랑이를 벌린 화냥년이 무슨 짓을 못할꼬! 더러운 배신자년, 인간의 손을 인간의 피로 더럽힌 네 년에게 천벌이 있으라! 네 년의 애비도 무덤에서――.”
그러나 백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라우라가 허리춤에서 검을 빼어들더니 단 일격으로 백작의 목을 베었다. 칼날이 정확하게 턱 아래를 스쳤다. 백작은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뒤로 쓰러졌다. 컥, 컥, 하고 동물처럼 피 끓는 소리를 내뱉었다.
라우라가 백작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인간이기에 인간을 증오할 수 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대장이 도끼를 꺼냈다. 그가 백작의 목을 내리쳤다. 두 번, 세 번 내리친 끝에 백작은 머리통과 몸통이 분리되었다. 라우라는 백작의 머리카락을 쥐어잡아 높이 치켜들었다.
“사르데냐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려라!”
병사들은 그날밤 가장 큰 함성으로 화답했다.
대륙력 1512년 6월 5일.
제2차 국화전쟁의 첫 전투, 티키누스 전투에서 라우라 데 파르네세가 이끄는 기병 육천은 사르데냐의 기병 오천을 격파. 지휘관인 파비아 백작의 수급을 취했다.
전쟁은 제국군의 완승으로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