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64화 (364/510)
  • 00364 제2차 국화전쟁  =========================================================================

    “드 블랑 남작.”

    “예, 예엣!”

    갑자기 라우라한테 이름이 불려서 놀란 것일까. 줄리아나 드 블랑 용병대장이 멍하게 이쪽을 쳐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시선에는 왠지 모르게 라우라를 삼가는 기색이 새로 생겨났다. 존경심같이 건전한 감정이 아니었다. 조금 더 불온했다. 이를 테면 일종의 두려움이라든지.

    “귀관에게 이백오십 명의 군사를 따로 맡기겠다.”

    “저기……척후병을 정리하면 되는 것인지요?”

    “아니. 귀관은 군사를 이끌고 서둘러 파비아 쪽으로 향하라. 파비아 인근에 숲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성대하게 불을 지르도록.”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내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파비아 인근에 있는 숲이라면 나도 가본 적 있었다. 다름 아니라 노예상인인 잭 올란드가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찍어 자살한 장소였다…….

    “불, 입니까.”

    드 블랑 남작은 잘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파비아 방향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다. 파비아 백작은 다급해지겠지.”

    라우라가 간단하게 남작의 의문을 해결해주자 남작이 아, 하고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 입장에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떠오를 것이다. 첫 번째, 우리가 이미 영지에 난입하여 무질서하게 약탈하고 있다. 두 번째, 한참 격렬하게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백작은 우리의 배후를 기습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판단할 게다. 한층 더 서두르게 된다.”

    “그렇군요…….”

    남작은 살짝 기가 질렸다. 그걸 알았는지 라우라가 엄하게 명령했다.

    “남작! 귀관이 이번 전투에서 이끄는 병력은 적을지 몰라도 두 어깨에 짊어진 임무는 막중하다. 귀관이 실패하면 본인은 백작을 기습하는 데 실패할 것이요, 우리의 원정 자체가 지난해질 것인즉!”

    “……알겠습니다, 전하!”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의 무게를 깨닫고 남작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라우라 역시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를 열한 명 붙여주겠다. 파비아 전역에 반(反)통신마법을 걸도록. 숲에 화재를 일으키는 데도 활용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남작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강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듯이 우리군은 나뉘었다. 남작은 두 개의 기병중대를 이끌고 샛길로 빠져나갔다. 이로써 라우라 휘하에는 마법전력이 전무하게 되었다.

    우리군은 속도를 더욱 높였다.

    하늘이 노을에 붉어지고 이윽고 어둑해졌을 무렵.

    그제야 라우라는 전군에 정지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밀라노에서 파비아로 빨리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쳐야 할 길목이었는데, 대로에서 꽤 떨어진 지점에 숲이 나 있었다.

    “이곳에서 매복한다.”

    그리고 라우라는 전방에 정찰병을 몰래 배치했다.

    기병들이 땅바닥에 엎어졌다. 벌써 한나절을 내리 달려왔다. 휴식이 절실했다.

    병사들은 숲속의 나무에 기대어 쉬거나, 전투를 대비하여 간식을 꺼내 먹었다. 군마들은 여름 햇살을 받아오며 달리느라 뜨거워진 몸뚱어리를 밤공기에 식혔다.

    머리를 들어 위쪽을 쳐다보니, 달빛이 나뭇가지의 윤곽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그런데 나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 엘프야, 엘프야…….

    ─ 난쟁이도 잔뜩 있어. 무슨 일일까?

    ─ 무슨 일일까? 무서운 사람들이야. 무서운 일일 거야…….

    숲의 정령들이 나뭇가지에 숨어서 속닥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침입자들 때문에 겁을 집어먹었겠지. 바람과 바람 사이에서 정령들이 불안하게 종알거렸고, 나뭇잎은 서로 스치며 쏴아아 울어댔다.

    내가 녀석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미안하구나. 잠시 너희의 집을 빌리마.”

    조그마한 정령들이 나뭇가지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빼들었다.

    ─ 말도 안 돼. 위대한 주인께서 오셨어!

    ─ 위대한 주인님이라기에는 바람이 너무 작은걸…….

    ─ 바보야, 멍청아, 언제부터 태풍과 바람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니?

    그러자 어두운 숲속에서 빛무리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수백 개의 빛무리는 모두 정령이었다. 하늘에서 달빛을 나눠받은 것마냥 희미하고 뿌옇게 빛났다. 하얀색보다 하늘색에 가까운 빛이었다.

    “맙소사…….”

    “아르테미스이시여.”

    병사들이 입을 벌리고 위를 쳐다보았다.

    아인종인 그들에게 정령은 익숙한 존재였다. 그러나 정령은 기본적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들. 이토록 많은 정령이 깜깜한 숲속을 환하게 밝히자, 용병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반겨줘서 기쁘긴 한데, 빛은 꺼주지 않겠느냐? 우리는 지금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라서 말이다. 술래한테 들키면 큰일이 난단다. 조용히 해주면 고맙겠구나.

    내 던전에서 뛰어놀고 있을 정령들이 생각나서, 목소리가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정령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소곤소곤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 술래잡기래! 모두 조용히 해야 돼! 주인님을 방해하면 혼나.

    ─ 멍청아, 너가 제일 시끄럽잖아.

    ─ 쉿.

    ─ 쉬잇.

    천천히 빛무리가 어두워졌다. 아예 어두워진 것은 아니고 환하기가 반딧불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음. 괜찮았다. 이 정도라면 적들에게 이목을 끌지 않을 거다.

    정령들이 내 주변으로 꼬물꼬물 모여들었다. 녀석들 나름대로 조용히 한다고 조심하는 것일까. 거의 귓속말하듯이 나에게 물었다.

    ─ 주인님, 주인님. 누구랑 술래잡기하는 건가요?

    ─ 못 생긴 오크인가요? 발정난 켄타우로스인가요? 무시무시한 바실리스크인가요?

    ─ 모두 오래 전에 죽었어요. 아주 오래 전에. 여기엔 우리밖에 없어요…….

    ─ 인간들이 죽였어요. 숲도 많이 불태웠어요…….

    정령들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아이구, 귀여워라.

    가장 근처에 있는 아이를 들어올렸다. 정령이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오랜만에 봉인해둔 필살기를 꺼내들었다. 겨드랑이를 문질문질 간지럽힌 것이었다.

    ─ 꺄앗.

    정령이 웃음을 터트리려다가 급하게 자기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한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당장 웃겨 죽을 것처럼 발버둥치는 와중에도 끝끝내 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기특하기도 해라!

    내가 아빠 미소를 짓고 말했다.

    “우리는 인간들이랑 술래잡기를 하고 있단다.”

    ─ 꺄핫, 인간이요?

    ─ 인간은 같이 놀기엔 신용이 없는 거예요.

    ─ 걔네는 맨날 숲을 불태워요. 주인님, 인간을 믿으면 안 돼요.

    신용이라니 어려운 단어를 쓰는군.

    내가 작게 웃었다. 마왕으로서의 내 수준이 올라간 뒤로, 예전에는 꺄아- 꺄아- 하는 소리로만 들리던 정령의 목소리를 지금처럼 언어로 이해하게 되었다.

    “과연. 아주 나쁜 놈들이구나, 인간은.”

    ─ 맞아요. 인간은 되게 나빠요!

    ─ 나뭇가지에 내장을 매달아도 시원치 않은 거예요!

    정령들이 분분하게 불평을 쏟아냈다. 숲을 태워서 개간해야만 하는 인간종과 숲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요정족은 태생부터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내 부탁 좀 들어주겠느냐. 조금 뒤에 인간들이 저 앞을 지나칠 것이란다. 만약 인간들이 오는 것 같으면 몰래 나한테 알려주려무나. 나쁜 인간들을 내가 혼내줄 테니.”

    정령들이 얼마든지 맡겨달라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때 라우라가 전방에 정찰병을 배치하고 돌아왔다.

    “갑자기 숲이 빛나서 놀라지 않았는가.”

    라우라는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주군……아니, 궁중백.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

    평소대로 주군이라 부르려다 화급히 호칭을 고친 그녀에게 내가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정찰병들을 고용한 참이었습니다.”

    “……?”

    라우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

    숲에 도착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저길 봐라.”

    라우라가 저편의 지평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작이 화재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군.”

    정말이었다. 그곳만 유독 빛나고 있었다.

    라우라가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좋은 시점에 불을 질러주었다. 왕국군이 우리의 경로를 알아내고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하는 데 한나절, 원군을 편성한 다음 이곳까지 달려오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 최소한 하루가 걸린다.”

    “시간이 아슬아슬하지 않습니까?”

    “아슬아슬했다. 그렇기에 소녀는 본대를 밀라노로 진군시켰다…….”

    소녀라니. 일군의 총사령관이 자칭하기에 부적절했다. 주의를 줄까 싶었지만 주변 가까이에 병사가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관두었다.

    “이번 작전의 성패는 얼마나 적의 원군을 늦추느냐에 달렸지. 딱히 많은 시간이 지연될 필요는 없었다. 파비아 백작과 밀라노 공작이 격렬하게 다투는 한 시간 내지는 두 시간. 그 정도면 충분했다…….”

    라우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정령이 수풀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 주인님, 인간들이 잔뜩 오고 있어요!

    나는 허리를 굽혀서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령이 꺄아, 하고 방실거렸다.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의 지연인가…….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고 딱 그쯤에 적의 원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예측한 그대로였다.

    “라우라.”

    “주군이 말한 정찰병이 그거였군.”

    라우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주군. 멀리서 소녀를 지켜봐달라. 주군이 있으면 소녀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이를 말입니까, 데 파르네세 공작.”

    라우라는 중대장들에게 은밀히 명령을 하달했다.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이 조용히 군마에 올라탔다. 가끔 군마들이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수풀이 덮어주었다.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다가왔다.

    나는 정령이 전해주는 정보를 통해서 적군의 규모와 진용을 파악했다. 저들은 급히 강행을 하고 있는데도 선발대를 따로 꾸려서 앞장세웠다. 파비아 백작이 군재에 얼마나 통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경계심은 갖춘 듯싶었다.

    “적의 본대는 대략 오천입니다.”

    “호오, 기병이란 기병은 전부 끌고온 모양이로군.”

    라우라가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파비아 백작의 발언권이 의외로 높았는가. 아니면 밀라노 공작이 백성을 내버려두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것인가. 어느 쪽이든 고마울 따름이다.”

    보통 적군의 규모가 크다고 하면 겁을 먹거나 적어도 긴장하겠지. 라우라는 정반대였다. 마치 한겨울 산속에서 곰과 마주치고 '이번 겨울은 배부르게 보내겠군' 하고 웃는 전사처럼, 사냥감의 거대한 덩치에 라우라는 도리어 기뻐했다.

    라우라가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전군이 한 발자국 나아갔다.

    처음에는 마보(馬步)로 시작했다. 가볍게 걷는 느낌으로 군마들이 달렸다. 제1열과 제2열이 숲을 완전히 빠져나갔을 즈음해서, 속도가 트롯으로 올라갔다.

    제1열이 돌격 속도를 선보이면 그것을 제2열이, 제3열이, 제4열이 따라하는 방식이었다. 속도를 높이라는 하사관의 고함도, 전투를 앞두고 흥분에 찬 함성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기마 돌격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 앞에서 사르데냐의 기병이 길게 열을 이루어서 행군하고 있었다. 적군은 우리에게 완벽히 무방비하게 측면을 드러냈다. 다만 아무리 조용히 움직여도 말발굽 소리를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저들도 우리를 알아챘다.

    “기, 기습이다!”

    “말머리를 돌려라!”

    적군이 소란스러워졌다. 기습이다, 매복이다, 하고 고레고리 소리를 질러댔다.

    적군은 영지를 구원하기 위해 최고 속력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형을 바꾸기란 극히 어려웠다. 이미 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시점에서, 아군의 기병들은 최고 속력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소리를 죽일 필요는 없겠지.

    나는 목걸이에 걸린 성량 마법을 발동해서 사자후를 터트렸다.

    “헬베티카의 전사들이여! 돌격하라!”

    그것이 기점이었다.

    지금껏 숨마저 죽인 채 접근해가던 용병들이 전투함성을 토해냈다.

    “사르데냐 촌놈들을 쳐죽여라!”

    “거창! 거차아아앙!”

    “싸그리 쓸어버려!”

    군마가 날뛰면서 앞으로 돌격했다.

    적들도 그 나름대로 정예였는지, 어떻게든 대열을 이루어 아군의 돌격에 똑같이 돌격으로 맞받아쳤다. 문제는 거리였다.

    말에 속도를 붙이기 위해서 필요한 거리가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이미 사백 미터를 돌파하며 속도를 붙인 아군에 비하여, 적군에게는 고작 백 미터 남짓한 거리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결과는 명료.

    이쪽의 제1열과 적군의 제1열이 요란한 쇳소리를 울리며 충돌했다. 아군의 군마에 치여서 말째로 내팽개쳐지는 적병마저 있었다. 채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적군의 제1열이 부숴졌다. 말 그대로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왕국군의 제1열은 아무런 시간도 벌지 못했다. 저들은 이제야 제2열을 만들고 있었으며, 명백히 미완성된 대열이 아군의 돌격에 노출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 이상 전투가 아니겠지.

    삽시간에 전쟁터가 되어버린 평원에 나의 확성된 명령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전군, 학살하라!”

    일방적인 학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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