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63화 (363/510)
  • 00363 제2차 국화전쟁  =========================================================================

    이제 작전을 설명할 단계는 끝났다는 듯, 라우라가 거침없이 명령을 내려나갔다.

    그녀는 군사 작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했다. 더 큰 장점은 판단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드 블랑 남작! 그대는 본관과 함께 육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파비아로 향한다.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빠르게 진군할 것이다. 각오하도록.”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엘프족 용병대장이 군례를 취했다.

    이제 열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만큼 어려보였지만 저래 봬도 엘프. 아흔 살이 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이름은 줄리아나 드 블랑으로, 헬베티카에 있는 남작가 태생이었다.

    라우라가 다음 명령을 내렸다.

    “뒤낭 대장! 그대에게 보병 전체를 통솔할 권리를 내리겠다. 그대는 일천의 기병과 이만의 보병을 통솔하여 밀라노로 행군하라.”

    “밀라노 말입니까, 전하?”

    한 난쟁이족 용병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전 밀라노를 절대 공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바로 라우라 본인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밀라노로 향하라니 어리둥절하겠지. 라우라는 상대방의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고, 다시금 똑같은 명령을 뚜렷하게 내렸다.

    “아아. 단, 무슨 일이 있어도 민가를 약탈하지 마라. 그리고 밀라노를 공격할 필요는 없다. 포위할 필요도 없다. 단지 밀라노 근방까지 진군하여 도시를 지켜보면 충분하다.”

    “어렵지 않은 명령입니다.”

    난쟁이 용병대장도 굳이 상관이 설명하지 않은 것을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알고자 했다.

    “적군이 교전을 걸어왔을 경우에는 소관이 어떻게 대처하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제군의 판단을 신뢰한다.”

    라우라가 즉답했다.

    “제군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백 년이 넘도록 대륙을 전쟁터로 삼아 뒹굴었다. 반면에 사르데냐 촌놈들은 기껏해야 내전밖에 치뤄보지 않았다. 그대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경험과 본능은 월등하게 사르데냐를 앞선다.”

    “화, 황송합니다.”

    아랫사람이 아부를 떨면 허허 웃고 넘어가고 말겠지만, 윗사람이 마치 당연한 진실을 읊는 것처럼 대놓고 칭찬을 쏟아내면 아무래도 계면쩍기 마련이었다. 그 윗사람이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볼까 말까한 절세미인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흠, 크흠.”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겠지요. 으흠.”

    용병대장들이 영 엉뚱한 곳을, 예컨대 땅바닥이나 허공을 쳐다보았다.

    딴 게 아니라 자기네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험악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양반들이 웬 산골짜기 숫처녀마냥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가히 내 안구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도 남았다.

    그들을 향해서 라우라가 빙그레 웃었다.

    여름비에 갓 피어난 산수화처럼 화사한 미소였다.

    “뭐, 밀라노에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을 게다. 그대들은 보급 기지를 만드는 데 착수하라. 본관이 기지에 쌓아둘 식량을 넉넉하게 챙겨올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도록.”

    용병대장들이 입을 반쯤 헤벌레 벌리고 라우라를 바라보았다.

    라우라의 미소에 피격당한 순간 저들은 심장이 쿵, 하고 심각하게 울렸겠지. 이해한다. 나도 그래서 가끔 라우라가 웃으면 참지 못하고 던전이든 마을 대로든 가리지 않고 덮친다.

    “음? 본관의 얼굴에 뭐가 묻었는가?”

    라우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몸짓이 또 살인적으로 사랑스러웠다. 실로 심장에 해로운 여자라 아니할 수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평소처럼 아름다우십니다!”

    대장들이 다급하게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이미 얼굴이 붉어진 양반들이 여기 있었다. 하여간, 수컷이란 어찌할 도리가 없이 불쌍한 종족이다.

    ……아니, 잘 보니까 블랑 대장도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마 그쪽 취향인 것일까. 라우라는 이성과 동성을 불문하고 피격해버리는 저격수인 것인가…….

    괜찮다. 나는 대장들을 이해한다. 나야 라우라와 제법 오랜 시간 살을 나누었으니 일종의 면역력이 생겼다. 저들에게 없는 것은 면역력이다. 익숙해져라. 익숙해지면 편하다.

    “……궁중백은 왜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라우라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쪽을 쳐다봤다. 이 주군이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시선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단지 전쟁에 피폐해질 백성들을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슬퍼하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하아.”

    라우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소리가 회의의 마지막을 고했다.

    제국군은 즉각 21,000명의 본대와 6,000명의 분견대로 나뉘었다. 본래 총사령관이 본대를 맡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라우라는 정반대로 분견대를 지휘했다.

    제국군 본대는 그대로 밀라노를 향해서 진군했다. 이들은 밀라노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대신 천천히 압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전군, 최대 속력으로 진군한다.”

    라우라가 이끄는 6,000명의 기병은 처음부터 속도를 높였다.

    우리는 밀라노와 노바라 사이를 빠르게 질주했다. 적군은 나중에야 우리 분견대의 존재를 깨달았다. 그것도 도중에 적군의 정찰병과 우연히 마주쳤기 때문이다. 정찰병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멀리 도망쳤다.

    “추격해서 족칠까요, 전하?”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말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말머리를 돌릴 기세였다. 누가 용병으로 평생을 구른 아가씨 아니랄까봐, 적군만 보이면 저절로 어조가 거칠게 튀어나가는 듯했다.

    라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버려두어라.”

    아군 분견대는 정찰병조차 무시한 채 계속해서 강행군을 유지했다.

    분명히 왕국군은 당황했겠지. 대도시 밀라노와 군사기지 노바라가 쌍둥이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두 곳을 전부 무시해버리고 그냥 지나칠 줄은 몰랐으리라. 아군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정확히 하루 만에 밀라노-노바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돌파했다.

    상식을 뛰어넘은 기동에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혹시라도 적들이 우리의 배후를 공격해오지 않을까요!”

    한창 말을 달리고 있는 와중에 줄리아나 드 블랑 남작이 물었다.

    “아군의 본대가 밀라노를 포위한 것도 아닙니다. 밀라노에서 원병을 보내오고, 노바라에서 호응하여 또 원병을 보내버리면, 우리는 양쪽 방향에서 배후가 잡혀버립니다!”

    “정반대다, 드 블랑 남작.”

    라우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화답했다.

    “배후가 잡혀버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밀라노이다.”

    “예?”

    “어제 회의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사르데냐의 기본적인 작전 목표는 거점을 방어하는 것이다. 저들은 애시당초 우리를 단기결전으로 섬멸시킬 생각이 없으며, 그럴 만한 저력도 없다.”

    라우라가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드 블랑 남작을 바라보았다.

    마주 불어닥치는 바람에 라우라의 금발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흩날렸다.

    “작전 목표뿐만이 아니다. 병사 자체도 문제가 된다.”

    “병사가 문제…….”

    드 블랑 남작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시민병은 확실히 고향 도시를 지키는 데 필사적이다. 허나, 달리 말하면 농성전 말고 시민병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란 드물다. 도시 바깥에서 나와서 우리를 요격한다……말로 표현하면 간단하다만, 민병대 입장에서는 별로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겠지.”

    적군은 작전 목표상, 방어 거점인 밀라노에서 벗어나는 것이 곤란하다.

    또한 적군은 대다수가 민병대로 편성되어 있는 이상, 도시 바깥으로 진출해서 요격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적군에게 꼼짝없이 가만히 있도록 만드는 소극적 이유.

    “게다가 아군의 본대가 밀라노로 뻔히 진군하고 있다. 남작. 이런 상황에서 민병대를 거느린 채 도시를 방어해야 하는 밀라노 공작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도시를……지키라고 명령할 것 같습니다, 전하.”

    마지막으로 적군이 제자리에 있도록 적극적으로 강요하는 이유. 그것이 라우라가 밀라노로 진군시킨 2,1000명의 본대의 접근이었다.

    “밀라노 공작은 행여라도 원군을 보내느라 병력이 줄어든 사이에 이쪽의 본대가 공성전을 걸어오지 않을까 염려할 터. 고로.”

    고로, 설령 파비아가 약탈당하더라도 수비를 고집한다.

    라우라가 싱긋 웃었다.

    “본관이 지어낸 논리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 알겠는가, 남작?”

    “예? 아. 죄, 죄송합니다.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드 블랑 남작이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라우라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궁중백. 궁중백은 알겠는가, 우리 계획에 나 있는 구멍을.”

    “파비아 백작을 고려하지 않았군요.”

    내가 곧바로 대답했다.

    라우라는 본래 나를 주군이라 부르지만, 황제의 대리장군으로 임명되어 있는 만큼 남들의 이목이 있는 장소에서는 내가 존대하기로 결정했다. 만일 라우라가 나를 주군이라 부르면서 떠받들면 용병대장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라우라보다 나를 존중하는 용병대장이 틀림없이 나타난다. 사람이란 그렇다. 누가 더 권력자인지 파악하고 나면, 주저없이 권력자에게 따른다…….

    군중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더 많은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원정군은 라우라의 지휘 아래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밀라노를 지키는 민병대, 라고 말했지만 거기에 순전히 밀라노 시민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근처에 있는 도시나 마을에서도 병력을 끌어왔겠지요. ……그중에는 파비아의 민병대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 여기서 질문이다.”

    라우라가 씨익 웃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미소가 아니라 전쟁을 조종하는 책략가의 미소였다.

    “파비아 백작은 누구보다 본관을 두려워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본관을 노예로 팔아재낀 장본인이니. 자칫 보복을 당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겠지.”

    “과연.”

    “그런 백작이다.”

    라우라가 한 템포를 쉬고 더욱 짙게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이 자신의 영지를 향해서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백작에게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내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제국군은 파비아를 본보기로 삼아 쑥대밭으로 만들 속셈이다, 라고 생각하겠군요.”

    “백작은 졸지에 영지와 영지민을 싸그리 잃어버리고 패가망신하겠지.”

    “당연히, 사령관인 밀라노 공작에게 제발 원군을 보내달라 애걸복걸할 테고요.”

    라우라와 나. 우리 두 주종은 서로를 마주보며 히죽거렸다. 제3자가 옆에서 지켜보면 아연해질 모습이었다.

    “…….”

    실제로 드 블랑 남작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했다. 이런 대화에 면역력이 없는 것이겠지. 익숙해져라. 익숙해지면 편하다.

    “밀라노 공작이 그걸 허락하겠는가?”

    “백작에게 파비아가 소중하듯이 공작에겐 밀라노가 소중합니다. 들어줄 턱이 없습니다.”

    “허면, 백작은 공작에게 자기 영지밖에 챙기지 않는 비겁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겠군.”

    “공작은 분노에 차서 자기 영지는 자기가 알아서 챙기라고 백작한테 화낼 것입니다.”

    백작은 공작에게 겁쟁이에 비겁자라고 매도하고, 공작은 백작에게 군사 작전을 무시한 채 자기밖에 모르는 소인배라고 비난한다.

    최고 지휘부 차원에서 분쟁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결과는 단 한 가지.

    “파비아 백작은 단독으로 출진한다.”

    “겁쟁이는 도시에 틀어박혀 있어라. 내가 직접 그 성노예를 단죄한다. 뭐, 그런 식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는 주민을 피신시키는 게 목적일 테죠.”

    우리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아. 즐거웠다.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것을 농락하고, 상대편을 분열시키는 것은 다른 어떤 쾌감에도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런 것에 즐거워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저열한 부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라우라도, 나도, 이미 바닥까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군상이었다.

    내가 웃음을 참지 않으면서 물었다.

    “안전한 도시를 박차고 뛰어나온 백작을. 그것도 단독으로 나와버린 백작을 어떻게 요리할 생각입니까, 라우라 장군?”

    “이를 말인가.”

    라우라가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물론 성대하게 손님을 맞이해야지.”

    육천 명의 기병이 잔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목표는 파비아.

    아니.

    파비아와 밀라노 사이에 위치한 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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