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61 제2차 국화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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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력 1512년 5월 15일.
제국군은 이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산맥을 건너기 시작했다. 아직 삼만 명의 용병이 전부 모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용병대장들은 한 달 정도를 더 기다리고 난 뒤에 진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라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은 고향이 어디인가.”
“물론 헬베티카입니다, 장군님.”
“그렇다. 우리는 지금 헬베티카로 가고 있다. 자네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도 길잡이가 필요한가?”
라우라가 투구를 집어서 머리에 썼다. 그녀는 일개 병사처럼 허름하고 낡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제멋대로 데이지를 고문한 것을 벌하기 위해 라우라에게 백의종군이 내려졌는데 아직도 그 처벌은 유효했다.
“아직 집결하지 못한 병사들에게 전하라! 루가노에서 보자고.”
루가노는 알프스 산맥이 끝나는 지점에 들어선 도시였다. 헬베티카에서 사르데냐로 향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용병대장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가운데, 라우라가 그들을 향해서 씨익 웃었다.
“본관은 그대들이 샌님이라고 욕하는 사르데냐 왕국의 출신이다. 그런 본관보다 산맥을 늦게 통과한다면, 사실 헬베티카인이라고 자칭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겠지.”
그 말을 남기고 라우라는 막사에서 나갔다. 정말로 병력을 출발시키려는 모양새였다.
용병대장들이 어안이 벙벙해져 서로를 쳐다보았다. 평소에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던 난쟁이와 엘프도 지금만큼은 똑같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소풍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소집을 이렇게 멋대로 해도 문제가 없으련지……”
대장들이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참고로 나는 이번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권대사로서 원정군에 참여했다. 라우라가 군사를 이끌고 적군을 궤멸시키고 내가 뒤치닥거리를 한다. 그렇게 역할이 분담되었다.
물론 궁중 서열은 내가 라우라보다 높았다. 용병대장들은 난쟁이와 엘프로 이루어졌으므로, 인간인 라우라보다 마왕인 나를 알게 모르게 더 섬기었다. 사령관은 라우라이지만 막후의 지배자는 나라는 느낌이었다.
대장들이 라우라를 말려달라는 눈빛으로 애원했다.
“괜찮겠습니까, 전하?”
“이 군대의 총사령관은 라우라 데 파르네세 공작이다. 본인은 제국에서 파견된 궁중백. 한낱 외부자에 불과하지. 얌전히 명령을 받들게.”
내가 능실능실 웃었다.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니면, 혹시 공작보다 늦게 도착할까봐 두려운 것인가? 헬베티카 사람들이 산타기에 자신이 없는 줄은 미처 몰랐군.”
대장들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지역 감정을 건드리는 것은 유치하긴 해도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사실 유치한 만큼 효과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용병대장들은 마왕인 내 앞에서도 불쾌한 낯빛을 감추지 않으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사령관께서는 우리보다 이주일은 늦게 도착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날 회의에서 오간 대화는 모든 용병대에 전달되었다.
용병대장들은 간단한 도발에 분기탱천했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용병대는 행여라도 총사령관보다 늦으면 안 된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높은 산맥에서 호연지기를 길렀노라고 자신하는 헬베티카 용병들 입장에서, '사르데냐 촌놈' 출신의 총사령관보다 느리다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5월 30일.
헬베티카 용병들은 전 병력 27,542명 중에서 26,910명이 루가노에 집결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라우라가 알프스 산맥에 발을 들인 지 딱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이주일 만에 헬베티카 용병들은, 군대가 지극히 모여들기 어려운 산맥 지형에서 사실상 소집을 완료해버렸다. 전례가 없는 속도였다.
어느 용병대는 바타비아 공화국에서 여기까지 왔다! 무게가 나가는 갑옷과 무구를 전부 순간이동 마법으로 옮겨버린 다음, 마을에서 나귀를 구해다가 밤낮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마법서랑 나귀들을 구입하는 데 못해도 수천 골드는 들었을 테니 그야말로 불굴의 집념이었다.
라우라는 용병들을 치하했다.
“과연 헬베티카의 군인은 다르군. 보급관, 이걸 받게.”
라우라가 보급장교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장교가 제국어로 글자가 적혀 있는 종이를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무엇입니까, 사령관?”
“아군의 물자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허가증이다. 보급관. 지금 당장 연대를 이끌고 루가노의 민가란 민가는 모조리 돌아서 질 좋은 맥주와 포도주를 구입하라.”
라우라가 활짝 웃었다. 누가 봐도 반해버릴 것 같은 미소였다.
“병사들에게 전하게. 본관은 오늘 헬베티카 사나이들에게 반해버렸노라고. 소녀의 연심을 담아 선물을 보내니, 코가 삐뚫어지도록 즐기는 것을 허락한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용병대장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힘겹게 강행군을 펼쳐온 병사들에게 음식과 술이 수레째로 배달되었다. 병사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어리둥절하다가, 소식을 전해듣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파르네세 공작 전하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평야를 가득 매웠다.
용병들은 비싼 급료를 받아가며 일하지만 그중 절반 이상이 식비로 제외된다. 갑옷과 무기도 자기 돈으로 구입하고 관리해야 하므로, 용병이 벌어들이는 돈은 목숨을 건 것치고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평소 술이라고 마시는 물건은 식초물이나 다름없는 포도주, 말오줌에나 비유할 법한 맥주. 그것도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날에야 사령관이 생색을 내며 하사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제대로 된 술통이 내려왔다. 저절로 만세 소리가 나오겠지.
병사들이 술안주로 선택한 화제도 당연히 미모의 총사령관 각하였다.
라우라는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가로질렀는데, 이때 병졸이 입는 옷을 똑같이 입었고, 병졸이 먹는 음식을 똑같이 먹었으며, 병졸이 자는 곳에서 똑같이 잠들었다. 라우라와 함께 보름을 보낸 병사들은 신나서 이 이야기를 떠들었다.
수천 명이 한꺼번에 떠드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군에 퍼졌다.
용병들은 안 그래도 거나하게 술판을 벌려주어 호감이 가던 판이었다. 저런 이야기까지 접하자 단숨에 라우라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하룻밤이 지나자, 라우라는 억세고 반항스러운 용병들의 마음을 확고하게 쥐어잡았다.
정점은 다음날에 있었다.
소집일에 늦어버린 오백 명의 병사가 루가노에 도착했다. 용병들은 이 지각쟁이들을 향해 야유를 쏟아부었다. 약속 날짜를 지키지 못했으니 군법을 엄격하게 적용시킨다면 참수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삼만의 병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라우라가 책임자를 불러들였다. 난쟁이족 연대장이 걸어나왔다. 오른눈에 안대를 낀 난쟁이였다.
“군법은 지엄하다. 자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겠지.”
“예, 공작 전하.”
난쟁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미 각오를 마친 얼굴이었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대의 연대와 그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겠다. 무엇 때문에 늦었는가?”
“부상자를 부축하고 오느라 시간을 지체했습니다.”
라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발을 벗어라.”
생뚱맞은 명령이었지만 난쟁이는 아무런 의문을 표현하지 않았다. 난쟁이가 가죽이 겹겹으로 된 신발을 벗자, 그곳에는 볼품없는 난쟁이족의 발이 있었다. 물집이 엉망진창으로 터져서 흉측했다.
그때 용병대장들이 라우라의 행태를 보고 기겁했다.
“아니!”
“공작 전하!”
라우라는 땅바닥에 몸을 웅크리더니,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난쟁의 발등에 입술을 맞춘 것이었다. 대륙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라우라였다. 그녀가 못 생기기로 유명한 난쟁이족, 그것도 신체에서 가장 더러운 발에 키스를 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장교와 병사도 깜짝 놀랐는데 졸지에 공작 전하께 발등 키스를 받아버린 장본인은 오죽하겠는가. 그녀를 말리지도 못한 채 온몸이 굳었다.
라우라가 일어나서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이 자는 소집일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탈영하지 않고 이곳에 왔다. 군법으로 처벌될 것임을 알면서도 본관의 명령에 충실한 것이다. 대저 보상을 바라면서 싸우는 병사는 오합지졸이고, 기꺼이 처벌을 받아들이는 병사를 정예라고 했다.”
라우라가 난쟁이 연대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부상병을 탈주병으로 처리하고 급히 서둘렀다면 이 자는 처벌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자는 동료와 부하를 버리지 않고 동시에 군법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헬베티카의 병사들이여! 나는 그대들만큼 동료를 사랑하고 군법에 충실한 전사들을 본 적이 없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 호응했다. 소리는 금세 전염되어 이윽고 삼만 명의 병사 전체가 함성을 내질렀다. 난쟁이 연대장은 감격하여 두 무릎을 꿇고 라우라에게 부복했다.
이 순간, 라우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병사들과 일체가 되었다.
본래 용병의 단점은 연대마다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똑같은 보병이래도 장창을 애용하는 부대가 있고, 방패와 중검의 조합을 애용하는 부대가 있다. 개개의 전투력이 강력하지만 개성이 천차만별인 용병대를 조화롭게 운용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 난점을 라우라는 총사령관에 대한 신뢰로 해결했다. 장교와 병사의 마음을 얻었다. 여기서 마음이란 좋은 술을 마시고 싶다는 가장 기초적인 욕구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긍지를 이해받고 싶다는 가장 드높은 욕구까지 통틀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치 않은 싸움터라도 라우라가 명령한다면 기꺼이 몸을 던지겠지. 동료에 대한 의리를, 용병으로서의 긍지를 이해해준 상관에게 끝까지 충성할 것이다. 라우라가 그들을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틀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서 라우라가 명령을 내렸다.
“산사람들의 실력을 평원놈들에게 보여주어라!”
라우라 본인도 이른바 평원 촌놈에 해당했지만 장교들 중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원정군은 재빠르게 진격했다. 어느 강줄기에 도달하자, 이미 이쪽의 진군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사르데냐의 기병들이 군영을 차리고 있었다.
“수가 많지 않습니다. 척후병입니다, 공작 전하.”
“즉시 공격한다.”
“예?”
라우라가 다짜고짜 공격 명령을 내리니 대장들이 놀랐다.
라우라의 표정은 무덤덤한 그대로였다.
“만약 우리가 이곳으로 진군해올 것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더라면, 저 강줄기 너머에는 척후병의 진지가 아니라 본진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본진이 이곳에 없다는 것은 아군의 대략적인 경로만 파악했다는 뜻이다!”
용병대장들에게 설명하면서 라우라는 직접 곡도를 빼들었다.
“적군은 아직 우리가 여기 도착했음을 모르고 있다. 이대로 척후병을 전멸시키고 깊숙하게 전진하여, 적군의 본진을 기습한다! 돌격하라!”
그리고 대장들이 각 연대에 명령을 하달하기도 전에 라우라는 홀로 말발굽을 내달려 뛰어나갔다. 용병대장들은 화들짝 놀라서 라우라의 뒤를 쫓았다.
“뿌, 뿔나팔을 불어라! 돌격하라!”
“공작 전하를 뒤쫓아! 제기랄, 절대로 전하를 혼자 내버려두지 마라!”
“돌격하라! 전군, 돌격하라!”
나팔수들이 허겁지겁 뿔나팔을 불었다.
“와아아아! 공작 전하께서 먼저 나아가셨다!”
“전하께 뒤쳐지지 마라, 애송이들아!”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강을 도하했다. 강폭이 좁았지만 그래도 깊은 곳은 강물이 난쟁이의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곳을 이천 명의 선봉대가 막무가내로 돌격했다.
진형도 없었다. 라우라와 용병대장들을 선두로 하여 역삼각형 모양으로 전군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나갔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무모한 전군 돌격이었다.
이것이 제2차 국화전쟁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 작품 후기 ============================
그리고 제2차 국화전쟁은 전설로 승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