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59 외교전의 걸작 =========================================================================
철저한 계급사회인 이 시대.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성노예의 낙인이 찍혔다는 것은 결코 씻지 못할 불명예였다. 귀족은 물론이고 평민들도 성노예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하물며 라우라는 사생아가 아니냐는 의혹이 옛날부터 있었다. 제국은 졸지에 사생아에다가 성노예이기까지 한 젊은 여자한테 공작 작위를 내달라고 주장한 셈이 되었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사르데냐 왕국은 훌륭하게 대응했다. 말싸움에서는 너희가 승리했다.
그러나 어리석다. 너희는 논쟁에서 승패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제국은 최대한 노력했다. 대륙의 평화. 종족의 화해를 지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사르데냐 왕국은 치졸한 인신공격을 감행하면서까지 이쪽의 모든 배려를 무시했다…….
사람들은 사르데냐의 주장을 이해할 것이다. 아무렴 성노예한테 공작위를 줄 수는 없다. 그건 옳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눈썹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열국과 종족의 화합이라는 대국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고. 겨우 한 명의 노예에 불과하다. 대의를 위하여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지 않은가.
옳고 그름의 문제를 차치하고 일단 사르데냐가 무척이나 치졸해보인다. 속이 좁다. 시야가 짧다. 부정적인 인상을 아무래도 지우기가 힘들다…….
말 그대로 육참골단, 살을 내주되 뼈를 취할지언저. 제국은 말싸움에서 졌지만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무리 작업뿐.
나는 황제의 입을 빌려서 언론 플레이에 들어갔다. 루돌프 황제는 장문의 선언문을 적어 각국 대사에게 보냈다. 선언문은 관리들에 의해 도시 광장에서 큰소리로 읊어졌다.
─ 짐은 만방에 선포한다. 들으라, 대륙에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범법자들이여. 지엄한 언약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 합스부르크 제국은 지금 이 시간부로 불법적인 경로를 통하여 노예가 된 신민에게 전적인 자유를 선언한다. 노예가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의 소유문서에 도장을 찍었을 경우, 모든 문서는 법적인 효력을 상실한다.
─ 사르데냐는 들으라. 그대들은 지난 내전에서 패배한 가문들을 필요 이상으로 능멸했다. 노인에서 갓난아기까지 3대를 처형한 것은 넘어간다 할지라도, 도대체 어떤 야만적인 습성이 그대들의 가슴에 움크렸기에 멀쩡한 공녀를 성노예로 팔아재낀 것인가!
─ 대저 귀족의 명예는 설령 황제라 하더라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 오래된 도리이다. 설령 반역자라 해도 귀족은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귀족으로서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야 마땅하다.
─ 그러나 므네모쉬네 여신이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귀족에 대한 예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존중조차 망각해버렸노라! 국화전쟁에서 파르네세 가문이 몰락했을 적 라우라 데 파르네세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겨우 열네 살에 불과했다.
─ 열네 살의 소녀, 전쟁에 어떠한 책임도 없는 이 아이를 저 참람한 인간들이 성노예로 전락시켰다. 고작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서!
─ 이제 와서 그대들은 무고한 피해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하는 보상에 대해서 입을 다물었고, 정중한 사과 대신에 도리어 분노를 퍼붓고 있다. 이 후안무치함에 짐은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 짐은 분노에 마주해서는 분노로 되돌려주는 방법밖에 모른다. 그리고 여신들 앞에서 맹세하건대, 짐은 이 무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노라.
─ 들으라, 가증스럽게도 권력의 이름으로 무고한 소녀에게 폭력을 휘두른 자들이여. 제국의 주인이 지금 그대들에게 경고를 내리고 있다.
─ 사르데냐 왕국은 공식적으로 라우라 데 파르네세에게 사과하고 즉각 공작위를 반납하라. 아울러 본래 파르네세 가문이 다스리던 파르마 일대의 영지를 반환하라. 마지막으로, 감히 제국의 대리장군을 능멸한 파비아 백작은 짐의 앞에서 직접 사죄하라.
─ 이것은 최후통첩이며 번복의 여지는 전무하다.
─ 기억하라. 제국의 권고를 무시한 이들이 어떠한 결과를 맞이했는지. 만일 그대들이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역사가 그대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선언문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굵직굵직한 주제가 몇 개나 있었다. 향후 제국이 불법적인 노예매매를 철저하게 단속할 것이라는 점, 제국의 황제가 직접 사르데냐 왕실을 적나라하게 비난했다는 점, 양국이 일촉즉발의 상태에 놓였다는 점…….
역시나 본질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는 데 있었다.
성노예한테 공작위를 내리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그러나 정반대로 생각해서, 공작가의 여식을 성노예로 만들어버리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두 쪽으로 나뉘었다. 그래도 성노예에게 공작은 안 된다고 반응하는 측, 애당초 성노예로 만든 쪽이 잘못한 거라고 비판하는 측으로. 철두철미한 계급의식이 오히려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어느 쪽도 사르데냐 왕국에는 호감을 품지 않았다.
사태를 정리해볼까.
첫 번째, 성노예가 공작이 되는 것이 불가하다는 사르데냐의 주장은 옳다.
두 번째, 그러나 애시당초 공작가의 여식을 노예로 전락시킨 것은 사르데냐의 책임이다.
세 번째, 이처럼 책임이 명백한 사안에 있어서 사르데냐는 대륙의 평화와 종족의 화합을 무시하면서까지 잘못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각국 귀족들은 빠른 속도로 결론을 도출해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두 번째 지점에서 분개했다. 그들도 귀족인 이상, 아무리 반역자의 딸이라 해도 노예의 인장을 찍어버리는 처사에는 공분했다.
처음에는 제국이 말싸움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호감, 귀족들의 심정적인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합스부르크 제국은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자아.
체크메이트다.
사르데냐 왕국 입장에서는 제국의 최후통첩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일부러 황제의 선언문을 매우 무례한 어조로 작성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설령 제안을 받고 싶더라도 말투가 저토록 오만방자해서야 도저히 타협할 수가 없겠지.
황제의 호통에 사르데냐 왕실이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왕실의 체면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말 그대로 최후통첩.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다.
결국 수순은 예정되어 있었다.
본인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사르데냐의 국왕은 강경하게 나왔다. 제국은 늙고 병들어 분별을 잃어버렸으며, 노망이 난 노인네처럼 주변에 불쾌감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 우리가 라우라 데 파르네세에게 사과하기 이전에 제국이 우리에게 저지른 무례를 사과해야 할 것이다.
─ 파르네세 가문은 공작위가 아니라 두 단계 격하하여 백작위로 복권시키겠다.
─ 파비아 백작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발표했을 뿐이며,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과할 수 있을지라도 왕국 차원에서 사죄하는 일은 결단코 불가하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꺼지라는 소리였다.
나는 사르데냐에서 보내온 문서를 읽고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읽어봐도 선전포고로 보이는군요, 후작.”
내게 손수 외교문서를 전달해준 사람은 지난 번에 특사로 파견된 로디 후작이었다. 후작은 이쪽의 안색을 살피면서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나마 파르네세 가문을 백작위로 복권시켜주겠다는 지점에서 성의가 보였다. 아마 왕실의 체면을 살리면서 동시에 이쪽의 제안을 만족시킬, 일종의 타협점을 찾아보려고 했겠지. 문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는 것일까.
아직도 사르데냐 왕실은 자기네의 체면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 믿음이 과대망상증에서 비롯하는 헛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겠다.
“궁중백. 합스부르크의 황제 폐하께서는 지나치게 아국의 명예를 무시하셨습니다…….”
“명예? 지금 명예라고 말했습니까, 후작?”
내가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무엇이 명예인지 말씀드리지요. 불의를 보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명예입니다. 이미 넘어가버린 불의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사죄하는 것이 명예입니다. 귀국의 왕실은 명예라고는 길가에 나돌아다니는 개만도 모르는 무뢰한으로 가득합니다.”
“말이 지나치오!”
나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후작에게 던졌다. 후작은 당황해서 가슴팍에 부닥친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받았다.
“궁중백, 이것은?”
“우리 사이에 이제 지나침 따위는 없습니다. 후작. 그건 선전포고문이요.”
후작이 눈을 감고 절망했다.
“여신이시여…….”
“황제 폐하께서는 귀국에서 진솔하게 사과해오지 않을 것을 이미 점치고 계셨습니다. 한 소녀의 명예조차 챙기지 못하는 나라에서 어찌 국가의 명예를 챙기겠는가. 그것이 폐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탁자에서 작그마한 종을 집어서 흔들었다.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데이지가 종소리를 듣고 접견실에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후작께서 귀국길에 오르신다고 한다. 황궁 정문까지 정중히 배웅해드려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후작은 고작 몇 분 사이에 이십 년은 늙어버렸다. 완전히 힘이 빠져버려 마치 곱추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방향성 없는 발걸음으로 접견실을 나갔다.
나는 창가에 서서 후작이 궁전을 나서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후작은 몸을 돌려서 궁전을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오른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 그곳에 서 있다가 힘없이 발길을 옳겼다.
“롱그위 성녀.”
나는 후작이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탁자 위의 통신수정구를 가동했다. 곧이어 수정구에서 뿌옇고 푸른 막이 새어나왔다. 거기에 자클린 롱그위 성녀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방금 막 선전포고가 이루어졌습니다. 준비하십시오.”
─ 기어코 전쟁이 일어나는군요. 당신이 바라는 대로 일이 풀려서 기분이 좋나요?
롱그위 성녀가 예의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입꼬리를 말아올려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전달하는데 거의 도가 텄다. 성인군자라도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늘어질 만큼 파괴력이 막강했으나, 예전에 함께 밤새도록 술을 마신 이후로는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도리어 상쾌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예, 무척 기분이 좋군요. 덕분에 롱그위 성녀에게 선물을 줄 수 있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모쪼록 제 선물에 기뻐해주시길 바랍니다.”
─ ……쯧.
롱그위 성녀가 대놓고 혀를 찼다. 정말로 이런 여자가 성녀로 뽑혀도 괜찮았을까? 아테나 대신전에는 마조히스트밖에 없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 알겠어요. 여왕 전하께 연락을 전달하지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불법적인 노예매매를 반대했습니다. 대신전들은 오래 전부터 노예매매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을 터.”
─ ……대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제국을 지지하도록 발표하라는 말씀인가요?
“굳이 대신전의 공식발표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전도 대놓고 노예매매를 반대하기에는 가려운 구석이 있겠지요. 하지만 성녀가 '개인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것쯤이야 상관없을 것입니다.”
롱그위 성녀가 눈썹을 째푸렸다. 미인은 눈썹을 찌푸리는 것도 그림이 되었다.
─ 성녀의 발언은 이미 그 자체로 대신전과 연관돼요. 성녀에게 순전히 개인적인 발언이란 있을 수 없어요. 이렇게 단순한 것도 모르나요?
“괜찮습니다. 공식적이지 않되 공식적인 발언이 되도록 하면 그만입니다.”
─ 공식적이지 않되 공식적인 발언?
내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폴리투니아와 협상해서 얻어낸 땅을 대신전에게 공짜로 뿌렸지 않습니까. 명목에 불과하더라도 아무튼 신전의 명의로 된 영지가 추가된 것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한테 보답해줘야지 않겠습니까?”
─ ……과연. 대신전의 공식발표가 아니라 성녀 개인의 지지발언으로 빚을 퉁칠 수 있다면, 대신전 입장에서도 싸게 먹히는 것이라고…….
“바로 그렇습니다.”
롱그위 성녀가 한숨을 쉬었다.
─ 지독하네요. 정말로 지독해요. 당신이 하루 빨리 길거리에서 객사하도록 진심으로 여신께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신들께 사랑을 받고 있어서 아마 그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을 겁니다.”
롱그위 성녀의 코웃음과 함께 통신은 거기서 끊겼다.
다음날, 합스부르크 제국은 정식으로 사르데냐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그와 함께 노예매매에 관하여 제국을 지지하노라고 롱그위 성녀가 발표했다.
아테나의 성녀가 나서자 자기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나머지 성녀들도 지지선언을 내놓았다. 이러한 지지선언은 불가피하게 마치 제국의 선전포고를 지지하는 것처럼 비추었다. 사르데냐 왕국에게는 미리 애도의 말을 전하자.
단념해라. 그저 상대가 조금 악질적이었을 뿐이다.
뭣하면 길을 걸어가다가 운이 나빠서 개똥이라도 밟았다고 생각해라. 물론, 개똥에 미끄러져서 머리통이 깨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