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디펜스-358화 (358/510)
  • 00358 외교전의 걸작  =========================================================================

    “……이 사람이 데 파르네세 장군을 내 직접 만나보겠소.”

    “호오.”

    개인적으로 만나서 설득하려는 것일까.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는 후작의 노력이 가상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가련하다고 표현해야 적절하겠지.

    “미리 말씀드리지요. 장군을 직접 설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이건 말도 안 되오. 한참 예전에 멸문한 가문 하나 때문에 양국이 전화에 휩싸일 수는 없소. 신민들이 견뎌야 할 고초를 조금이라도 염려한다면 장군도 마음이 기울 터요.”

    내가 작게 웃었다.

    “라우라 장군은 제 연인입니다. 후작.”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는 말이외까…….”

    후작이 신음했다.

    그는 그래도 라우라를 한번 만나보겠다고 고집했다. 굳이 값비싼 순간이동 마법서를 써가면서 내 영지까지 찾아가겠다는데 말리지 않았다.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후작은 쓸쓸한 발걸음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나는 공식적으로 외교 채널을 가동했다.

    황제 폐하의 대리장군에게 명예를 되찾아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이를 위해 사르데냐 왕국측에서 협조해줄 것을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파르네제 가문을 복권시켜준다면 이에 대해 충분히 사례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내 발표를 전해들은 각국의 대사들 중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딱히 예전에 파르네제 가문이 다스렸던 영지를 내놓으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그저 배신자로 낙인 찍었던 것을 풀어달라고 부탁했을 뿐. 사례금으로 십만 골드라는 거금까지 내걸었다. 간단하게 해결될 사안으로 보였겠지.

    ─ 반역도당의 복권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르데냐 왕국에서 거부의 의사를 밝히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정보원을 최대한 돌렸겠지. 각국에서는 이것이 합스부르크 황실과 사르데냐 왕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임을 파악했다. 뭐, 국화전쟁은 워낙에 유명한 내전이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곧바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최대한 쇼를 연출했다.

    ─ 황제 폐하께서는 대리장군을 각별히 아끼고 계신다.

    ─ 파르네세 공작가를 복권해준다면 사례금 십오만 리브라를 어떠한 유예도 없이 즉각 보답하겠다.

    마치 제국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위장했다.

    사르데냐 왕국에서는 사례금은 필요없으니 내정간섭이나 중단하라고 일축했다. 우리는 처음에 십만 골드로 시작한 사례금을 십오만, 십칠만, 이십만 골드까지 가파르게 올렸다. 타국에서 보기에는 제국이 갈등을 피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걸로 비추었다.

    하지만 사르데냐 왕국은 한사코 거절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국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불만이 한 마디씩 흘러나왔다. 제국의 황제가 몸소 부탁한다고 얘기하는데 지나치게 단호한 것 아닌가, 하고.

    딱히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소한 문제가 자칫 본격적인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까봐 염려된다, 그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바로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 아국은 폴리투니아 왕국과 분쟁을 종식하고 서로 영원히 협력할 것을 다짐한다.

    ─ 양국의 국경지대를 영구중립지대로 선포하는바,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만신(萬神)들께 이 지역을 봉헌하노라.

    폴리투니아 왕국과 전격적인 화해를 선언한 것.

    대륙의 열국은 이 결정을 환영했다. 안 그래도 바토리 대왕이 군대소집령을 걸어버린 탓에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되던 판국이었다. 신전들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공짜로 영지를 얻게 생겼으니 열렬하게 기립박수를 보내왔다.

    제국에서는 평화를 바란다. 그 제스처가 강력하게 먹힌 것이었다.

    한술 더 떠서 바토리 대왕도 '쇼'에 참여했다.

    ─ 누구나 입으로 평화를 부르짖기란 쉽다. 그러나 평화의 진정한 실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반걸음씩 양보하는 것이다. 바로 이 반걸음을 양보하지 못하기에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제국은 달랐다.

    ─ 제국이 진심으로 평화를 바란다는 것에 본인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은 단지 평화로운 해결책을 바랐을 뿐이지만, 제국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영구한 평화를 이룩하자고 제안했다.

    ─ 제국은 본인에게, 그리고 열국에 진정으로 평화를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러한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쯤 바토리 대왕의 여동생은 우리쪽에서 파견한 흑마법사 덕분에 서서히 저주가 풀리고 있었다. 대왕은 동생을 치료해준 것에 대해 보답한 것이었다.

    뭐, 완전히 보답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하지. 넓게 보자면 바토리 대왕은 자신의 혈육을 구해준 빚을 말 한 마디로 갚아버린 셈이니까. 곰처럼 생긴 주제에 하는 짓은 능구렁이야, 능구렁이.

    사르데냐 왕국 입장에서는 얼떨떨하겠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었다.

    대륙이 화기애애하게 러브 앤 피쓰를 외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관대하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 파르네세 공작가의 복권에 대하여 이십삼만 리브라를 사례금으로 보상하겠다.

    그리고 단호한 거절.

    사태가 여기까지 흘러가자 드디어 열국의 대사들이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외교적 수식어가 잔뜩 붙었지만, 잔가지를 전부 털어내고 핵심만 뽑으면 간단했다.

    ─ 거 좋은 분위기에 눈치 없이 산통 깨지 마시오!

    ─ …….

    사르데냐 왕국은 억울하기 그지없겠지.

    대륙에 말랑말랑한 공기가 감돌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이쪽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거쳐서 겨우겨우 누가 정당한 지배자인지 가려냈다. 이제 와서 반역자의 가문을 복권시켜주면 그때 흘린 피는 뭐가 되는가.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내정 간섭이었다.

    사르데냐는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들까지 똘똘 뭉쳐서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응했다. 파르네세 가문은 그들 모두에게 원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

    사르데냐 왕국은 전혀 내 상대가 안 되었다.

    나는 분위기가 이렇게 될 때까지 카드를 아끼고 또 아꼈다. 일단 게임이 이쪽에 유리해진 이상 더는 주저할 게 없었다. 나는 그동안 숨겨왔던 포문을 열어재꼈다.

    ─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인류와 마족이 하나로 화합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자 상징이다! 제국의 총사령관은 인간이며, 바로 그녀의 지휘 아래 모든 종족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어떻게 이 상징적 위인을 일개 반역자로 치부하는가!

    ─ 사르데냐는 전 종족의 평화와 화합이라는 기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어찌 이들의 근시안에 통탄하지 않겠는가?

    ─ 사르데냐에게도 사르데냐 나름대로 사정이 있음은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정도 인류와 마족의 항구적인 평화라는 대의명분보다 앞서지 못한다.

    그야말로 외교적인 융단폭격.

    여태까지 얌전히 타협안을 제시한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맹렬한 비난을 쏟아부었다.

    한 가문을 복권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폴리투니아 왕국과 화해한 것을 기점으로 이 문제는 대륙의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느냐 깨트리느냐 하는 문제로 커졌으며, 이제는 심지어 인간종과 마족이 협력한다는 상징물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되었다!

    이건 사실 가장 기본적인 수사학 기술이었다.

    상대방의 주장은 최대한 확대해서 해석하고, 내 주장은 한껏 최소화시킨다.

    요컨대 당신들이 가문의 복권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저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불과하지 아니하고 '모든 나라가 순조롭게 화해 모드로 들어가는 것을 눈치없이 초치는 짓거리'이자 '모처럼 마족과 인간종이 화합하려는 걸 망치려는 행위'이다.

    그에 반해서 우리는 '고작' 한 가문의 복권을 바랄 따름이다.

    이 확대 해석의 기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물론이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외교전에서도 완벽하게 유효했다. 사르데냐 왕국은 게임에서 내게 완패했다.

    나는 황궁의 테라스에 앉아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에 들린 와인잔이 샛노란 햇빛으로 그윽하게 반짝거렸다.

    “이것이 수사학의 요체이다, 데이지.”

    내 가슴은 깊은 만족에 잠겼다. 대륙을 장기판으로 삼아 일국을 고립시켰다. 이만큼이나 만족감을 안겨주는 일이 따로 없었다.

    “수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세우는 것입니다.”

    데이지가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대답했다. 내가 피식 웃었다.

    “역시 너는 우둔하다. 항상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

    “잘 기억해둬라. 수사학에서 승리는 부차적이다.”

    나는 입안을 와인으로 적시고 말했다.

    “자신이 논쟁에 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하나 있지. 바로 논쟁을 나와 상대방의 일대일 싸움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당연하다. 나는 사르데냐 왕국과 상대하고 있을 때 그들과만 싸운 것이 아니다. 폴리투니아가 보고 있고, 프랑크가 보고 있고, 튜튼이 보고 있으며, 바타비아가 보고 있지.”

    수사학이란 단지 말싸움을 화려하게 치장해주는 기술을 뛰어넘는다.

    한 명의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중과 관객을 설득하는 것. 그것이 수사학이다.

    “만일 말싸움에서 이겨본들 목소리가 시끄러웠으며 몸동작에 절도가 없었고, 주장에 대의와 명분이 실종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는 관중들의 호감을 잃어버릴 것이요, 결국 전투에서 승리하되 전쟁에서 패배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고로 수사학은 본질적으로 기사의 결투가 아니라 검투사의 대결이다.

    검투사는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것 이상으로 '멋지게' 상대를 압도하는 게 중요하다.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인기를 얻는다. 그리하여 땅바닥에 꺼꾸러진 상대방을 향하여 관객들이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를 연호하게 된다면, 비로소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쪽이 정의로운 것처럼 위장하라. 이쪽에 정의가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게 만들어라. 그 이후에나 전쟁을 논하는 법이다.”

    “……하지만 아버님. 아직 전쟁에 돌입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해보입니다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확실히 마지막 불꽃놀이가 부족하지.”

    나는 와인잔 너머로 석양을 바라보았다. 유리에 노을빛이 부드럽게 굴곡되었다.

    “그럴 때는 단지 불꽃을 선물해주면 그만이다.”

    사흘 뒤, 국제사회의 비난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시기.

    사르데냐 왕국의 파비아 백작이라는 자가 폭탄을 터트렸다.

    ─ 라우라 데 파르네세는 일찍이 성노예로 팔린 천민이다.

    ─ 그녀는 노예경매소를 탈출하여 합스부르크로 도망쳤으며, 자기 마족에게 팔아 목숨을 부지했다. 반역자 집안을 복권하는 것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거늘 하물며 성노예를 공작으로 추대하라니 말이 되겠는가!

    참고로 파비아는 라우라의 노예경매가 이루어졌던 도시이다.

    이 폭탄 발언은 외교판을 강하게 흔들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합스부르크 황제의 대리장군을 성노예라고 비하하는 것은 적나라한 모욕이었으므로.

    파비아 백작은 제 딴에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라고 여겼겠지. 라우라가 성노예였다는 증거를 마음껏 뿌려버렸다. 대부분은 이쪽에서 몰래 보내준 자료였다. 뭐, 백작 본인이야 스스로 찾아낸 증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폭로는 효과가 확실했다. 계급 관념이 투철한 귀족들은 사르데냐를 조심스레 지지했다. 이대로 외교전이 지속될 경우 어쩌면 이쪽이 불리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백작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외교전으로 이번 사태를 끝마칠 생각이 처음부터 전무했다는 것이다.

    “군대를 소집하라.”

    ――명분은 충분.

    감히 제국의 대장군을 모독한 자에게 철퇴를 내리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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